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채집이 공부의 반입니다”
연구실에 책 2만권·녹음테이프 2천개·사진 20만장
자료 발견하면 당장 출력 항복별 직접 제본
아이디어 메모는 입력하고 원본은 메모함에
다작이라고요? 물밑작업 모르고 하는 소리죠
한국의 글쟁이들/⑧ 민족문화 저술가 주강현씨
창조는 자료에서 나온다. 자료 자체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지만, 자료가 쌓이고 엮여 발효가 되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글이 익는다. 수없이 자료를 모으고, 그 속에 담긴 공통의 씨앗을 골라내 새 싹을 틔우는 사람, 자료들을 잇는 생각의 고리를 찾는 사람. 저술가는 그런 사람이다.
민속학자 주강현(51)씨는 그런 점에서 가장 ‘아키비스트(기록관리전문가)’적인 저술가라고 할 수 있다. 주씨는 자신이 관심갖는 분야에 관한 한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또 모은다. 자료란 쌓이면서 생명력을 갖는 법. 당시에 한번 쓰고 버려지던 것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자료는 진정 자료가 된다. 주씨는 그렇게 자료에서 책을 뽑아내는 저술가다. 그 자신도 스스로 아키비스트란 인식이 강하다.
지난 1995년 전통 미륵사상을 다룬 책 <마을로 간 미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주씨는 그 해 <한겨레>에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란 시리즈를 1년 동안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린다. 이듬해 이 시리즈를 묶어 나온 같은 이름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팔리며 판매부수 30만부를 넘겼다. 이후 주씨는 <조기에 대한 명상>(1998) <왼손과 오른손>(2002)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2002) 등 전통문화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저작들을 이어 펴냈다. 2003, 4년 동안 잠시 책이 뜸하나 싶더니 지난해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올해에는 <독살><두레><관해기1·2·3> 등 무려 5권의 책을 펴내며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펼지고 있다.
주씨의 이런 왕성한 생산력이 바로 자료에서 나온다. “생각해보세요, 신문에 전면으로 1년을 연재하려면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불가능한거죠. 사람들은 제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로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오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왔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최근 다시 활발하게 책을 내는 것 보고 일부에서는 ‘다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언제나 학술분야 책을 쓰고 자료를 모으는 기본작업을 물밑에서 계속 해온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씨의 출세작은 1996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지만, 첫 책은 1987년 <민족과 굿>(공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이전에 쓴 책만 10여권으로 학술서와 대중서를 꾸준히 내왔다. 그리고 <우리문화~>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3~4권을 써 저서가 40여권을 넘는다.
실제 주씨의 연구실인 일산 ‘정발학연’은 자료실 수준을 넘어 개인이 만들어낸 도서관에 가깝다. 책 2만여권, 녹음테이프 2000여개, 사진 20만장이 한치의 틈을 용납하지 않고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곳에는 집필용 컴퓨터말고 사진용 컴퓨터가 따로 있다. 혹시 바이러스 때문에 자료가 날아갈 수 있어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고 사진만 보관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본기. 주씨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보면 당장 필요가 없어도 그 자리에서 출력한다. “나중에 언제 다시 검색해서 찾아보겠습니까. 봐서 쓸만하다 싶으면 그 때 뽑는 게 더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이런 출력지들, 각종 다른 자료를 항목별로, 또는 시기별로 모아서 제본한다. 메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입력하고, 원본은 따로 메모함에 보관한다.
출장이나 여행길에는 반드시 빈 바인더나 클리어파일을 가지고 간다. 현지에서 거저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관광안내서, 교통시간표, 홍보용 전단, 어촌계 서류 따위-를 모조리 집어넣는다. 여기에 여행에서 적은 메모까지 넣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료철 1권이 새로 생긴다.
올해만 5권…저서 무려 40여권
주씨의 이런 자료정리는 출판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주씨 책을 다뤄본 편집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주씨의 강점은 3가지. 어떤 것을 책으로 써야할지 아는 기획력, 답사와 취재 열정, 그리고 방대한 자료다. 특히 자료에서 사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책에 들어가는 시각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 사진을 단순하게 책에 집어넣는 컷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 자체가 중요한 자료라는 점을 인식해서 오래전부터 중시해왔습니다. 민속학의 특성상 그 순간 찍어놓지 않으면 사라지거든요. 이미 제가 찍은 뒤 사라진 것들이 허다합니다.”
