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김명혁 목사 (오른편) | | 포용주의 에큐메니스트 김명혁 목사는 '한국교회 안에서 가장 유해한 인물'인가? 아래의 글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김명혁 목사가 2006년 3월 16일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대한 신학적 재고찰'을 주제로 뉴스앤조이가 개최한 신학포럼(대전 새로남교회)에서 발제한 내용 전문이다.
김명혁 목사는 아래의 글에서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상대화하고 상대방의 신학적 입장을 포용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비판과 경쟁을 지양하고 다양성 가운데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이날 그는 어거스틴도 칼빈도 루터도 절대적이 아니라고 말했다. 과연 "복음주의자" 또는 "개혁주의자"가 할 수 있는 말인가?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는 이날 발표한 논문 "에큐메니칼운동과 죽어가는 교회"에서 "복음주의자 김명혁, 이성구, 옥한흠, 김상복 등은 메이첸이 미국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이라고 평한,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에 기여한 스피어를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미국장로교회의 좌경화에 기여한 로버트 스피어가 자신은 정통신앙, 보수신앙,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에 교회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이상, 편집자 주)
“화해, 균형, 조화를 추구하며"
김명혁(강변교회 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심각한 문제는 양극화의 문제이다. 사실 이 양극화의 문제는 신라와 백제 시대로 소급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이다. 나만이 절대로 옳고 내 지역과 내 파만이 절대로 옳다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에서 양극화는 비롯한다. 최근에 한국교회와 정치 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 정치권은 저마다 양극화를 극복하여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그 소리들마저 양극화를 해소하기보다는 부추기는 것 같이 보인다. 교계의 지도자들도 연합과 일치를 오래 전부터 주장은 해오지만 보 혁의 갈등은 해소되기 보다는 심화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한기총의 대표회장으로 새로 취임한 박종순 목사는 화해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올바른 설정이다.
나는 여기서 ‘원리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하나의 ‘고백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금 한국이 처한 정칟사회·교회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할 때 정치 사회 교회 안에 화해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너무 어렵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개인적인 ‘고백’을 피력해본다.
이와 같은 하나의 개인적인 고백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바리새주의적인 위선의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많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는 긍정적인 글 이외에 문제성이 있는 주제의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여기 하나의 ‘고백적인’ 글을 쓴다.
첫째, 나는 본래 근본주의에 가까운 극단적인 보수주의를 지향하던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이나 오순절주의 신학은 무조건 비판하고 반대했다. 교회사를 전공했고 특히 어거스틴을 전공했는데도 그러했다. 그러나 나는 차츰 어거스틴의 양면성과 포괄성을 보다 깊이 배우면서, 존 스토트 박사의 균형과 조화의 사상을 보다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신학적 배타성과 독선성을 조금씩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최근에는 칼빈도 절대로 옳은 것은 아니고 루터도 절대로 옳은 것은 아니고 웨슬레도 절대로 옳은 것은 아니라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이단이 아니라면 모두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포용적인 입장까지 취하게 되었다.
둘째, 나는 본래 여러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자기와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의 사귐은 더욱 더 힘들어 했다. 그래서 북한 사람은 물론 일본 사람도 중국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싫어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인생은 만남”이라고 말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나서 사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나름대로의 인간미와 종교성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북한 사람은 물론 일본 사람도 중국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좋아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모슬렘 사람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비판하던 소위 자유주의에 속한 사람들과도 친하게 사귀게 되었고 보혁 인사들의 사귐의 중매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셋째, 나는 본래 학문 연구와 신학 연구에 몰두하던 사변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차츰 사람들과 만나서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교수의 일을 하면서도 목회 사역을 겸하게 되었고 선교와 구제와 봉사와 연합과 평화 사역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되었으며 일의 중요함과 즐거움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설교는 은이고 신학은 동이고 삶은 금이다”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되었다. 따라서 목회와 선교와 구제와 봉사와 연합과 평화 사역을 수행하는 가운데 통합 측에 속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과는 물론 내가 비판하던 강원용 목사님을 비롯한 기장 측에 속한 분들과도 조용기 목사님을 비롯한 순복음에 속한 분들과도 친밀한 교제와 협력을 이루게 되었다.
넷째, 나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순수한 신앙과 포용적인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고 배우는 가운데 교회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성 프랜시스의 섬김의 신앙과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고 배우는 가운데, 손양원 목사 등 신앙의 선배들의 순수한 신앙과 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고 배우는 가운데, 나는 교회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지역주의는 물론 인종주의도 민족주의도 국가주의도 넘어서서 모두를 품고 모두를 사랑하며 모두를 구원하려고 했다. 나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처절한 고뇌와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다섯째, 나는 진리와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분리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나라와 같은 조그만 나라에 장로교회가 100여 개 이상으로 나뉘어져서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드릴 수 없는 죄악임을 알게 되었다. 분파의 죄는 배교의 죄와 같은 죄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내가 분열의 죄를 조장한 ‘원죄인’ 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비판하고 떠나온 합동 측 교단에 대해서 항상 죄송하고 빚진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내가 비판하던 기장 측이나 순복음측에 대해서도 죄송한 마음을 지니면서 교제와 협력을 힘쓰고 있다. 비슷한 교단끼리 강도사와 목사를 서로 인정하며 교류하기를 바라고 때가 될 때 합동을 추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섯째, 나는 대부분의 경우 분열과 분파를 조장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닌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집착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교회가 정치 사회 문화 일반에 복음적 영향을 미치면서 폭 넓게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편향적으로 치우치면 교회는 반드시 분열하고 양극화로 치닫게 된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세 단계의 개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로잔 이전에는 정치 사회 참여를 비판적으로 보았고, 로잔 이후에는 다소 긍정적으로 보면서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를 비판했는데, 9·11 이후에는 차츰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결국 교회는 복음에 집착하여야 함을 늦게나마 발견하고 깨닫게 되었다. 교회가 진정한 영적 각성을 체험하고 복음적 선교에 매진할 때만 연합과 협력을 이룬다.
일곱째, 나는 대부분의 경우 분열과 분파를 조장하는 것이 자기 개인의 입장과 자기 개인의 지위와 자기 개인의 자리와 명예에 집착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일을 하기 위해서 때로는 지위와 자리를 차지하여야 함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위와 자리와 명예에 집착하게 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높아지려고 하며 서로 다투게 된다. 한국교회는 지금 커지기를 바라고 높아지기를 바라고 강해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대형화와 세력화를 지향할 때 교회는 세속화와 분파화로 치닫는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복음은 약한 것인데, 복음은 착한 것인데, 복음은 주변적인 것인데…” 라고 중얼거린다.
여덟째, 화해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오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쉽게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교회 안에 화해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가 주님의 마지막 기도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서로 만나서 교류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2)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상대화하고 상대방의 신학적 입장을 포용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3)비판과 경쟁을 지양하고 다양성 가운데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4)함께 일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5)비슷한 교단들의 통폐합을 힘쓰며 비슷한 연합기관들의 통폐합도 힘써야 할 것이다.
아홉째,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극단적인’ 주장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재건파적인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주장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적인 포용적이고 사회, 문화주의적인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비극단적인’ 사람들이 교제와 협력을 힘쓰므로 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의 주장들을 잠잠케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양한 교단의 지도자들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고 한기총의 지도자들이나 KNCC의 지도자들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신앙적인 입장에서 ‘연합’과 ‘협력’을 이루지 못할 이유를 별로 발견하지 못한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