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도서

개혁주의 복음에 편견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북코치 2007. 8. 4. 11:41
[북멘토] 우리가 여지껏 알고 있는 기독교에 복음에 대해서 깊이있게 다룬책이 출판되었다. 세상은 원한다, 교회가 희망을 주기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와 이 땅을 구원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기대를 의혹과 절망으로 되돌려주기 일쑤다. 그러고는 사람보고 교회 다니지 말고 하나님 보고 다니라는 무책임한 말들을 쏟아낸다.

  이 책은 교회가 줄 수 있는 희망이 어떤 것인지, 진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예수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신학적 철학적 전문가들의 논리 정연한 이론이 아니라, 힙합 아티스트, 웨이트리스, 뇌성마비 소녀 ,정비사 ,어린아이 같은 뜻밖의 인물들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형식과 허위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속 좁은 종교인들에 거침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저자 짐 팔머는 기독교 복음주의 교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목회자였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사건으로 그 질주는 멈췄고, 이 책에서는 이때 만난 사람들을 통해 송두리째 바뀐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생각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까? 신학박사 학위를 따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성경을 완벽히 꿰뚫으면 될까? 지은이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실패감 속에서 만난 재즈 드러머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닌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여태껏 고수해오던 세계는 여지없이 무너졌지만 진리의 빛에 가까이 가게 된 그는 이후 소명, 제도교회, 십일조, 교파, 정치, 동성애, 우울증 등 기독교 안에서 중요시 여기거나 터부로 여긴 문제들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간다.

  힙합음악을 하는 친구. 음탕한 언어로 섹스와 폭력을 찬양한다고 여기던 힙합이 인생의 어두운 부분과 영혼의 절박함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를 통해 성경지식으로 무장한 교인들이 세상에 지친 사람들 속에 숨겨진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하고 다그치는 일의 어리석음을 배운다.

  백화점에서 까탈스런 손님들에 시달리다 들른 식당. 웨이트리스는 자기가 만난 최악의 고객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일예배 후 명랑한 얼굴로 들어와서는 그녀를 맘껏 부려먹고 전도지만 달랑 놓고 자리를 떠나는 교인들.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신학 이론은 아무 소용없음을 배운다.

  휠체어에 앉아 아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인 어린 소녀.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끝없는 욕구 속에서 버림받을까봐,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움에 떨던 자신을 직시한다. 그리고 하나님 눈에 들기 위해 할 일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교회에 십일조를 내지는 않지만 자기가 하는 일과 수입으로 자연스레 이웃을 돕는 정비사, 상상력과 단순함으로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준 어린아이들,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있는 상대방이 적이 아닌 이웃임을 알려준 수영강사, 이웃사랑은 돈 얼마의 기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임을 알려준 타이어 판매인 등은 지은이가 제도교회에 환멸을 느껴 기독교를 버리려 고민할 때 둘은 전혀 다른 것임을, 예수를 따르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한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종교의 짐을 지우던 바리새인들. 그들을 통렬히 비판하신 예수님. 이 책은 이 시대에도 세상에 구원의 빛이 되지 못하고 근심거리를 던져주는 종교인들에게 진정 예수를 따르는 것이 어떤 것임을 감동과 책 읽기의 즐거움 속에서 한껏 선사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회개의 소리와 반성의 제스처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진정한 영적 진리를, 기독교에 실망한 이들에게는 가슴이 뚫리는 시원함을 전해줄 것이다.

[책 핵심 읽기]
  세상의 많은 종교들마다 신성한 문서(토라, 코란, 모르몬경 등)가 있지만 기독교의 중심에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살아있는 말씀과의 관계로 끌어내기 위함이셨다. 내가 내 아내에 관한 정보를 연구하고 암기할까? 아니다. 나와 아내는 같은 집에서 살며, 언제라도 원하면 서로 교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며,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면서 나를 만나주신다. 생각해 보라. 아내가 내게 사랑의 편지를 쓴다면 그 편지가 우리 관계의 전부일까? 아내가 편지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나는 성경을 하나님으로 삼았다. 어떤 성경 구절을 읽고 몇 주일 후에 다시 성경을 펴 봐도 그 구절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확고하고 불변하고 통제 가능한 대상이 주는 편안함이 성경 속에 있다.

  참으로 희한하다. 크리스천들은 남들의 육체적 죄는 그토록 못 참으면서 자신의 영적인 죄는 잘도 참아준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은 포근하게 품어주셨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옭아맨 성직자들은 호되게 나무라셨다. 물론 자기 몸을 함부로 굴려서는 곤란하다. 그래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죄에 못지않게 파괴적인 죄가 있다. 그 죄는 힙합 가수의 뮤직비디오와 요란한 의상 속에 있지 않다. 가식과 표리부동과 자기의義야말로 정말 무서운 죄다. 이 죄는 몸보다 더 중요한 영혼을 갉아먹는다. 성경을 보면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하나님 왕국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개 종교인들이 아닌 ‘죄인들’이었다.

  노숙자를 돕는 단체에 기부를 하거나 그런 단체의 추수감사절 만찬에서 접시를 닦는 일까지는 좋다. 하지만 노숙자들과 개인적으로 어울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길거리나 대형 마트 주차장에서 그들을 만나면 그 지역의 노숙자 시설을 안내해 주면 그만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택시를 잡아주면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돈을 주거나 집으로 초대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을 ‘도우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알 필요가 뭐 있는가. 릭은 노숙자들과 얘기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이메일을 받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이 초라한 남자에게 주저 없이 커피를 내밀며 대화를 시도했다. 릭은 그가 무슨 부탁을 하든 다 들어줄 기색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존이었다. 릭은 존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정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상하게도 그는 ‘정말로’ 존에게 관심이 있었다. 여태껏 내가 본 사람들은 노숙자가 다가오면 하나같이 알리바이의 모순점을 찾는 검사처럼 독한 질문들을 퍼부었다. 그러나 존과 릭의 담소는 즐거운 이야기가 오가는 캠프파이어의 대화 같았다. 내가 노숙자 이야기를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듣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양서보급중앙회 북멘토&북코치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