주씨는 “자료가 공부의 반”이라고 말한다. 기본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모으는 과정 자체가 연구와 저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일반자료가 진정 자신만의 자료로 변한다는 게 주씨의 지론이다. 또한 자료는 ‘아이디어의 소산’이라고 강조한다. 연구하고 쓸 거리가 많다보니 모을 것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주씨가 모으고 있는 자료에는 80년대 민중집회·연희 등의 자료도 있다. 당시 ‘대동제’ 행사 진행 및 준비자료들, 팸플릿, 심지어 기획회의록 등을 보관중이다. 앞으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그때부터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이런 자료의 힘은 주씨 저술의 핵심이자 강점이지만, 반대로 문체나 구성면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료를 풍성하게 다루다보니 내용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주며, 산만하다는 평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출판시장에서 주씨의 자리는 확고해보인다. 민속문화란 분야에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글쟁이는 주씨가 유일하다. 이는 주씨 개인에겐 아픔을 겪은 대가이기도 하다. 주씨는 80년대 초반부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촌 문화와 해양문화를 취재하고 주민을 인터뷰해 녹음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뒤 저술가로 이름을 알렸고 책으로는 성공했지만, 교수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주씨는 “교수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각오로 저술활동에 더욱 매달려왔고, 자신이 교수들보다 민속학을 알리는 데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바다’ 화두로 세계 항구 답사중
최근 몇년새 주씨는 ‘바다’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조기라는 물고기 한 마리로 서해안을 조망한 책 <조기에 관한 명상>으로 시작한 바다 연구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거쳐 올해 나온 <관해기>로 기본틀을 갖췄다. ‘바다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관해기>는 앞으로 주씨가 연구하고 글 쓸 것들의 단초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주씨가 바다를 자신의 분야로 미리 잡은 것은 오랜 관심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블루오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주씨가 매달리는 일은 아시아 주요 나라의 항구 답사를 통해 제국주의사와 해양교류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푸념하면서도 주씨는 매달 어김없이 해외 현장을 찾아간다. 조만간 그 결과가 또 다른 책으로 선보일 것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자료 발견하면 당장 출력 항복별 직접 제본
아이디어 메모는 입력하고 원본은 메모함에
다작이라고요? 물밑작업 모르고 하는 소리죠
한국의 글쟁이들/⑧ 민족문화 저술가 주강현씨
창조는 자료에서 나온다. 자료 자체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지만, 자료가 쌓이고 엮여 발효가 되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글이 익는다. 수없이 자료를 모으고, 그 속에 담긴 공통의 씨앗을 골라내 새 싹을 틔우는 사람, 자료들을 잇는 생각의 고리를 찾는 사람. 저술가는 그런 사람이다.
민속학자 주강현(51)씨는 그런 점에서 가장 ‘아키비스트(기록관리전문가)’적인 저술가라고 할 수 있다. 주씨는 자신이 관심갖는 분야에 관한 한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또 모은다. 자료란 쌓이면서 생명력을 갖는 법. 당시에 한번 쓰고 버려지던 것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자료는 진정 자료가 된다. 주씨는 그렇게 자료에서 책을 뽑아내는 저술가다. 그 자신도 스스로 아키비스트란 인식이 강하다.
지난 1995년 전통 미륵사상을 다룬 책 <마을로 간 미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주씨는 그 해 <한겨레>에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란 시리즈를 1년 동안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린다. 이듬해 이 시리즈를 묶어 나온 같은 이름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팔리며 판매부수 30만부를 넘겼다. 이후 주씨는 <조기에 대한 명상>(1998) <왼손과 오른손>(2002)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2002) 등 전통문화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저작들을 이어 펴냈다. 2003, 4년 동안 잠시 책이 뜸하나 싶더니 지난해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올해에는 <독살><두레><관해기1·2·3> 등 무려 5권의 책을 펴내며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펼지고 있다.
