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KBS
1. 百濟到來之王(백제도래지왕)이라 불렸던 근초고왕을 아십니까?
백두산에 올라간 이들은 말한다. 화가 난다고... 민족의 영산(靈山)이라 하는 백두산의 반이 뚝- 잘라져 장백산이라 불리며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다.
중국의 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어제, 오늘 일어난 일이 아니다. 동북공정은 승자의 입장에서 철저히 왜곡되어 기록된 역사이고, 적어도 우리 민족은 이 왜곡의 횡포에 천오백 년 가까이 시달려 왔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우리의 역사를 왜곡해 왔던 것일까? 지린(吉林)성 통거우(通溝)에 있는 광개토왕릉비 때문일까?
'백제에서 왕이 왔다(百濟到來之王)' 라 불리며 중국의 기록에 남아 있는 그 王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왕은 광개토대왕이 아닌, 적어도 광개토보다 약 60여년 앞서, 중국의 요서지방을 경락하고 지배했던 인물은 바로 大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었다.
2. 환서대백제(環西大百濟)를 들어본 일이 있는가?
중국의 요서지방을 수중에 넣고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西백제를 건설했으며, 50여 개국으로 할거 되어있던 마한의 군소왕국을 통일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뤘으며 아직까지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야만의 시대였던 왜국을 경제, 문화의 한 체제 속에 편입시켜 야마토(大和) 시대를 연 근초고왕.
요서-한반도-일본 열도를 잇는 거대한 고리인 환서의 대제국을 완성하고, 멀리 베트남, 인도, 대만과 교역했던 백제의 왕이 있었다고 하면 많은 이들은 마치 환단고기(桓檀古記)라도 보는 듯, 향토사학자들의 야사나 위서를 듣는 듯이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위대한 환서대제국은 편협한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에 편승하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대로 사실인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3. 우리의 근원 부여를 아십니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다. 이말 대로라면 우리 한민족은 죽음을 앞두면 북쪽으로 머리를 둬야한다. 북쪽, 그곳은 바로 우리들의 始原인 부여(夫餘)가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요동이니, 만주, 간도... 이런 지명을 듣게 되면 가슴이 뛰고 뜨거워졌던가? 왜 우리는 그토록 고구려를 그리워하며 자랑스러워했는가? 고려(高麗)는 왜 국운이 기울도록 요동정벌을 꿈꿨으며, 조선의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 청에서 볼모 8년의 세월동안 무엇을 보았기에 北伐을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인가?
그곳에 바로, 우리 선조들의 본향이자 우리 역사의 시발점인 부여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 민족을 한민족이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민족은 부여에 근원을 둔 예족(濊族)과 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 흩어져 살던 한족(韓族)의 결합체이다. 그 예로 한족의 통일을 이뤄 한민족의 원형질을 회복한 이가 바로 불세출의 군주 근초고인 것이다.
백제인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시원인 부여를 잊은 일이 없었다.
부여의 시조인 동명성왕을 모시며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동명성왕제를 지내면서 언제고 우리들의 고향인 부여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면서 그곳을 남부여(南夫餘)라 부르며 언제고 돌아갈 요동의 그 땅, 부여를 잊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4. 한 영웅의 정신은 또 다른 영웅의 삶으로 승계된다.
우리 고대사의 걸출한 영웅이라면 환서대백제제국을 이룬 백제의 '근초고왕'.
요동을 회복한 고구려의 ‘광개토왕’, 삼국을 통일해 오늘날 한민족의 원형을 이룬 신라의 태종 ‘무열왕’ 이 세 명의 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하나의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없었던 고대사의 시절, 백제-신라-고구려는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들처럼 피 흘리고 싸웠으나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삼국 그 어느 한 나라도 더하거나 덜할 것 없는 우리의 찬란한 역사일 것이다.
