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가 누구인가? 국내 정보기술(IT) 시장이 꿈틀대던 1995년, 불모지나 다름없던 소프트웨어(SW) 시장을 개척한 인물 아닌가. 그는 이후 10년간 안랩을 지키며 무명 벤처기업을 한국 토종 SW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단지 ‘의사 출신 벤처기업가’라는 배경을 지닌 안철수 개인의 ‘성공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순간에 무대 뒤로 사라진 ‘스타’가 즐비한 벤처업계에서 안랩은 기본과 원칙, 기업윤리와 투명경영을 충실히 지키고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안철수는 미국 스탠포드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서울 여의도 CCMM빌딩 10층 이사회 의장실은 평상시 회의실로 쓰이지만, 안랩에는 그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안철수는 자신이 본 책 가운데 유익한 것은 직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사내 경영전략실에 미니 도서관을 마련하고 비치했다. 크다고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초미니 도서관이지만 거기에 담긴 철학의 의미는 크다. 필독서는 직장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안랩 가치와 역사, 변화 관리 측면, 조직의 영속적인 성장, 세계관 탐구 5가지 항목에 걸쳐 모두 15권이다. 모든 직원에게 도움이 되는 공통적 내용을 다룬 기본 서적 7권과 직급이나 부서에 도움이 되는 분야별 서적 8권으로 나뉜다. 책은 경영전략실 직원이 관리하는데 대여는 1회에 1권씩 1주일간 할 수 있으며, 한 차례에 한해 연장할 수 있다.
기본 필독서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안랩 핵심가치의 모태가 된 짐 콜린스의『Built to Last』란 책이다. 안랩은 이 책이 핵심가치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줬다는 점에서 필독서 0순위로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짐 콜린스 등, 김영사)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에서 공동저자인 짐 콜린스와 제리 포라스는 ‘불멸하는 성공기업의 조건’을 화두로 꺼낸다.
이 회사 황미경 커뮤니케이션팀 과장은 “안랩이 구심점을 잃었느냐.”라는 물음에 한마디로 “안랩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1996년 4월 안랩이 첫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13번째 식구로 입사했다. 사내에서 안철수의 심중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멤버 가운데 한명으로 꼽힌다. 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답은 바로 안랩의 독서경영에서 찾을 수 있다.
안랩은 독특한 인사 시스템으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바로 핵심가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 틀로서 승진시험 때 독서를 반영하는 내용이다. 직원들이 회사 핵심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충분히 인지하고 활용토록 하기 위해 필독서를 선정했다. 그리고 승진 면접 때 핵심가치와 비전을 실제 업무에 적용했는지를 평가한다. 이는 인사관리제도에 있어 대상자가 스스로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지, 아울러 다른 사람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인지를 평가해 고과와 연봉에 반영해야 한다는 안철수의 판단에서 비롯됐다.
승진 대상자는 본인 직급에 맞는 책 2권을 읽은 뒤 권마다 A4 용지 2장 분량의 독후감을 제출해야 한다. 독후감은 단지 책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 책 핵심 내용과 자기 업무 연관성을 비교해 적용한 뒤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한다. 이어지는 면접에서는 독후감에 쓰인 내용을 토대로 심층적인 질의와 응답이 오간다. 안철수를 포함한 평가자들은 이를 토대로 평가시트(sheet)에 각각의 항목을 체크했다.
필독서를 정하고 이에 따라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을 평가해 고과에 적용하는 시스템은 2005년 말까지 계속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안랩 내부의 ‘책 읽는 문화’가 확고하게 자리 잡아 회사가 독서를 강요하지 않더라도 직원들 스스로 책을 통해 자기 업무를 향상시키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에서다.
기업 최고경영자는 회사 안에 웬만한 규모의 도서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더 욕심을 내 도서관이 전통적인 ‘자료 저장소’(Archive) 개념에서 벗어나 직원들의 문화공간이 되고 의사소통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수많은 양서가 한 줄로 나란히 꽂힌 ‘오프라인 도서관’은 겉으로나마 상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국내 최대 보안업체라지만 안랩은 큰 기업이 아니다. 2005년 매출은 동갑내기인 다음커뮤니케이션 4374억원에 견줘 10분의 1(402억원)도 안 된다.
안랩에는 ‘그럴싸한’ 도서관이 없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서울 여의도 CCMM빌딩 6층과 10층 일부를 임대해 사무공간으로 쓰다보니 오프라인 도서관을 만들 공간도 나오지 않는다.
