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 이웃 다 내게로 오라 | |
신간·베스트셀러 등 2만7천여권…종교책은 ‘박대’ 전도 대신 문화세례로 서민동네 주민 섬겨 한달 한번 독서토론회·본관 1층은 주민들에 개방 “겉모양이 화려한들 이웃사랑 없으면 됩니까” | |
임종업 기자 | |
지난 금요일(8일) 오전 은평구 불광1동의 한 건물. 주부들이 하나 둘 스며들어 12시쯤 이르자 12명이 됐다. 떡, 고구마를 내놓고, 대추차를 담은 보온병을 탁자에 부렸다. 잠간의 노닥거림이 정리되자 복사물을 하나씩 내놓았다. 일주일 전에 나눠받은 정미경의 단편 ‘내 아들의 연인’. 매달 둘쨋주 금요일에 열리는 독서토론회다. “아들의 컴퓨터 초기화면이 애인사진인 것 하며, 아파트 안에서 주차하면서 깜박이 켜는 남편하며 우리 집하고 똑같다.”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나와도 구별되는 강남사람과 달리 백화점 매장의 무슨 옷을 입혀도 태가 나지 않는 ‘아들의 연인’은 강북사람 같다.” “아들이 가난한 애인과 헤어지게 되는데서 화자가 ‘우울한 안도감’을 느꼈다는데, 머리와 가슴이 가장 멀다는 말이 실감난다.” “백미러 수리비 2백만원 때문에 고민하는 사장집 운전기사를 보고 빈부 격차와 악순환을 생각했다.” 모인 이들은 30~60대의 주부가 대부분. 화제는 뉴타운 보상이 나온 진관내외동, 신도시가 추진되는 고양·파주 등지에 100억대 졸부가 많이 생긴 얘기, 이들의 고교생 자녀가 교사에게 ‘공부해서 무엇하냐’고 대들더란 얘기, ‘상계동 지도에도 없는 곳’에 사는 중3 여학생이 말하는 소원이 ‘생각없이 사는 것’이란 기사를 읽고 눈물이 나왔다는 얘기로 번져갔다. 나중에는 분노만 말할 뿐 문제에 부닥쳐 해결하려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반성까지. 배달된 김밥을 먹으면서 이어진 토론은 오후 1시35분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푸짐한 수다상을 털고 일어나는 이들은 “한달 먹거리를 챙겼다”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토론회 장소는 은광교회 부속 김종대 목사 기념도서관. 교회에서 아스팔트 길 너머 지역사회에 뚝 떼어준 건물이다. 이곳 지층에 2만7천여권 장서를 갖춘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철제 앵글로 짠 서가가 12줄. 휑해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돼 있고 군데군데 작은 탁자가 있어 책벌레들이 숨어들기 맞춤하다. 어린이책 서가 옆에는 온돌장판이 깔렸고 시디와 디브이디를 볼 수 있는 단말기가 있다. 토론회 앞뒤로 60대 노인이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를, 취학전 아이를 동반한 주부가 어린이책을 빌려갔다. 도서관 애용 학생 영문과 수석 교육관으로 쓰던 이 건물(지하1층 지상4층)을 도서관으로 바꾸어 주민들에게 개방한 것은 1993년 7월. 그 이태전 부임한 이동준 담임목사가 선임 김종대 목사(1962~1979년 시무)를 기려 ‘김종대 목사 기념도서관’으로 이름지었고 퇴임한 김 목사가 1981년에 기증해둔 2천여권의 장서를 씨앗 삼았다. 개가식으로 운영하는 도서관이 구비한 책은 주로 일반인과 어린이용. 교회냄새 나는 종교서적은 귀퉁이 서가 한칸 정도다. 10여년째 도서관 간사를 맡아온 백승애(48) 집사는 “일반인들이 관심있어 할 책을 주로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 책은 추천도서로 선정된 것을 위주로 하고 일반도서는 베스트셀러나 매스컴에서 많이 다뤄진 책을 선정해 분기별로 구입한다. 한 분기에 300권씩, 한해 1200권의 신간을 들여온다. 교회운영위원회의 의결을 거치기는 하지만 도서의 운용은 베테랑 백 간사에게 일임하고 있다. 대출에 비중을 두고 구입할 뿐 아니라 빌려가지 않는 책은 과감히 퇴출시킨다. 아주 수준이 높아 고상하게 모셔진 책은 없다. 추리소설이나 야한 소설도 포함돼 있어 주변에서 도서관 장서인을 보고 “그런 책도 교회에서 빌려주느냐”며 신기해 할 정도다.
