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칼럼니스트

[스크랩]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북코치 2006. 10. 28. 00:43

클라스 후이징의 <책벌레>를 읽고...

주말 서점에서 고른 책이 하필 『책벌레』(클라스 후이징 저/문학동네 간)였다. 이런 종류의 책, 그러니까 엄청난 독서광이나 서치書癡가 등장하는 책을 읽을 때는 일단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 한다.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와 표정훈의 <탐서주의자의 책>을 통해 이미 경험했던 바, 끌어 오르는 시기심과 질투, 그리고 하염없이 작아지는 자기 자신을 수시로 다독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내게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우선 2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출현하는 두 명의 책벌레를 보면 가공할 외경심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들은 단지 책을 좋아한 게 아니라 책과 더불어 살았고, (저자의 말마따나)종래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들이다.

책 자체가 목적이었던 사람들에게 그 목적 실현을 위한 일이라면 도덕성 따위는 고려할 것조차 못되었다. 하여 독일 작센 지방의 목사였던 실존인물 요한 게오르크 티니우스와 현대 뮌헨의 대학생인 허구의 인물 팔크 라인홀트는 도둑질과 사기, 심지어는 살인도 불사한다.

옛날 인심 좋던 시절, 우리나라엔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13년전 그 말만 믿고 (지금은 없어진)종로서적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려 혼쭐이 났던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책 속의 인물들이 한없이 존경스럽기 만하다. 책을 위해 살고, 책 속으로 파묻히다니...

그러나 오해마시라. 그들의 사기와 도둑질과 살인을 존경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건 따로 있다. 그들을 몰입의 경지까지 내몰았던 책의 위력, 그 위력을 알아모실 줄 알았던 그들의 책에 대한 겸손한 자세와 존중하는 마음, 그것을 존경한다는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중 하나는 18세기 독일의 실존인물 요한 게오르크 티니우스다. 작센지방의 시골 목사였던 그는 다섯 권의 책을 썼다. 책에 집착했던 그는 그 욕망 때문에 살인도 마다하지 않은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또 다른 주인공 책벌레 팔크 라인홀트는 허구의 인물이다. 슈바빙의 헌책방에서 티니우스의 자서전을 발견한 그는 2세기전 인물의 삶의 자취를 좇기 시작한다. 그 역시 티니우스의 책을 구하기 위해 살인을 불사하면서...

이 책의 구성은 독득하다. 두 살인자 혹은 책벌레의 삶의 괘적을 좇으면서 동시에 ‘아홉 개의 양탄자’라는 선문답 같은 금언들을 뿜어낸다.

거기엔 플라톤, 니체, 루소, 칸트, 벤야민, 비트겐슈타인, 바르트, 데리다, 카프카 등 수많은 철학자의 사유가 등장하는가 하면 그들의 사유를 뒤집기도 하고 비틀기도 하며 책과 독서와 책에 대한 인류의 모든 인식을 되새긴다.

추리기법을 도입해 흥미로우면서도 비틀린 구성 때문에 헷갈리고 혼란스러워 중간중간 책을 덮고 한참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라면 특징인 셈이다.

아홉 개의 양탄자에 등장하는 얘기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책읽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곱씹어볼 내용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소크라테스와 제자의 선문답이다.

글쓰기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다음과 같다.

“글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더 이상 기억력을 훈련시키지 않을 테니까 (...) 그러므로 신께서는 기억력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회상을 위한 보조수단을 발명하신 것뿐입니다. 신께서는 그것(글 혹은 문자)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허상만을 선사할 뿐, 지혜 자체는 주는 게 아닙니다. (...) 실제로는 무지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착각하게 될 테니까요.” (33쪽)

출처 : 블로그/리뷰
글쓴이 : 시라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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