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칼럼니스트

상처를 사명감으로 전환하라

북코치 2007. 10. 3. 20:15


7세기 초,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소국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주름잡던 북방의 패자였고 백제는 왜국을 휘하에 둔 해양강국이었다. 당시 신라가 백제를 꺾는다든지, 삼국을 통일한다든지 하는 것은 헛소리였다.


그런데 신라의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604-661)가 그 헛소리를 역사적인 사실로 만들었다. 그는 조부 진지왕이 폐위되는 바람에 비주류의 진골로 전락했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서 신라에 투항했던 구해왕의 증손, 김유신(595-673)은 그를 큰 인물로 보고 여동생 문희를 그에게 붙였지만 그는 그녀를 임신시키고도 이미 자신에게는 부인과 딸이 있다며 그녀를 데려가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와의 결탁을 통해 가야계의 비주류라는 한계를 탈피하려던 김유신의 눈에 그는 토룡처럼 비쳤다. 30대 후반의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그의 잠재력을 폭발시키게 한 사건이 터졌다.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 성주이자 그의 사위였던 김품석과 그의 딸, 고타소가 죽임을 당했고 두 시신마저 백제로 압송됐다.


그는 비보를 듣고는 종일 기둥에 기댄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 눈앞을 지나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백제정복’이었다. 다시 김유신과 손을 잡고 몸집을 불렸다. 안으로는 신주류 세력을 키우고 밖으로는 외교를 통한 군사동맹에 직접 나섰다.


고구려에 가서 군사원조를 요청했다가는 한강 상류의 영토반환 문제와 뒤엉키면서 감금되는 등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더 커졌다. 이제 ‘삼국통일’이었다. 다시 왜국의 힘을 얻고자 현해탄을 건넜지만 거기서도 억류당하는 비운만 맞보아야 했다.


그만둘 만도 했지만 그는 먼 당나라로 향했다. 죽을 찰나를 간신히 모면하면서 어렵사리 당나라에 도착해서는 고구려를 견제해야만 하는 난제에 직면했던 당 태종의 애간장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녹였다. 마침내 중원의 강자, 당나라의 손을 잡을 수 있었고 그 결과, 그가 태종무열왕에 등극한 지 6년째, 그리고 딸 부부가 죽은 지 18년째이던 660년 한반도의 해양강국, 백제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듬해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다 병사했지만 668년 그의 아들,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도록 대로를 열어주었던 셈이다.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였다는 점, 성골이 아닌 진골출신이었다는 점, 즉위 때 나이가 이미 53세였다는 점, 구세력의 표본이었던 서라벌 진골계의 세력이 만만찮게 잔존하고 있었다는 점 등 실로 약점 투성이였지만 그는 딸 부부의 비극을 신라의 비극과 동일시하며 백제정복, 삼국통일의 대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늦은 나이에도 서두르지 않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안으로는 김유신과 손잡고 신진세력을 키웠고 밖으로는 당나라와 손잡고 신라의 맷집을 키웠던 것이다. 김춘추는 개인적인 상처, 치욕, 패배, 불운을 국가적인 사명감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경우다. 개인적인 고통은 얼마든지 더 큰 공동체를 살리는 에너지로 분출될 수 있다.


야베스가 그랬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셨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그를 낳았으면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내는, 어머니 가정의 불운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전환시키고자 간절히 기도했다. 복에 복을 더하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고통도 제거해 주시라고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구했을 것이다. 그 결과, 그와 그의 집안은 고통에서 벗어나 번성할 수 있었다(대상4:9-10).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좋은 것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개인적인 상처, 치욕, 패배, 불운을 위대한 사명감을 구현하는 에너지로 분출시키자.



[교회 밖에서 승리하라](김종춘, 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