처음에는 비종교 도서를 갖추고 비교인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하는 데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교회가 좋은 일한다는 입소문이 나며 교회 이미지가 좋아지자 그런 얘기는 쏙 들어갔다. 이곳을 자주 이용하던 한 고등학생은 대학 영문과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예술고등학교를 진학한 아이는 이곳에서 빌려 읽은 책 <이 한장의 음반>(현암사)이 도움됐다는 말이 전해졌다. 교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많이 달라져 “만일 교회를 나간다면 은광교회를 가겠다”고 말하거나 자신은 나오지 않지만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는 주민들이 많다고 전했다. 10년이 넘도록 도서관을 이용했지만 교회 나오란 얘기를 한번도 못들었다고 말하는 성현주(39)씨의 말투는 편안함보다는 서운함이 섞였다.
이동준 담임목사는 “도서관 운영과 기독교 전도는 완전히 별개다. 만일 두 가지를 연계했더라면 이렇게 장기간 도서관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미화(46)씨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도 도서관을 만들고 독서토론회를 하려다가 실패했다면서 도서관이 유지된다는 사실은 교회가 지역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은평구립도서관과 대조어린이도서관이 각각 2001년, 2005년에 생기면서 교회도서관은 비로소 동무가 생겼다.
지역봉사는 이 교회 역점사업 가운데 하나. 도서관 외에 본관 1층을 갤러리로 꾸며 외부에 개방하고 있다. 영리적 목적이 아니면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 도서관이 길 건너 따로 있는 것처럼 갤러리 역시 대예배실과는 입구를 달리해 주민들이 편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인근 불광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 모임을 으레 이곳에서 연다. 그동안 이곳에서 한복작품, 종이접기, 시화 등 여러 전시회가 열렸다. 55대 규모 주차장은 밤 10시 이전에는 주민이면 아무나 차를 세울 수 있다. 주민봉사용으로 책정된 한해 예산은 1억2천만원. 형편이 어려운 주민의 생활비와 치료비로 쓰인다. 또 설과 추석이면 음식 한가지씩을 덜 만들어 아낀 돈으로 ‘절제와 나눔의 식탁’을 운용해 이웃과 나눈다. 심장병어린이돕기, 개안수술 지원, 탈북자 돕기 등 이곳의 ‘이웃과 함께하기’는 각별하다.
“교회는 섬기는 곳입니다. 교회로 인해 지역이 좋아져야지, 집값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목사는 교회 겉모양이 크고 화려한들 이웃사랑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주보의 앞면은 교회전경과 연락처만 있고 목사 부목사 전도사들의 이름은 맨 뒤에 조그맣게 ‘섬기는 사람들’ 란에 올라있다. 예배때도 담임목사나 장로는 강단에 높이 앉지 않고 신도들과 같이 앉았다가 차례가 되면 올라간다.
어린이 포함해 교인수 1800여명인 중형교회로 성장한 은광교회는 새로 지을만도 한데 본관에 잇대어 부속실을 지어붙이고 마당에는 가건물을 지어 부족한 공간을 늘려쓰고 있다. 꽃꽂이가 놓일법한 강대상 자리에는 생화분이 늘어서 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에서 꽃을 잘라쓰는 것은 모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주차장도 주민에게 공짜로
“교회도 세금을 내야 하지 않느냐”는 위악적인 질문에 이 목사는 “목회자들이 억대 연봉에 중형차 타고 자식을 외국 유학 보내고 하면서 교회재정을 허투루 쓰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다”면서 “교회가 재정을 바르고 투명하게 운용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보다 더 나은 효과가 나오도록 견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3부로 치러지는 주일예배.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까지 빈 시간에 다섯 명의 부목사가 담임목사실에 모인다. 1부 예배 때의 담임목사의 설교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내용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예화가 적절치 않다, 심지어는 너무 소리를 지른다는 얘기까지 찢어발겨진다. 2부부터는 개정판 설교가 올려진다. 벌써 12년을 그렇게 해왔다. “하나님이 담임목사하고만 말하겠습니까.”
승방같은 담임목사실에 걸린 수묵화, ‘가시관을 쓴 예수’처럼 교회는 여위어도 이웃사랑은 넘쳐흘러 길건너 도서실까지 흥건하게 고였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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