한국의 방송은 미국 유명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 같은 인물을 영원히 꿈꾼다. 그러나 여성 진행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여전히 견고하고, 그 벽을 깨부수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과 너무도 많은 노력이 필요할 듯 싶다. 그런데 이 견고한 장벽에-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작은 몸으로 열심히 부딪히는 이가 있다.
한 때는 '순악질 여사' 였고 이제는 존경받는 방송인이 된 그녀. 코미디언 김미화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순악질 여사와 김미화.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김미화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통을 연속이었다. 가난에 허덕였기에 시장통에 나가 직접 야채를 팔아야했고, 어머니의 이혼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그녀는 그 때부터 '웃음' 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그녀가 죽을 둥 살둥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도 바로 어린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 라는 김미화의 삶에 일대 터닝포인트가 마련되었던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 살이었던 1983년이었다. 1983년 개그콘테스트 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방송일에 뛰어들었던 그녀는 <쇼 비디오쟈키> 에 개그맨 김한국과 함께 '쓰리랑 부부' 라는 코너로 동반출세의 길을 걸었다.
당시 일자눈썹과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음메, 기살어!" 를 외치던 김미화의 모습은 수 많은 시청자들에게 시원한 웃음을 안겨다 주었고 종영된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김미화는 '순악질 여사' 로 회자된다. 방송생활 24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김미화와 김한국이 부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꽤 되니 이것만 봐도 이 프로그램의 인기는 말 다한 셈이 아닐런지.
"저는 코미디언이죠. 저는 죽어서도 코미디언이죠. 죽을 때 무대에서 코미디 연기하다가 쓰러져 죽는 게 소원이에요. 나이 들어도 코미디 무대에 서고 싶은데 사람들이 받아주느냐, 그게 문제죠. 돈 좀 그만 벌지 할 수도 있고요. 선배들이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중의 사랑을 못 받고 무대에서 물러나요. 돈 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성취감을 쫓고 무대에서 일생을 마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도 못해요.
저는 그러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도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열심히 하고 후배들의 영역을 넓혀 줘야 해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게끔. 저 스스로도 게을러지지 않게 채찍질하고, 나이 들었으니까 너희들이 나를 받들어라, 하는 건 젊은 PD나 후배들이 피곤해 하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부담스러워 하는데, 그 갭을 줄여야 해요. 나이 드는 게 힘든 건, 인간관계를 맺는 거죠. 젊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사고 다가가느냐가 어려워요, 하지만 진실로 대하면 돼요. 또, 제가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재밌게 바라봐 주기도 하구요. 내 직업이 코미디언인게 너무너무 좋아요, 행복해요."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가 된 순악질 여사.
20여년이 넘는 방송생활 동안 그녀의 코미디 대표작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지만 정작 그녀의 행보에 집중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인 듯 싶다. 꽁트 코미디언에서 이제는 어엿한 여성 MC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스스로를 '오프라 윈프리' 라고 칭한다. 오프라 윈프리가 되고 싶고, 오프라 윈프리처럼 성장하고 싶은 소망을 담은 표현이란다.
그녀는 현재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이라는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으며 '코미디언' 의 영역을 깨부수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에 '한낱' 순악질 여사였던 그녀가 진중하고 심각한 시사 프로그램을 맡는다는 사실에 손을 내저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여전히 행보는 남달랐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던졌던 "코미디언은 사람 아니냐?" 라는 그녀의 첫마디는 분명 김미화만의 '당찬 의지' 의 표현이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솔직하고 모른다고 하는 그녀의 시사 프로그램은 기존 엘리트만의 시사 프로그램은 질적으로 달랐다. 나 같은 학생이 무심코 들어도 이해할만한 그녀의 프로그램은 깊이가 있으면서도 거북스럽지 않다. 손석희처럼 모든 것을 통달한 '촌철살인' 은 없지만 김미화만의 '인간미' 가 살아 숨쉰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청취자가 일주일 동안 제 방송을 다 들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일주일에 삼일 듣는 분은 저 얘기가 뭐야, 할 수 있는데 청취자 입장에서 반복적으로 다시 이야기해야죠. 수능공부하는 학생이나 주부들이 우리 프로를 많이 들어요. 용어를 반복적으로 쉽게 설명하니까 시험 볼 때 이해하기가 쉬워서, ‘공부가 되는 프로그램’이라는 내용의 이메일이 많이 와요.
안다 치고 넘어가던 것들이 많잖아요, 대학교 나와서 또는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이런 것도 몰라, 하고요. 창피 안 당하려고 그냥 넘어가던 것들이 있어요. 어느 프로에서도 깨지 못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전문 용어를 써 버리는 것 말이죠.
전 아직까지 나서서 아는 체 하기에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어요. 시사 프로그램을 맡은 지 2년째인데 5~6년 이 프로를 이끌어 갈 수 있다면 전문가가 돼서 그 때쯤 되면 뭔가 방향을 바꿔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 수준이 사람들의 이해를 도우면서 나한테도 맞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사회활동가가 된 순악질 여사.
