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겸허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한나라당 검증청문회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서 최근 저의 재산 문제와 관련, 세간에 나도는 의혹들에 관해 솔직하게 국민 여러분께 해명하고, 허심탄회하게 이해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이 난마와 같이 얽힌 ‘네거티브 정국’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장래를 결정할 올 대통령 선거가 올바른 정책 및 자질 비교를 통해 정상적으로 치러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동안 온갖 설(說)과 의혹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가 일일이 해명하지 않은 것은, 모든 규명은 당 검증위원회에서 하자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해명에 앞서 제 재산 문제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국민 여러분께 논란과 실망을 끼쳐드린데 대해 죄송스러운 마음 그지 없습니다.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 판에 국민 여러분의 심사를 더욱 불편하게 해드린데 대해 깊은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살아온 인생>
저는 포항 빈민가 뒷골목에서 자랐습니다. 집이 너무 어려워 초등학교때부터 생업에 나서 엿, 아이스케키, 뻥튀기 장사를 했습니다. 대학 가서도 이태원 시장 쓰레기를 치우고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어 썼습니다.
그 지독한 ‘가난’은 지금의 저를 만든 인생의 스승이자 행운의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했기 때문에 게으를 수 없었고, 더 이상 물러날 데도 없었습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굴의 투지를 배웠고 그런 자세로 일생의 세파,난관과 부딪쳐 싸워나갔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저는 당시 종업원 98명의 중소기업인 현대 건설에 들어가 불철주야 일했습니다. 이를 어여쁘게 본 정주영 회장님의 배려로 나이 35세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습니다.‘우리나라 샐러리맨의 우상’이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갔습니다. 제가 몸담은 현대그룹도 1년에 몸집이 두 배로 커지는 초고속 성장을 했습니다. 전세계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뛰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하루를 25,26시간으로 늘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로 인해 가정도 변변히 돌보지 못하고 개인적 삶에도 충실하지 못했지만 회사는 크고 대한민국은 발전했습니다. 제가 26년의 직장생활을 마쳤을 때 현대그룹은 16만8000여명의 세계적 대기업으로 커 있었습니다.
지금도 힘들 때마다 저는 현장에서 뛰던 그 시절을 되돌아봅니다. 그때마다 제 가슴은 뜨거워지고 제 심장은 벅차오릅니다.
<재산 형성 과정>
이처럼 열심히 살다보니 대기업 최고경영자도 되고, 재산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 우리네 속담처럼 지금 어렵게 사는 분들에게 ‘나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잘될 수 있구나’라는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게 쏟아지고 있는 온갖 ‘네거티브’ 공격은 제가 살아온 인생과 노력을 오로지 재산 증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것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마녀사냥식 공격’에 대한 저의 감정에 관해서는 구태여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국민 여러분께는 재산 의혹과 관련, 전 과정을 소상히 알려드려 의문을 풀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 재산에 대한 세간의 의혹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시킬 수 있습니다. 첫째,“저 사람, 저 많은 돈을 어떻게 모았나”에 관한 것입니다. 둘째, “자기 형님과 처남을 앞세워 투기를 해 돈을 번 게 아니냐”라는 점입니다.
우선 제 재산 총액이 320억원을 넘는데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현대를 국내 최고기업으로 키우는데 일조했고, CEO를 15년이나 했습니다.
요즘 대기업 회사 CEO가 받는 연봉이나 수십~수백억원의 스톡 옵션(stock option)을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탈법-불법으로 재산을 모을 이유가 하등에 없었습니다.
제 재산은 모두 4건입니다. 서울 논현동 집, 서초동 상가 두 채, 양재동 빌딩 한 채입니다.
이 재산 대부분은 제가 1970-80년대 현대에 몸담았을 때 형성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연 10% 가까운 초고속 성장을 했고 현대그룹 사세도 급팽창했습니다.