주씨의 이런 왕성한 생산력이 바로 자료에서 나온다. “생각해보세요, 신문에 전면으로 1년을 연재하려면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불가능한거죠. 사람들은 제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로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오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왔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최근 다시 활발하게 책을 내는 것 보고 일부에서는 ‘다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언제나 학술분야 책을 쓰고 자료를 모으는 기본작업을 물밑에서 계속 해온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씨의 출세작은 1996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지만, 첫 책은 1987년 <민족과 굿>(공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이전에 쓴 책만 10여권으로 학술서와 대중서를 꾸준히 내왔다. 그리고 <우리문화~>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3~4권을 써 저서가 40여권을 넘는다.
실제 주씨의 연구실인 일산 ‘정발학연’은 자료실 수준을 넘어 개인이 만들어낸 도서관에 가깝다. 책 2만여권, 녹음테이프 2000여개, 사진 20만장이 한치의 틈을 용납하지 않고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곳에는 집필용 컴퓨터말고 사진용 컴퓨터가 따로 있다. 혹시 바이러스 때문에 자료가 날아갈 수 있어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고 사진만 보관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본기. 주씨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보면 당장 필요가 없어도 그 자리에서 출력한다. “나중에 언제 다시 검색해서 찾아보겠습니까. 봐서 쓸만하다 싶으면 그 때 뽑는 게 더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이런 출력지들, 각종 다른 자료를 항목별로, 또는 시기별로 모아서 제본한다. 메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입력하고, 원본은 따로 메모함에 보관한다.
출장이나 여행길에는 반드시 빈 바인더나 클리어파일을 가지고 간다. 현지에서 거저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관광안내서, 교통시간표, 홍보용 전단, 어촌계 서류 따위-를 모조리 집어넣는다. 여기에 여행에서 적은 메모까지 넣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료철 1권이 새로 생긴다.
올해만 5권…저서 무려 40여권
주씨의 이런 자료정리는 출판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주씨 책을 다뤄본 편집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주씨의 강점은 3가지. 어떤 것을 책으로 써야할지 아는 기획력, 답사와 취재 열정, 그리고 방대한 자료다. 특히 자료에서 사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책에 들어가는 시각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 사진을 단순하게 책에 집어넣는 컷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 자체가 중요한 자료라는 점을 인식해서 오래전부터 중시해왔습니다. 민속학의 특성상 그 순간 찍어놓지 않으면 사라지거든요. 이미 제가 찍은 뒤 사라진 것들이 허다합니다.”
주씨는 “자료가 공부의 반”이라고 말한다. 기본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모으는 과정 자체가 연구와 저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일반자료가 진정 자신만의 자료로 변한다는 게 주씨의 지론이다. 또한 자료는 ‘아이디어의 소산’이라고 강조한다. 연구하고 쓸 거리가 많다보니 모을 것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주씨가 모으고 있는 자료에는 80년대 민중집회·연희 등의 자료도 있다. 당시 ‘대동제’ 행사 진행 및 준비자료들, 팸플릿, 심지어 기획회의록 등을 보관중이다. 앞으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그때부터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이런 자료의 힘은 주씨 저술의 핵심이자 강점이지만, 반대로 문체나 구성면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료를 풍성하게 다루다보니 내용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주며, 산만하다는 평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출판시장에서 주씨의 자리는 확고해보인다. 민속문화란 분야에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글쟁이는 주씨가 유일하다. 이는 주씨 개인에겐 아픔을 겪은 대가이기도 하다. 주씨는 80년대 초반부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촌 문화와 해양문화를 취재하고 주민을 인터뷰해 녹음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뒤 저술가로 이름을 알렸고 책으로는 성공했지만, 교수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주씨는 “교수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각오로 저술활동에 더욱 매달려왔고, 자신이 교수들보다 민속학을 알리는 데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바다’ 화두로 세계 항구 답사중
최근 몇년새 주씨는 ‘바다’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조기라는 물고기 한 마리로 서해안을 조망한 책 <조기에 관한 명상>으로 시작한 바다 연구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거쳐 올해 나온 <관해기>로 기본틀을 갖췄다. ‘바다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관해기>는 앞으로 주씨가 연구하고 글 쓸 것들의 단초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주씨가 바다를 자신의 분야로 미리 잡은 것은 오랜 관심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블루오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주씨가 매달리는 일은 아시아 주요 나라의 항구 답사를 통해 제국주의사와 해양교류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푸념하면서도 주씨는 매달 어김없이 해외 현장을 찾아간다. 조만간 그 결과가 또 다른 책으로 선보일 것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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