또한 그녀는 뛰어난 방송인인 동시에 열성적인 사회 활동가다. 7~8개가 넘는 단체의 홍보대사 겸 활동위원을 맡고 있는 그녀는 허울 뿐인 '홍보대사' 가 아니라 직접 거리로 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방송인이 나서야 되는 일이 있다. 그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미쳐서 돌진할 수 있어야 방송인이다." 라는 것이 그녀의 지론 중 하나다.
그녀는 방송의 위대함을 알고, 방송인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지도 안다. 성균관대 사회복지과를 늦깍이로 졸업할 정도로 사회복지에 관심을 쏟고 있는 김미화는 국민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면 충분히 방송인이 사회를 선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회에서 받은 것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미화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건 분명한 것 한가지는 김미화가 한국 방송에 하나의 '역할' 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실 김미화가 아니라 박미화였다." 라는 고백 하나로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으며 호주제 폐지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그녀였고, 남편과 이혼한 '이혼녀' 딱지를 깔끔하게 떼어 버리고 강건한 기상으로 방송을 압도했던 것도 그녀였다.
<사과나무> 에 나와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며 자신의 가족사를 아낌없이 드러냈던 것은 분명 김미화다운 파격이었다. 그녀가 그 때에 흘렸던 눈물을, 눈물 속에 담긴 절절함을 난 여태까지 소중히 간직한다. "왜 김미화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왜 김미화가 방송인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 에 대한 해답은 그 순간 그 눈물 속에 모두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단체연합 홍보대사라, 호주제 폐지 얘기하다가 저도 이런 일을 겪었는데, 어려움에 있는 분들 용기 잃지 마세요,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근데, “김미화, 나도 박미화였다” 이렇게 타이틀로 뽑혀서 언론에 나온 거예요. 기왕에 말 꺼낸 거, 내 가족이 조금 희생해서 많은 분이 용기를 얻는다면 뭐 괜찮은 거죠.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이놈의 지지배, 미친 놈의 지지배 창피해 죽겠어” 엄마가 그래서 문제지만. 그럼, 제가 “이제 와서 창피하면 뭐해, 한 번만 더 얘기할게” 그러면서 또 해요.어떤 일이든 부닥치면 그만이예요. 창피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코미디언인 순악질 여사.
김미화는 분명 이시대 가장 뛰어난 여성 MC이자 사회 활동가지만 그래도 여전히 최고의 '코미디언' 이다. 이제는 '개그계의 대모' 소리를 자연스럽게 듣는 그녀는 24년이 지난 시간 속에서 한국 코미디를 주도하고, 그 흐름을 바꾸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지금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개그콘서트> 가 김미화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
대학로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던 신인 개그맨들을 대거 기용해 김미화가 직접 KBS 와 담판을 짓고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출범시킨 <개그콘서트> 는 '앙콜 개그' 등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한국 코미디의 흐름을 바꿔 놓았고 지금까지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개그콘서트> 초반에 방송을 모르는 신인들의 중심을 잡아놓고 20시간이 넘는 아이디어 회의에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보였던 것도 바로 김미화였다.
이제는 공채 개그맨을 뽑고 그 가능성을 살리는데에 주력하고 있는 그녀는 "코미디계가 아무탈 없이 잘 됐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다. 예전 '7080 코미디' 를 되살리며 '그 때 그 사람들' 의 웃음에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후배가 조화되는, 능력있는 신예와 연륜있는 선배가 한 무대에 같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바로 그녀가 꿈꾸는 코미디다.
"코미디는 웃기는 것이다. 코미디는 분명 의미를 담아야 하지만 어려워선 안되니까. 웃기면 된다. 웃기는데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코미디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난 여태까지 그런 코미디를 꿈꿔왔고 하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가 되길 바라며.
나는 김미화가 반드시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 가 되길 바란다. 오프란 윈프리처럼 모범적이고, 언행이 일치하며, 깊은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방송으로 사회를 선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가 본, 내가 아는 김미화는 많은 부분에서 오프라 윈프리의 그것과 일치하는 듯 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3000만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방송에 내는 그 선함이, 거리로 나가 팻말을 들고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감싸안으려는 그 따뜻함이, 코미디언으로서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며 편견과 영역을 하나하나 깨부수는 그 용감함이 그녀의 가치를 더욱 빛나고 고귀하게 해 줄 것이다.
어머니의 재혼에 슬퍼했고, 가난에 허덕였고, 아이 한명을 낙태했고, 이혼을 했던....하지만 이 시대 가장 유명한 코미디언으로, 가장 뛰어난 방송인으로, 가장 열성적인 사회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 김미화. "시련은 있되 실패는 없다." 는 말은 그녀의 삶에 가장 적합한 말이 아닐런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방송을 할 수 있는 영원한 '방송인' 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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