정주영 회장께선 월급 외에도 특별 보너스나 격려금을 별도로 주시곤 했는데 그것들이 지금 제 재산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는데, 저는 그런 것을 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당시 현대는 건설회사라 부동산이 재산증식의 수단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정주영 회장은 회사에 공이 큰 임원에게 특별보너스 성격으로 회사에서 아파트나 주택을 주곤 했습니다.
지금 논현동 제 집도 그렇게 얻은 것입니다. 일종의 ‘스톡 옵션’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 매입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지금보다 훨씬 너그러워 일반적 이재(理財)수단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간혹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회사 간부들 중에서 개발차익을 얻기 위해 회사가 사들인 땅 주변 부동산을 사는 경우가 생깁니다. 당시 CEO인 제가 알면 저는 그 간부를 불러 즉시 땅을 되팔게 했습니다. 윗사람이 챙기면 조직에 영(令)이 서지 않고 주위로부터 신망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젊은 사장’인 제가 땅이나 사기 위해 돌아다녔다면 회사 조직이 제대로 돌아갔겠습니까? 주변에서 저를 가만 놔뒀겠습니까? 아니 무엇보다도 ‘호랑이 왕(王)회장’이 이를 묵인했겠습니까? 저는 1977년 현대건설 CE0가 된 후 1992년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현대그룹 10개사의 사장-회장 등 CEO로 일했습니다.
저는 그때 젊었습니다. 일할 시간도, 잠잘 시간도 모자라는데 노후를 걱정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할 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처남과 형님과의 관계>
제 재산과 관련, 두 번째 의혹은 형님과 처남 명의로 재산을 은닉해 놓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같은 의혹은 처남 김재정과 맏형 이상은씨가 함께 회사를 운영하면서 부동산 거래나 투자를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우선 이분들이 어떻게 함께 사업을 하게 됐는지 경위 설명부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손아래 처남 김재정은 제 처갓집의 1남3녀 중 막내입니다. 저도 3남2녀중 막내라 서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처남-매부간이 그렇지 않습니까.
처남은 성격이 활달해 친구도 많았습니다. 제가 현대건설 사장이 되기 1년 전인 1976년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해 1982년 물러나갈 때까지 한 식구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제 성격상 처남이라고 특별히 더 잘해주거나 봐준 것은 없었습니다.
처남은 퇴직 후 장인께서 설립한 세진개발의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원래 저의 처갓집은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장인 어른이 공직생활을 하시다 나오신 뒤 건설회사를 차리셨고, 이를 막내 재정군이 물려받은 셈입니다.
처남 재산에서 부동산이 많은 이유는 주사업이 건축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이 현대건설에 근무했던 경험과 연고를 살려 사업을 하다 보니 마치 매형인 제가 뒤에서 봐주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제 맏형 상은씨 역시 사업(전기∙설비)을 했습니다. 처남과 맏형은 나이가 16살 차이가 나지만 비슷한 업종에 오랫동안 같은 출입처 일을 하면서 가까이 지내게 됐습니다. 이 두 분은 성격도 비슷하고, 특히 처남은 맏형과 비슷한 연배의 친형을 여윈 탓에, 저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스 동업 관계>
1980년대 중반 당시 정부는 자동차 국산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으며 이에 따른 부품 국산화 계획도 진행중이었습니다. 저희 현대차도 국내서 부품을 조달할 업체들을 공모하였습니다. 현대그룹에선 당시 퇴직 임원들에게 협력회사에 투자하도록 권유했습니다. 당시 자동차 전망은 그렇게 밝지 않았습니다. 리스크 부담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 맏형이 거래선인 현대자동차와 접촉, 투자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저는 전문경영인 입장에서 제 일가친척이 관련되는 것이 걱정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세영 현대자동차회장과 정주영 그룹회장을 찾아뵙고 반대의사를 밝혔는데 그분들이 도리어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스는 1987년 일본 기술제공업체의 도움을 받아 설립됐습니다. 이때 맏형께서는 사돈이지만 평소 같은 협력업체 대표로 가깝게 지내온 처남과 동업을 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이 회사는 두 분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돼 왔습니다. 제 입장에선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만약 이 회사가 부품 문제나 노사분규로 문제를 일으켜 모기업인 현대에 어려움을 끼친다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후 형님 찾아가 “회사 운영에 차질 생기면 제 입장이 어려우니 최선을 다해주십쇼”라고 몇 번 당부 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뤄진 두 사람의 동업 관계가 제가 대선 예비 후보가 된 지금, “친인척을 내세운 위장경영을 통한 부정축재”로 매도되며 온갖 의혹과 비리의 상징물처럼 떠오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백번을 생각해 봐도 당시 맏형이 사업을 하게 된 데 대해 제가 부당한 노력을 기울인 적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당시 현대그룹 경영진도 아는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기업 경영은 매일 치열한 전쟁이고 전투입니다.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자는 시간 빼놓고 회사 경영에 전력투구하지 않으면 회사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경영 이외에 다른 곳에 단 한 시간도 한 눈 팔 수 없는 겁니다.