이를 대신하는 게 있다. 바로 안랩이 인터넷 상에 구축한 도서관리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에는 안랩이 보유한 책 목록과 간단한 내용, 대출 여부, 대여자, 그리고 직원들이 책을 읽고 난 뒤 소감까지 올려져 있다. 회사가 지원해 구입한 책을 직원 개인이 보관하되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지식의 ‘흐름’(Flow)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2005년에 만들어졌다. 직원 여러 명이 똑같은 책을 사는 낭비를 줄이자는 점도 고려됐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직원은 올려진 서평을 참고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많이 찾은 책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안랩의 도서구입비 지원은 1995년 회사 설립과 동시에 이뤄졌다. 한 달에 책 1~2권 정도를 살 수 있는 액수다. 한글을 깨우친 뒤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본 ‘활자광’이라는 안철수가 있었기에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장인은 항상 배움의 욕구를 느끼면서도 바쁜 업무에 묻혀 독서와 공부 같은 자기계발은 늘 뒷전이기 마련이다. 안랩은 독서 지원과 별도로 이런 직원들 욕구를 충족해 주기 위해 2005년 8월부터 ‘아싸’(ASSA;AhnLab Self-Service Area)라는 독창적인 복지제도를 두고 있다. 회사 측은 직원들에게 직급에 맞춰 일정한 포인트(연 40만~100만 원)가 충전된 복지카드를 지급한다. 직원들은 이 카드를 활용해 미리 설계된 다양한 복지서비스 중에서 본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항목에 사용한다. 선택은 자율 판단과 책임에 의해 이뤄진다. 구체적으로 아싸 설계 포인트는 생활안정(주택자금대출·단체보험·건강관리), 자기계발(문화생활·교육학습), 가정친화(가족여행·레저생활·자녀보육) 등을 포함하고 있다. 개인별로 필요와 기호에 따라 최적의 서비스를 입맛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직원들이 ‘자기계발’에 실제로 쓸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2005년 가을 안랩이 직원 219명에게 복지카드를 내주며 받은 설문 결과를 보면 의구심은 금세 풀린다.
“복지카드를 가장 사용하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학원, 도서구입 등 자기계발 관련’이 84명(38.4%)로 가장 많았고, ‘헬스장, 건강진단 등 건강관리 관련’이 56명(25.6%)으로 뒤를 이었다. 안랩 직원들의 자기계발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랩 조직 내에 학습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랩은 이 밖에도 2005년 10월부터 직원들이 출장비나 급여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매달 200만~300만 원어치 책을 구입, 오지 학생들에게 전하고 있다.
“안랩 직원들은 학습과 자기계발 욕구가 굉장히 강하다. 2001년에 외부 컨설팅업체에 의뢰해 인력개발관리에 대한 조언을 얻은 적이 있다. 당시 안랩 직원들은 물질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성향을 보였다. 안철수 의장 또한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안랩 스쿨’이 만들어 진 것도 그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황미경 커뮤니케이션팀 과장의 말이다. ‘안랩 스쿨’(Ahnlab School)로 불리는 직원교육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MS)의 교육 프로그램인 ‘유니버시티’(University)’를 모델로 했다. 복지 차원에서 직원들의 독서나 교육비를 지원해 주는 수준에서 벗어나 아예 직원들이 정보보안과 같은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전사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안랩은 격주로 토요 휴무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일을 하는 토요일 오전에 안랩 스쿨이 열린다. 한 번은 사내 전문가들이 강의 자료를 직접 준비해 발표하는 정보보안 강의를, 또 한 번은 외부 유명 강사를 초청한 교양 강의를 실시한다. 강의를 들은 사원에게는 그 횟수만큼 도서상품권을 지급해 자기계발에 재투자하게 한다.
지금까지 초청된 외부 강사는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 방열 전 국가대표 농구 감독이자 경원대 교수, 김경섭 한국리더십센터 대표 등이다.
안랩의 독서경영은 ‘10년, 그 이상의 핵심가치’를 구체화하는 유효한 수단이다. 복지제도인 ‘아싸’나 교육 프로그램인 ‘안랩 스쿨’, ‘전 사원 교육’, 그리고 온라인 ‘독서관리시스템’ 등은 독서를 포함해 끊임없이 직원들의 자기계발을 자극하는 장치다. 안랩은 직원에게 회사의 핵심가치를 이해시키기 위해 필독서를 지정해 읽도록 하고 독후감을 내도록 했다. 단순히 직원들 소양을 높이고 안목을 높이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경영을 위한 독서라는 점에서 다른 기업에서 이뤄지는 독서와 크게 다르다. 특히 독후감을 작성하면서 업무 연관성과 개선 방안을 도출해야만 승진할 수 있는 한 점도 눈에 띈다. 이 인사시스템은 독서가 회사 문화로 자리를 잡으면서 2005년을 끝으로 중단됐다. 독서경영은 직원들이 스스로 책 읽는 문화를 만들어 경험의 폭을 넓히고 지식과 기술을 쌓고, 토론 등을 통해 조직 차원에서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업 가치와 생산성을 높여가는 과정을 모두 아우르는 경영방식이다. 안랩의 경우 자발적인 독서문화는 확실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얻은 지식을 공유하고 전파하는 과정이 다소 부족하다. 구성원의 수준, 업무특성, 조직문화를 고려한 독서모임이 안정적으로 조직화하지 않은 점도 흠이다. 독서지식을 생산, 축척, 공유, 전파하는 과정의 관리 주체도 명확치 않다. 그렇더라도 핵심가치라는 명확한 목표를 두고 독서를 통해 구성원을 핵심가치의 ‘실현 주체’로 거듭나게 하려는 안랩 특유의 독서경영은 다른 기업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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