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
음식 문화의 오랜 연원을 추적해 가는 『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는 초기 르네상스 이후 유럽과 미국의 음식 그림들을 연구하면서, 음식 회화를 자체의 역사를 지닌 별도의 장르로 분류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 주방 스토브 | 1962년,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
그림 속 작은 음식 하나에도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있다
노련한 풍속의 관찰자가 들려주는 식생활의 역사와 미학적 세계관
<안니발레 카라치 | 푸줏간>
번득이는 통찰력으로 인문과 예술의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야기꾼, 케네스 벤디너는 그림 속 상징들을 풍부하게 버무려 흥미진진한 한 편의 미시사를 완성했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음식과 식생활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정물화, 춘화, 사냥 그림, 술, 시장, 메뉴, 식사하는 사람 등을 두루 조사하는 한편, 낙관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르네상스 음식 회화의 정신과 이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풍요, 성공, 성취의 이미지를 방대한 그림과 해박하고 재치 넘치는 해설로 훌륭하게 복원해냈다. 음식 회화는 음식을 어떻게 판매하고 소비했는지에 관한 상세한 사항을 상당 부분 전해주는데, 가령 안니발레 카라치의 「푸줏간」에서 볼 수 있는 상품 거래 모습은 16세기 풍요로웠던 이탈리아 사회의 반영이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주방 스토브」나 앤디 워홀의 「200개의 수프 통조림」 같은 팝아트 작품들은 모든 사람에게 여러 물건을 일관적이고 내구적인 형태로 공급해 주는 현대 식품산업의 활기와 더불어 대량 마케팅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19세기에 그린 과일 시장의 장면에서 과일들을 상자로 분류하고 종이로 싸고 공업 생산품인 일회용 용기로 깔끔하게 배치한 것은 기계화되고 고도로 조직화된 식품 가공, 세계적 규모의 포장과 유통을 향한 19세기의 거대한 변화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앤디 워홀 | 200개의 수프 통조림>
케네스 벤디너는 위대한 대가들의 음식 그림을 미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림의 암호를 풀 듯 작품에 나오는 잔치, 죽은 짐승, 과일, 식기 등의 근저에 놓인 생각 혹은 무의식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이 단지 조리 방법의 역사적 변천을 보여주는 삽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식습관, 계급 차이, 새로운 식품, 문화적 연관성, 다양한 사회와 시대의 종교적, 의학적 믿음 등을 두루 살핌으로써 회화 작품들의 평가를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서양 미술사의 통상적인 사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작품들을 분류해 보면 오히려 진실한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각 장에서는 음식의 재료를 구입하고 요리해서 먹는 일련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추적해 나가는데, 1장은 음식의 수집과 판매, 2장은 음식의 준비, 3장은 식사, 4장은 순전히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음식의 표현을 매우 색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소개된 그림들은 대개 시대순을 따랐지만, 때로는 핵심을 지적하거나 더 큰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대순을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음식과 식생활의 역사라는 인문학적 주제와 음식 회화의 변천이라는 예술적 테마를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이 책은 음식 그림으로 재구성한 서양생활사이자, 회화 속 숨겨진 상징을 찾아내는 잔재미도 상당하다. 식사의 배경, 식기, 음식의 종류, 식사 예절을 통해 각각의 사회 계층을 세심하게 정의하는 다양한 의미들을 발견해 내는데, 예를 들어 17세기에 사탕은 부의 표시였고 19세기에 순무는 가난의 표시였다. 또 포크를 사용할 줄 모르면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뜻이다. 익히 알고 있는 그림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독창성도 이 책을 각별하게 만든다. 저자는 회화 작품을 해설하면서 미술적 기법, 구도, 유파 등과 같은 전문 지식은 배제한 채 당시의 생활사나 성 의식같이 흥미를 끌 만한 관점에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어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음식이란 친근한 소재에 발을 굳게 디디고 서서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라는 주제를 참신하게 직조해낸 재미있는 문화사론으로, 브뢰헬이 왜 농부들의 식사 장면을 그렸는지, 샤르댕이 왜 브리오슈를 오렌지 꽃으로 장식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미술사에서 저평가된 음식 회화가 실은 대단히 풍부한 분야라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예담 『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