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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王安石 ; 1021~1086)은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대학자, 정치가이지만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다행히 20세기 이후 그에 대한 평가가 새로뤄지고 있습니다.
송나라는 강력한 문치주의 정책을 폈는데 그 결과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오면서 이민족의 침입에 재정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종이 왕안석을 등용하여 왕안석의 구상에 의한 신법을 시행합니다. 신법은 한마디로 '부국강병책'입니다.
신법개혁의 목적은 대지주 및 대상인의 기득권을 뺏고, 중소농민 및 상인의 경제적 지위향상에 있었습니다. 신법에는 청묘법, 시역법, 방전균세법, 보갑법, 모역법 등이 있습니다.
왕안석이 실시한 신법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청묘법'입니다. 청묘법이란 단경기(철이 바뀌어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세 곡식이 나올 무렵)에 국가가 낮은 이자로 농민에게 곡식과 돈을 꾸어주어 농민을 고리 대금의 착취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는 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돈과 곡식을 빌리는 것이 보통이며 추수 때 갚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금리가 무려 6, 7할에서 심한 경우는 10할이라는 엄청난 착취였습니다. 청묘법의 실시로 그 이율은 2할 이하로 떨어져 농민에게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법 시행에 따라 빈곤층은 연리 2할의 저리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면역법'의 시행으로 노역의 의무를 화폐로 대신할 수도 있게 되는 등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획기적인 조치들이 많았습니다.
또 '시역법', '균수법'은 물자 유통의 원활화와 물가의 조정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대상인들의 매점 매석에 의한 물가의 조작을 방치하는 법입니다.
'방전균수법'은 대지주들의 탈세를 방지하는 법으로서 농지의 측량을 실시하여 은전(세금을 내지 않고 몰래 경작하는 토지)을 적발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등 불합리한 세제를 시정하였습니다.
이 밖에 '보갑법', '보마법', '치장법' 등 군사력의 증강을 도모하는 새로운 군사 제도도 실시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단가간에 송나라의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습니다.
왕안석의 신법개혁은 대지주, 대상인 및 귀족, 관료층 등의 기득권층의 이익에 반(反)하는 것으로 기득권층 세력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신법에 반대하는 세력은 고급 관료들뿐이 아니고 외척 등 황제의 측근들도 신법으로 불이익을 받게 되자 크게 반발하였으며 인종의 왕후 고씨도 그의 친정이 신법으로 인하여 많은 손해를 보게 되자 신법을 몹시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1085년 왕안석을 등용했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황태후 고씨가 철종에게 울면서 호소하는 등 반대세력의 선동으로 왕안석은 실각하고 신법개혁에 반대하던 사마광이 문하시랑에 임명되어 신법을 폐기하고 구법을 다시 시행하였습니다. 구법은 기존 기득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후 철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선언하고 구법당의 관리를 물리치고 신법당의 관료를 등용하였지만 그 뒤를 이은 휘종이 중도정치를 위해 구법당 관료도 등용합니다. 이후 신법당과 구법당 관료사이의 당쟁이 계속되어 송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송나라는 강력한 문치주의 정책을 편 결과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오면서 이민족의 침입에 재정은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을 시행하였다.
신법개혁의 목적은 대지주 및 대상인의 기득권을 뺏고 중소농민 및 상인의 경제적 지위향상에 있었다. 신법에는 청묘법, 시역법, 방전균세법, 보갑법, 모역법 등이 있는데, 이에 따라 연리 2할의 저리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노역의 의무를 화폐로 대신할 수 도 있게 되는 등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획기적인 조치들이 많았다. 또한 매년 토지를 측량하여 그간 탈세해온 토지를 적발하여 세수를 늘리는 방법 등으로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왕안석의 신법개혁은 대지주 및 귀족, 관료층 등의 기득권층의 이익에 반(反)하는 것으로 기득권층 세력의 반대가 심했다. 1085년 왕안석을 등용했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안석의 신법개혁에 반대하던 사마광이 문하시랑에 임명돼어 신법을 폐기하고 구법을 다시 시행하였다. 이후 철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선언하고 구법당의 관리를 물리치고 신법당의 관료를 등용하였지만 그 뒤를 이은 휘종이 중도정치를 위해 구법당 관료도 등용하였다. 이후 신법당과 구법당 관료사이의 당쟁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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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安錫
http://cafe.naver.com/bookmentorclub
**2010년 9월1일 부터는 한국양서보급중앙회 사무실이 우이동 한국멘토링하우스(학원등록)와 함께 경기도 일산시 백석동 일산백석역 2번출구 옆 오피스텔로 옮겨서 영미고전소설및 저술활동,마케팅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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