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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최덕성 교수(교회연합일치 포럼) | | 적진의 장수보다 더 무서운 인물은 아군의 진지 안에서 적과 내통하는 병사이다. 적에게 성문을 열어주어 초토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는 교회일치의 ‘최소한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서 “신학적 다양성“을 용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보수와 진보,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을 아우르는 새로운 신학을 창출하자고 말하는 복음주의계 에큐메니스트들이 교회에 가장 유해하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며,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한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포용주의 태도를 가지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버리고 교회를 무장해제시켜 교회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정통신학, 보수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교회 안에 실제로 이단자나 거짓교사 보다 더 유해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최덕성 교수가 저술한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6)의 한 장을 옮긴 것이다. 그레이스앰 메이첸 박사가 미국장로교회 안에서 가장 유해한 인물이라고 평한 로버트 스피어에 대한 글이다. "교회에 가장 해로운 인물"이라는 말의 진의를 알게 해 준다. 아래에 실린 "에큐메니칼운동과 죽어가는 교회"와 연계되어 있는 글이다.(편집자 주)
사도신경이면 충분한가?
―로버트 스피어의 포용주의 에큐메니즘―
최덕성
그레스앰 메이첸이 역사적 기독교를 파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씨름하던 즈음에,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행정가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는 이 교회의 외국선교부 총무와 총회장(1929)으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문을 자유주의 기독교에 열어 주었다. 자신이 정통신앙과 교리에 동의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했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하는 연합일치운동을 주도했고,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역사적 기독교 신학을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로 여겨 지탄했다.1
메이첸은 스피어를 “우리 시대의 가장 언변이 뛰어난 사람 중의 한 명이요…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 중의 한 명”2이라고 진심으로 칭찬했다. 또한 스피어가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정통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자유주의 기독교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가장 공격적인 자유주의자 못지않게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회에 가장 위협적인 사람은 이와 같은 엉거주춤한 태도와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자라고 비판했다.
메이첸은 스피어의 포용주의와 관련하여 그를 “장로교단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3이라고 말했다. 적의 장수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적과 내통하는 아군 병사이다. 의심을 받지 않는 가운데 어느 순간에 성문을 열어주면 적이 쳐들어 올 수 있다. 이단자와 거짓교사와 자유주의 신학자는 신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교회가 경계태세를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자유주의 기독교에 교회의 문을 개방하는 사람은 이단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유해하다는 것이다.
1. 로버트 스피어와 외국선교부
스피어가 미국북장로교회의 외국선교부 총무, 총회장, 프린스톤신학교 이사로 활동할 무렵에 보수파의 진리 파수를 위한 투쟁과 개혁파의 자유주의 신학강령에 따른 교회개혁(변질)의 공략은 극에 달했다. 총회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들을 단지 이론, 학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을 목사로 장립하는 것을 제재하지 않았고, 배교적인 ‘신앙고백’을 담은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 1924)에 서명한 목사 1,274명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들이 목회직을 계속 수행하도록 했다.
그 무렵, 외국선교부는 신앙이 의심스런 사람들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있었다. 한국에 파송된 윌리엄 커(William Kerr)와 중국에 파송된 펄 벅(Pearl Buck)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커는 오번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1930년대에 한국장로교회가 그의 자유주의 신학을 문제 삼아 소환을 요청하자 귀국했다가 재한 일본인 선교사로 다시 파송을 받았다.
외국선교부는 정통신앙을 가진 선교사 지원자들을 냉대하고 있었다. 선교부 부원 열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이 오번선언서에 서명을 한 자들이었다.4 스피어도 그것에 서명을 했다. 외국선교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믿는 복음적 기독교인들이 바친 헌금을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근본도리를 믿지 않는 선교사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스피어가 주도하는 교단 선교 프로그램과 선교사 선택과정은 개혁주의 정통신앙을 가진 선교사, 선교사 후보자를 차별대우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 때 스피어는 『외국선교는 호되게 당했는가?』(Are Foreign Mission Done For?)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메이첸과 스피어 사이에 논쟁의 단서를 제공했다. 메이첸은 이 책이 당시의 뜨거운 감자인 복음적인 선교사들이 고백하는 기독교의 중추 교리들을 다루지 않으며, 여러 가지 난점들로 채워져 있다고 지적했다. 성경무오성·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육체부활·속죄사역·초자연적 기적수행 능력에 대한 교리와 고백이 선교활동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며,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고, 낙심할 정도로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고 비판했다.5
메이첸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선교부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교권에 진정한 복음적 선교기관이 설립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선교를 하고 정통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주저하지 않고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헌신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기를 희망했다.6 메이첸은 그로부터 4년 뒤에 독립외국선교회를 조직했다.
