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 빨간색 숫자가 쉬는 날임을 알려주지만 주일을 쉬는 날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 날엔 내가 해야할 일이 늘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문율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아왔다.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회의나 모임이 있으면 예배는 빠져도 모임에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를 위해 사는 일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사명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는 나에게 '예수님 위해 살려고 하지 말라'는 제목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자그마한 글씨로 '예수님이 내 안에 살게 하라'고 쓰여진 글자는 책의 제목보다 사실은 더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아 지나칠 수 없었다. 자기가 없으면 교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만 했던 나와 같은 사람에겐 충격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책이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스스로 물음표를 찍어놓고 저자가 말하는 답을 찾는 방식으로 내용을 살펴보겠다.
과연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이 책에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자기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자신의 능력이나 계획은 다 포기하고 오직 그를 부르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해 준다. 분명한 비전을 나에게 허락해 주셨다. 그런데도 자꾸만 주변의 상황에 의해 흔들린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의 잣대에 모든 것을 맞추어 놓고,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을 결실이라 생각하고는 정신 없이 달리는 미련함이다. 아들 예수님조차 일의 원동력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면서 죄와 천국에 대하여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일을 말하는데 나는 스스로 무엇을 이룬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구원의 주된 내용이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었다고 떠들면서도 똑바로 이끌지 못하는 나에게 저자는 '예수님의 사역이 결과보다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무언가를 얻으려 오는 사람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시며 등을 돌렸다'는 것을 분명하게 꼬집는다. 견딜 수 없는 질병에 신음하면서도 하늘나라를 소망하지 못하고 고쳐만 달라고 매어 달린다. 스스로 믿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조금 곤란한 문제라도 생기면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 동안 해왔던 습관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조차 숨겨버린다. 그런데도 나 또한 그저 교회에 나가면 되는 것처럼 약한 자들의 비위만 맞추려 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거룩한 몸으로 만들어가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성전 문만 밟게 하였던 것이다. 안타까운 모습이 내게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자기실현입니까?'라는 말로 다시 묻게 된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도 죄의 감정에 현혹된 삶을 본다. 선행이 구원을 받은 자에게 마땅한 것임에도 선을 행함으로 마치 구원을 얻는 것처럼 일했다. 하나님 앞에서 선 자처럼 행하면 가장 신뢰받는 자가 될텐데 구별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서 현혹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 어찌합니까? 죄 사함의 근거가 자비하심이 아니라 그 아들까지 내어주심으로 값을 지불하신 공의임을 깨닫게 하는데 우리는 죄책감으로 질식하게 하는 사탄을 쫓아간다. 우리의 죄과를 멀리 떨어트려 놓았는데도 예외조항이 있다는 말에 넘어져 이미 완성된 정의까지 의심한다.
죄의식에서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에게 '죄의식은 죄에 대한 깨끗함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살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성령의 존재와 사역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으로 저자는 말한다. 성령께서 임재 하시는 증거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망과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는 갈급함과 성전인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해 섬기려는 갈망에서 찾았다. 정직한 삶으로 드러나는 투명함이 부끄럽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만한 너그러움이 평온하게 하며, 절망하게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지만 슬픔에 매이지 않는 소망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향기가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오래도록 지속되도록 돕고 있는데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보다는 스스로의 성취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믿음은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인데 믿음이 없으면 진리는 이해하기 어렵고, 비현실적이며, 단지 이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을 묵상함으로 깨닫고, 입술을 열어 그 깨달은 바라를 나눈다 할지라도 삶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신비한 체험이 있어야만 되는 것처럼 몰아세우는 것도, 믿음이 크냐? 작으냐?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믿는 자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가진 능력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과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를 통하여 공급하시고, 그 속에 거하는 택한 자기 백성을 사용하심으로써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셨다면 이제 그분이 우리를 통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 계시기만 하면 그가 일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삶은 성공 같으나 실패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도록 한다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능력으로 실패할 수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을 이제 확실히 믿는다.
조직이나 가정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성적부진, 실연등을 비관하여 자살하던 것과는 다르다. 일하는 것이 힘겨웠기도 했겠지만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는 부담이 저들을 벼랑 끝에 서게 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짐을 지고 다닌다. 잠시 내려놨다가는 다시 들쳐 매고는 제 길을 간다. 예수님 위해 산다고 하면서... 저들을 향하여 이 책의 저자인 챨스 프라이스가 한마디한다면 "스스로 해보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 주지 않았을까?
나는 아직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전을 가지고 예수님 위해 살겠다고, 헌신자의 삶을 살겠다고 떠들어댄다. 예수님을 겸손히 믿음으로 내 안에 모셔들이기만 해도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일하실 텐데 아직도 내가 살아 꿈틀거린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고, 거친 바람이 몰아쳐도 갈매기는 제힘으로 날아보겠다고 힘쓰지 않는다. 바람에 몸을 맡겨 비상하는 새처럼 성령의 흐름에 자신을 던져놓고 그가 쓰시겠다 하시는 대로 행하는 삶을 기뻐하며, 자연스럽게 드러나 그리스도인의 향기로 가득한 날을 바라며 찬양합니다.
챨스 프라이스 著, 『예수님 위해 살려고 하지 말라』, 허창범 譯, 생명의 말씀사, 2003.
출처 : 예수사랑 공동체
글쓴이 : 정상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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