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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대한민국

북코치 2008. 1. 5. 10:45

[북멘토]‘Revoluton’은 혁명이란 뜻을, 소문자로 출발하는 ‘revolution’은 전환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발상의 전환, 그것은 나를 바꾸고, 주변을 바꾸며, 결국 세상을 바꾸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세계 문자상의 혁명이라고까지 일컫는다. 그런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배우고 쓰기 쉬운, 그래서 백성을 편하게 하고 세상을 교화시키려 하는 대왕의 생각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런 쉬운 글자를 만들기 위해 대왕은 기존의 언어에 관한 연구를 충실히 하면서도 새로운 발상을 하였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훈민정음의 창제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발상의 전환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일하면서 많이 느끼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면서도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발상의 전환이다. 많은 이들은 일하는 시간이 많으면 일을 처리하는 양이 많아지니까 업무의 능률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이제 낡은 생각일 뿐이다. 노동 시간이 많다고 성과가 오르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는 숱한 현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직 우리는 낡은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대답하는 것처럼, 이 책도 그 대답을 내놓고 있다. 곱셈. 업무량의 더함이 아닌 업무의 질량과 밀도의 곱. 언뜻 과학 시간에 배웠던 부피의 공식이 예상된다. ‘부피 = 질량 × 밀도’. 숫자로 생각해보면 세제곱을 떠올릴 수 있다. 단순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같은 아이디어 2를 내놓는다고 하자. 2를 30번 더하면 60이지만 2를 30번 곱하면 10억이 넘는다. 생각하는 것, 일하는 양이 똑같아도 거두는 성과가 천양지차이다. 물론 이것은 다른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산술적인 계산에 불과하다. 다만 이런 발상이 강조하는 것은 평면적 생각이 아닌 다면적인 생각이다. 때로는 남들이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차원의 생각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예를 우리는 연예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즘 개그의 추세를 보면 콩트식의 프로그램이 하향세를 보이는 반면 이른바 ‘무한도전식’ 프로그램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사실 이런 현상은 몇 년 전부터 보여왔고 최근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호통, 비난, 욕설. 과거 공중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단들이 거침없이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통쾌하고 재미있어 한다. 이런 수단들은 과거 정치 개그에 통했다. 그런데 사회가 다원화, 다면화되면서 그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것을 잘 포착한 연예인들이 발상의 전환을 한 셈이다. 특히 이런 수단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일상에서 늘 다정하게(?) 쓰다보니 특히 경상도 출신 연예인들이 많이 쓴다. (지금은 그 비율이 많이 줄었다고 해도) 현재 브라운관을 점령하는 이른바 ‘웃기는 사람들’ 가운데 경상도 출신이 상당수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열풍을 보이고 있는 ‘텔미 댄스’도 곱셈 발상의 중요한 한 예이다. 복고라는 이름을 빌려온 고난이도의 발상인 셈이다. 물론 그 파급 효과는 가수들이나 기획자들도 전혀 예상을 못할 정도로 크지만. 저출산율, 고령화 사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한 살 두 살 차이가 나도 그 문화의 격차는 상당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전반을 뭉뚱그려 볼 때에는 오히려 격차가 줄어들고 있음이 느껴진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나왔을 때의 문화 충격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격차가 나고 있음을 인지한 기성 세대들이 가까워지려는 노력, 새롭지만 지난 세대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한 신세대의 노력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복고의 새로운 창출이라는 것과 맞아떨어지고 있으며, ‘텔미 댄스’는 그 움직임을 정확히 읽은 한 예이다. 생각의 다면화, 다원화는 그렇게 엄청난 성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상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따른다. 이 책의 뒷 부분으로 넘어가면 그런 지침들이 많이 나온다. 이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이는 일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 관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병법을 쓴 유명한 손자는 절대로 위태롭지 않을 조건으로 ‘상대방을 아는 것’과 함께 그 앞에 ‘나를 아는 것’을 두었다. 사실 ‘나를 아는 것’은 어쩌면 ‘상대방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사람의 눈이 바깥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달려 있기 때문에 남은 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잘 알기 힘들며, 따라서 나를 알기 위한 노력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한다. 그 노력이 많아지다 보면 나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도 강해질 것이다. 그것은 나와 동등한 상대방에 대한 마음으로도 이어질 것이며, 상대방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속에서 칭찬, 긍정의 효과가 나오며 강한 실천, 긍정적인 말과 인간 관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생기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의 능률도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나름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발상이라는 것이 상황, 환경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업이라는 아픔을 맛본 저자의 경험이라든지 주장하는 내용에서 공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의 성공을 거둔 입장에서 쓴 이야기이기에 성공이라는 문턱에 이르지 못한 많은 이들이 느끼는 벽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그 벽을 넘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감대를 마련해주는 것이 이 책에서는 다소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의 잘못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그 벽을 만든 사회에도, 벽을 만들거나 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스스로에게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성을 충분히 고려한 의미있는 성찰이 있을 때 곱셈의 효용은 우리에게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한국양서보급중앙회 북멘토&북코치클럽]

               한국독서문화경영연구원(CEO독서경영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