CEO가 위장회사들을 차려놓고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회사가 운영될 수 있습니까? 직장 다니거나 사업 하신 분들은 제 말에 동감을 하실 겁니다.
<나머지 여러 의혹들>
결론적으로 말해 저와 관련된 가차명 재산 은닉 의혹, 특혜분양 등 제 재산을 둘러싼 모든 의혹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 처남과 맏형의 동업 ▲저와 제 처남의 직장이 현대건설이었다는 점 ▲부동산 거래 등 세가지 요소로 압축됩니다.
이 세가지 문제가 서로 얽히고 �히면서 마치 모든 의혹의 중심에 제가 있는 양 오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즉 두 사람이 동업하다보니 그 뒤에 제가 있는 양 오해를 받게 된 것이며, 처남의 사회생활 시작이 현대건설이다보니 마치 제가 뒤에서 비호해준 것처럼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다음은 처남등과의 부동산거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소유한 부동산 중 친인척에게 팔아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 두 건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충북 옥천군 임야 37만여평(구입가 3000만원)의 경우 당시 현지 주민들이 마을회관을 짓기 위해 현대건설측이 사주기를 원했으나 그 땅이 비업무용 부동산이라 제가 대신 산 것입니다.
저는 이 땅을 처남이 1982년 현대건설을 나와 사업을 할 때 다소 싼 값(2500만원)에 팔았습니다. 지세가 험한 악산(惡山)이라 처남에게 팔아줄 것을 요청했는데 안팔려 처남이 산 것입니다. 또 서울 양재동 5층 건물은 1994년 처남과 맏형이 운영하는 대부기공(현 다스)이 매입을 원해 당시 시세(16억원)대로 받고 팔았습니다.
반면 처남 등이 1995년 포스코개발에 팔은 도곡동 땅은 전혀 저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 분들이 스스로 땅을 사고 판 것에 대해 제가 관여할 이유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대중정권인 1998년 검찰(대검 중앙수사부)과 세무당국이 철저히 조사도 했습니다. 김만제 당시 포철 회장도 저간의 사정을 압니다.
BBK 사건 의혹은 한마디로 그 대표인 김경준이란 인물을 제가 잘못보고 동업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 판단 착오의 대가도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이밖에 제가 서울시장으로 일할 때 저나 친인척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과 관련, 특혜 행정 시비 의혹 주장이 몇 건 나오고 있습니다만 있어서도 안 되며,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제가 재산도 많고, 또 대통령 꿈을 가지고 있는 입장인데 건물값 좀 올리겠다고 행정편법을 쓰겠습니까?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주변에서 그런 행동을 용납하겠습니까?
그런 자세로 어떻게 수많은 이해관계가 걸린 청계천 복원사업이나 대중교통 개혁 등을 제가 소신 있게 추진할 수 있었겠습니까?
