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절대군주 세종
[북멘토]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세자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이 된 세종. 처음 왕이 아니었던 자가 왕이 되었지만, 세종이 다스리며 키워낸 조선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상 다시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태평성대였다. 이는 세종의 냉철한 성격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 꾸준한 학문에의 정진, 반상을 아우르는 인재의 등용에 기인한다.
이 책은 어린 시절의 세종부터 세종이 승하한 후에 변화한 조선까지, 세종을 둘러싼 모든 것을 다룬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성격부터 가족들, 신하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종조의 눈부신 업적을 살펴보며, 이런 위대한 업적이 이후 세대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까지 고찰한다. 우리는 결국 조선이라는 큰 틀을 만든 성군 세종, 그 자체가 조선임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종 이후의 조선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종의 리더십
흔히 세종대왕은 인자한 성격의 성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종에게 인내심이 있었을망정, 인자한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실록에는 철두철미하게 공부를 한 후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신하를 맘껏 휘두른 독선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또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세종은 대체로 스스로의 성정에 휘둘리지 않고 신하들을 대했다. 자신의 수족이 될 신료들을 고를 때에도 계급을 상관하지 않았고, 선택한 인재들을 꾸준히 교육시키는 것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조의 인재들은 완벽한 이들이 아니었다. 청렴결백의 대명사인 명재상 황희는 사실 비리혐의가 있었고, 조선 음악의 아버지인 박연은 돈을 밝혔다.
대쪽 같은 집현전 중진 변계량은 부인을 학대하기도 했으며,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고집 세고 꽉 막힌 사람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결함이 있을지언정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칠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세종이 성격이나 계급을 상관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전문가로서의 능력만을 최우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학식으로 적절히 억눌렀다. 이런 개성 강한 신료들의 우두머리였던 세종은 아랫사람들의 불평불만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학식을 지닌 군주였고, 이것은 평생을 통한 공부에서 얻은 것이다. 스스로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세종의 인재활용은 조선 초를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과 여러 신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종의 업적들을 다시 되짚어 보며, 인내심 강하고 때로는 독선적이기까지 했던 세종의 성격과 리더십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선량한 독재자가 가고 난 후
그러나 세종의 승하 후, 이러한 업적은 후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세종이 발굴하고, 열심히 가르친 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세종대왕의 태평성대 이후 바로 조선조 최고의 비극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이 살아 있을 당시는 보이지 않았던 문제점이 왕의 사후 서서히 표출되었다. 세종의 말년부터 미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살펴본다. 그 궁금증을 파헤쳐보는 동시에, 인자한 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교활하고 독선적으로 신하들을 휘두른 또 다른 면모도 함께 살펴본다.
[한국양서보급중앙회 북멘토&북코치클럽]
한국독서문화경영연구원(CEO독서문화경영포럼)
[북멘토]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세자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이 된 세종. 처음 왕이 아니었던 자가 왕이 되었지만, 세종이 다스리며 키워낸 조선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상 다시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태평성대였다. 이는 세종의 냉철한 성격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 꾸준한 학문에의 정진, 반상을 아우르는 인재의 등용에 기인한다.
이 책은 어린 시절의 세종부터 세종이 승하한 후에 변화한 조선까지, 세종을 둘러싼 모든 것을 다룬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성격부터 가족들, 신하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종조의 눈부신 업적을 살펴보며, 이런 위대한 업적이 이후 세대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까지 고찰한다. 우리는 결국 조선이라는 큰 틀을 만든 성군 세종, 그 자체가 조선임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종 이후의 조선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종의 리더십
흔히 세종대왕은 인자한 성격의 성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종에게 인내심이 있었을망정, 인자한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실록에는 철두철미하게 공부를 한 후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신하를 맘껏 휘두른 독선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또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세종은 대체로 스스로의 성정에 휘둘리지 않고 신하들을 대했다. 자신의 수족이 될 신료들을 고를 때에도 계급을 상관하지 않았고, 선택한 인재들을 꾸준히 교육시키는 것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조의 인재들은 완벽한 이들이 아니었다. 청렴결백의 대명사인 명재상 황희는 사실 비리혐의가 있었고, 조선 음악의 아버지인 박연은 돈을 밝혔다.
대쪽 같은 집현전 중진 변계량은 부인을 학대하기도 했으며,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고집 세고 꽉 막힌 사람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결함이 있을지언정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칠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세종이 성격이나 계급을 상관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전문가로서의 능력만을 최우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학식으로 적절히 억눌렀다. 이런 개성 강한 신료들의 우두머리였던 세종은 아랫사람들의 불평불만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학식을 지닌 군주였고, 이것은 평생을 통한 공부에서 얻은 것이다. 스스로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세종의 인재활용은 조선 초를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과 여러 신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종의 업적들을 다시 되짚어 보며, 인내심 강하고 때로는 독선적이기까지 했던 세종의 성격과 리더십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선량한 독재자가 가고 난 후
그러나 세종의 승하 후, 이러한 업적은 후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세종이 발굴하고, 열심히 가르친 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세종대왕의 태평성대 이후 바로 조선조 최고의 비극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이 살아 있을 당시는 보이지 않았던 문제점이 왕의 사후 서서히 표출되었다. 세종의 말년부터 미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살펴본다. 그 궁금증을 파헤쳐보는 동시에, 인자한 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교활하고 독선적으로 신하들을 휘두른 또 다른 면모도 함께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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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서문화경영연구원(CEO독서문화경영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