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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 한 소년이 있었다. 매우 내성적인 성격의 이 소년은 학업 성적도 부진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해 학습 지진아들로만 편성된 열등반에서 겨우 보충교육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소년이 유명한 시인들의 시화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대의 저명한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즈도 참석한 자리였다. 작품을 둘러보던 번즈는 어떤 작품을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주 훌륭한 작품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그 시의 원작자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한 소년이 작가의 이름을 말하며 시를 멋들어지게 암송했다. 번즈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칭찬했다. “너는 장차 위대한 시인이 될 거야.” 소년은 이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문학공부를 했고 후일 영국의 위대한 시인이며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바로 월터스코트경이다. 말 한마디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또 다른 예가 있다. 똑같은 상황에 처한 두 소년에게 보인 각각 다른 반응이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느 시골의 작은 성당에 신부를 돕는 나이 어린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열심히 성찬용 포도주를 나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성찬용 포도주를 담은 그릇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신부는 화가 나서 그 소년의 뺨을 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서 나가지 못해. 그까짓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라면 다시는 제단 앞에 얼씬거리지도 말아라.” 소년은 뛰쳐나갔고 그 후 일평생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무신론자가 되어 공산국가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대통령이었다. 반대로 또 다른 성당에서 똑같은 심부름을 하던 소년이 있었다. 그도 역시 실수로 성찬용 포도주를 땅바닥에 쏟게 되었지만 신부는 동정의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염려하지 마라. 넌 앞으로 훌륭한 신부가 되겠구나. 나도 너처럼 어린 시절 포도주를 실수로 쏟은 적이 있단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신부가 되어 있잖니?” 소년은 자라서 훌륭한 신부가 되었다. 그는 바로 풀톤 대주교였다. 말 한마디의 위력, 그것은 사람의 일생을 바꿀 수도 있음을 볼 수 있다. ‘두 신하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혀요, 가장 선한 것 또한 혀”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말 한마디의 위력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예화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축복의 언어>(존 트렌트, 게리스몰리/최예자 옮김/트리셉트)는 바로 언어생활 특별히 축복의 언어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실재적인 방법에 대해 쓰고 있다. 저자는 축복의 언어는 ‘애정 어린 접촉과 마음이 담긴 격려, 소중한 가치부여, 저주를 이기는 능력, 적극적인 헌신 등’ 5가지라고 말한다. 축복의 언어가 자녀의 생애를 전인격적으로 송두리째 바꾸며, 저주의 언어는 자녀와 주변인의 가슴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저주를 남긴다는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은 거의 절대적인 부모의 영향 아래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부모의 말을 듣고, 먹고 자란다. 축복의 말, 저주의 말, 사랑의 말, 긍정의 말, 부정적인 말 그 모든 말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성경에 보면 동생 야곱에게 축복권을 빼앗긴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슬픈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난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 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창27:38) 아버지 축복, 부모의 축복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구약성경만 해도 축복이라는 단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640번이나 나온다. 저자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자란 브라이언이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의 임종 때까지도 결국 한마디의 축복의 말을 듣지 못한 그가 세 번의 이혼, 세 번의 파혼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영향아래 놓여있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축복의 말을 듣고 자란 사람과 저주의 말을 듣고 자란 사람 등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받고 사는지 여러 예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부모의 인정의 말, 축복의 말을 듣고 자라지 못한 사람, 저주의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은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 쉽다고 말한다. 히브리어로 저주란 단어는 ‘평가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안개나 수증기와도 같이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아무 자극도 줄 수 없는 무익한 상태로 무시해 버릴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고통과 상실감, 상처를 갖고 있는 모두에게 저자는 성경적인 소망과 치유의 희망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 안에서 삶의 분명한 목적과 의욕을 고취시켜 나가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받아온 저주를 바꿔 놓은 확실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베푸는 것이다. 주님이 그분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것은 저주의 정반대인 축복이다.” 축복의 언어가 자녀와 주변사람들의 생애를 전인격적으로 송두리째 바꾼다면, 저주의 언어가 자녀와 주변인의 가슴에 또한 평생 씻을 수 없는 저주를 남긴다면 당신은 어떤 언어를 택할 것인가. 나와 여러분의 언어생활을 한번쯤 돌아보며 점검해보고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나는 죽이는 언어, 저주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가. 살리는 언어 축복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가. 혀는 생명이 되기도 하고 무기가 되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다행인 것인 가까운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을 듣지 못하고 인생에 좋지 못한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성경을 통해 소망과 위로, 치유의 말씀으로 새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렘29:11) |
출처 : 바보온달의 신앙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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