<맺는 말>
참으로 험난한 네거티브 공세를 받으며 저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올바른 지도자의 길을 걷는데 도리어 좋은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란 고사성어가 요즘 많이 떠오릅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이 한 일이 우연히 함께 일어나, 다른 일과 관계된 것처럼 남의 의심을 사는구나라는 뜻이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고사도 생각납니다. 공연히 남에게 의심받을 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커서도 열심히 일하고 회사를 발전시키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제가 정계에 들어 온 이후, 또 지난 10년간 우리나라가 발전을 멈추고 후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래선 안되겠다, 그동안 기업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경제를 살리자, 그래서 국민과 나라를 살리자고 생각하면서 대통령 출마를 생각한 것입니다.
일가 친척간 정상적 거래나 동업이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앞으로 지도자의 길을 가는 입장에서 새로운 마음가짐과 각오로 나가겠습니다.
우선 검찰에 당부드립니다. 현재 저와 관련된 문제로 수사 중인 사건들에 대해서 공정하고 신속하게, 철저히 조사해 진실과 의혹을 규명해주십시오. 적당히 은폐하려하거나 어느 한쪽을 비호하려면 안됩니다. 국민적, 역사적 심판이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제가 잘못한 사실이 나온다면 당당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나 먼지 털어 안 나오는 사람 있나 식으로 수사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검찰이 과거 정치적 권력에 휘둘려온 검찰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공정한 수사를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현 집권세력에게 경고합니다. 스스로를 양심세력, 민주화세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야당의 유력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보기관을 동원하고 IT 시대 개인의 자료들을 불법유출해 이를 가공-왜곡-음해하는 흑색선전 자료들을 마구 퍼뜨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나서서 야당 후보신상과 정책을 비판하고, 정부기관들과 각료, 친여 언론매체들이 동원돼 함께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21세기 개명천지에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더구나 민주화를 했다고 자랑하는 정권에서 말입니다.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돌리려는 당신들의 행동은 분명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제 경쟁 후보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내심에서 할 말은 많지만 짤막한 고사성어로 대신하겠습니다.
‘상인지어 환시자상(傷人之語 還是自傷)’.
즉 남을 해치는 말이 도리어 자기를 상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공정하게, 그리고 원만하게 당 경선을 치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당 경선이 끝난 후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서로 포용하고 함께 힘을 합쳐 지난 10년 잃어버린 정권 창출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간의 사정이 어쨌든 국민 여러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드려 죄송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실망을 끼쳐드려 안타깝습니다. 과거 기준으로 볼때 제가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도덕적 기준이나 국민 정서상 떳떳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 인정합니다.
또 제 친인척들이 재산을 형성하는 데 지금의 국민적 감정에 맞게 행동하지 못한 부분도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면서 열심히 일했지만 아직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로 지내는 많은 우리 국민 여러분들의 마음 제가 깊이 헤아리고 노력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과거 저는 가난했지만 가난에 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는 여유가 있지만 부(富)에 짓눌리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가진 재산, 제가 죽을 때 무덤에 가져가겠습니까? 아닙니다.
자식에게 다 물려주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제 재산을 우리 사회를 위해, 진정 유익한 곳에 쓸 것입니다.
제가 재산이 있는데 집권 기간 중 돈을 탐을 내겠습니까?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서울시장직도 그랬듯이 대통령직도 봉사로 알고 일하겠습니다. 오로지 일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 열심히 해 우리 경제 살리고 10년내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는 그런 나라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이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베리가 쓴 ‘어린 왕자’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국민 여러분의 신뢰를 확인해 나가겠습니다. 여러분이 믿어주셔야만 제가 설 수 있고, 일할 수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제 진심을 밝혀드립니다.
포항 뒷골목에서 꾀죄죄하던 소년이 열심히 일해 대기업 총수도 됐고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거쳐 이제 국민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대통령 후보까지 됐습니다. 제 살아온 이력이 검증이요,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를 믿고 지지해주십시오.
그래서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새 역사,‘제2의 한강 기적’을 우리가 만들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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