적국의 왕에게 무엇을 배울까 싶겠지만, 요동을 갈망하고 대 제국을 건설한 근초고왕의 정신은 광개토왕에게로, 삼한일통을 꿈꾸던 근초고의 정신은 또한 태종 무열왕에게로 이어졌음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 세분의 정신이 고려로 조선의 효종에게로 이어지지 않았겠는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민족이 분열되어 북이 막혀 있고, 국제정세 속에서 어쩌면 두 번 다시 요동을 회복할 길 없는 이 시대에 ‘근초고왕’이 이룬 위대한 업적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웅비(雄飛)의 기상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온조 _김주영
동명왕 고주몽의 셋째 아들로 백제의 시조 온조왕(재위 B.C.18~A.D.27).
비류왕(구태) _윤승원
근초고의 아버지이자 백제 11대왕.
흑강공 사훌에 의해 철저히 백제의 왕이 되기 위해 길러졌다.
자신들의 견제 세력인 해씨 집안의 여인과 정략결혼을 하고 왕위 되어서는 가신인 진씨 집안의 여인을 맞아 혼인한다.
비류왕에게는 필생의 목표가 두 가지 있다.
첫째, 강력한 군주가 되어 백제를 반석을 올리는 일.
둘째, 온조왕계 적통의 적장자 상속을 확고히 해 더 이상 왕권 계승을 둘러싸고 백제의 내분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
과연 비류왕의 유업은 근초고에게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계왕(부여준) _한진희
고이왕계의 영수로, 제10대 분서왕의 적장이나 흑강공 사훌의 치밀한 전략과 진씨 가문의 내응에 의해, 비류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아버지 분서왕이 대방의 자객에게 암살당한 일에 흑강공 사훌이 개입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어 흑강공과 비류에 대한 원한이 깊다.
치밀하고 냉철한 지략가이며, 인내심이 남다르다.
삼대 백년에 걸쳐서라도 맺은 원한은 갚아야 하며, 당대에 못 이루고 그 역시 삼대 백년에 걸치더라도 원대한 야망은 이뤄야 한다고 믿는다.
사내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자. 하늘은 세 번의 기회를 준다는 말처럼, 드디어 부여준에게 기회가 온다.
부여준은 비류왕의 후계로 자신이 12대 어라하의 위를 승계하고, 자신의 후계로는 해비의 장자 여찬을 세우기로 한다.
그러나, 부여준은 계왕으로 12대 어라하로 등극은 하지만, 근초고를 죽이지도 못하고 온조왕계의 반발을 완전히 잠재우지도 못한 채 불안한 재위를 시작한다.
근초고왕(여구) _감우성
정복의 군주가 가는 길은 피의 길이다. 적국의 피, 내 백성의 피, 때때로 혈육의 피까지.. 넘치는 그 길을 걸으며 나는 항시 내게 묻는다.
大백제 건설이라는 나의 대의는 사욕은 아닌가? 혈육까지 베어야 했던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비류왕과 제2왕후 진비 사이에서 태어난 제4왕자.
아명은 여구. 백제의 걸출한 군주였던 제5대 '초고' 왕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근초고(近肖古)로 개명한다.
영웅의 기개를 타고났으나, 그런 왕재를 탐탁지 않게 여긴 아버지 비류왕에게 외면당하고 홀로 던져진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왕자라면 누구나 한번 쯤 왕위에 오르는 것을 꿈꿔본다.
근초고 역시 한두 번쯤, 자신이 왕이 되면 어떤 백제를 만들지 몽상해 본 일은 있었다. 하지만, 사대의 일이 있고나서, 근초고는 왕궁에서 쫓겨나 할아버지 흑강공 사훌의 저택으로 가게 되고 오직 장사꾼이 되는 교육만을 받는다. 이일로 근초고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어머니 진비와도 떨어져 홀로 지내야 했고, 누구보다 존경했던 아버지 비류왕에게 비토를 당해야했기 때문이다. 왕궁을 떠난 근초고는 언젠가 흑강공의 가업을 승계해 '백제 말고도 요동에서 요서, 중원까지. 그 너머 바다가 닿는 곳이면 온 세상 끝까지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살겠다.'라는 꿈을 갖게 된다.
하지만, 영웅은 시대와 운명이 만드는 법.
근초고의 운명 역시 그를 자유로운 상인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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