스피어는 메이첸의 공격에 응수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기독교적 확신이 당신의 것에 못지않게 복음적이라고 믿는다. […] 나는 우리의 선교 활동과 선교사들 또한 참으로 복음주의적이라고 믿는다. […] 복음은 말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근본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행위에 의해 선포된다”7고 하는 답변을 보냈다. 미국북장로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 선발 절차가 투명하고, 선교사들의 사역도 신실하게 수행되고 있다고 답했다. ‘사랑과 자비의 행위’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스피어는 자신이 복음주의자이며, 메이첸이 믿는 교리와 자신이 믿는 것이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메이첸이 『바울종교의 기원』(The Origin’s of Paul’s Religion)을 저술한 것에 존경을 표하고, 자신도 메이첸이 믿는 것들 대부분을 믿는다고 했다. 메이첸이 강조한 기독교 출발기에 일어난 사건들의 역사성과 초자연성과 이러한 사실들에 기초한 교리를 자신도 고백한다고 말했다. 죄와 믿음에 대한 교리, 그리스도의 위격, 삶의 체험, 변증의 필요성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런데 스피어는 오히려 메이첸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복음적 확신의 긴 목록에서 당신과 의견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내가 당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당신이 성경과 의견을 달리하는 바로 그 점들입니다. 당신은 몇 가지 중요한 성경의 진리들을 무시하거나 제한합니다. 당신의 몇몇 문단들은 성경의 명백하고 분명한 진술들에서 벗어나며 뒤틀리게 해석합니다.8
스피어는 메이첸의 신학의 문제점이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다,” “우리는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표현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십자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다”9고 했다. 그러나 스피어는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자신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는 이유와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가지는 까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스피어는 정통신앙에 대한 자신과 메이첸 사이의 토론이 ‘명분 없는 논쟁’이라고 했다. “우리가 전력을 다할 수 있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이와 같은 명분 없는 논쟁의 부끄러움과 낭비는 좀 더 좋고 좀 더 진실한 일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힘을 쓸 수 있게 할 것이다”10고 말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교회 간의 신학, 신앙고백, 교리 차이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스피어는 교회의 연합일치운동, 교단통합운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통신앙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면서도 헨리 코핀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고자 했다. 메이첸이 스피어를 일컬어 미국북장로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이라고 말한 것은, 스피어 자신이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유주의 신학에 교회의 빗장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개혁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교회의 생명과 정체성과 사활이 걸린 신학 논의를 ‘명분 없는 논쟁’으로 보고 서로 간의 힘을 더 생산적인 데 쓰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2. 스피어와 학생선교지원운동
스피어는 여러 대에 걸쳐 개혁주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11 스피어의 부친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출신 변호사이며 정치가였다. 꾸준히 성경을 읽는 장로였다. 교회에서 성경반을 가르치며,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를 드렸다.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을 암송했다.
스피어는 뉴잉글랜드의 필립스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동안 그 지역에 있는 앤도버신학교의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를 접했다. 스피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좋아했다. 프린스턴의 뉴저지칼리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그곳의 가르침이 뉴잉글랜드에서 보고 느낀 것과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여기서 듣는 설교는 아마도 옛날 장로교인들의 눈에는 좀더 정통적이겠지만 우리가 앤도버에서 들었던 것만큼 훌륭하지 않다”12고 불평했다. 스피어는 프린스톤신학교의 ‘스콜라주의적 정통신학’보다 19세기 중엽의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를 선호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라고 간주한다.
스피어는 프린스톤신학교 재학 중에 어느 전천년주의자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참된 신앙을 고백했다.13 무디 부흥운동의 결과로 태동한 학생선교지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복음주의자 무디의 경건과 개방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스피어는 이 학생신앙운동 단체의 ‘세계의 복음화’라는 강령에 감동을 받고 선교에 가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 단체의 간사로 일했다. 선교사로 지원할 대학생을 모집했다. 그가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선교에 대한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고, 선교부 총무가 된 것은 선교 분야의 재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스피어는 탁월한 연설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대규모로 끌어 모으는 동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선교사로 가거나 선교활동을 하겠다고 지원하는 1,100명의 대학생들을 모집했다. 그 일을 위해 110개의 대학들을 순방할 정도로 왕성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다.14 미국장로교 외국선교부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선교단체가 된 배후에는 스피어의 재능과 열성이 있었다.
스피어는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 총무였지만 그 교단의 선교활동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규모의 통합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초교파 학생선교운동에 뿌리를 둔 스피어의 활동경험은 범교파 선교사역과 에큐메니칼 활동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가 다양한 교리와 전통을 수용하는 에큐메니스트가 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나는 장로교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지만 장로교단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하는 데는 전혀 열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15고 말했다. 제도, 교리, 신학을 뛰어넘는 초교파 선교활동을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었다.
스피어는 학생선교지원운동을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와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대회를 주도했다. 선교통일, 교회통합, 일치운동에 큰 가치를 두었다. 미국 교회협의회(NCC)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칼빈주의 교리체계는 스피어의 교회연합과 일치활동의 걸림돌이었다. 학생선교지원운동 모임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우리가 진리체계를 설교할 것이 아니라 구원자를 설교해야 하고, 교리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많은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이라고 역설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임하였다 하였도다. 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 학생 동지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진리의 어떤 체계를 설교하지 마십시오. 진리체계가 어떤 면에서든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구원을 설교하지 마십시오. 구속을 설교하지 마십시오. 구세주, 구원자를 설교하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교리가 아닙니다. 신성한 생명의 도래입니다. 크고, 구체적이며, 잘 연결된 [교리]체계를 설명하면 우리는 확실히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실패하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우리가 단순하고 전지전능하며 저항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16
스피어는 신조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체계적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칼빈주의 전통을 경시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정통주의자도 아니었다. 칼빈주의자는 더욱 아니었다. 교회일치운동과 선교활동이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도록 그 방향을 이끌었다. 신학논쟁이 불붙었을 때에 그는 자신을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로 여겼다. 그의 사회관은 절친한 친구인 자유주의 신학자 헨리 코핀의 것과 같았다.
3.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
스피어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무시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포용주의 태도로 교회일치운동에 열정을 쏟는 것은 그가 존경하던 ‘자유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자’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의 영향 때문이다.17 부쉬넬이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수업을 할 때, 코네티컷주의 회중교회 안에는 이 대학의 신학교수 나타나엘 테일러(Nathaniel Taylor)와 베네트 틸러(Bennet Tyler) 사이에 신학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자는 펠라기우스주의를 지지했고, 후자는 칼빈주의를 표방했다.
부쉬넬은 하트포드의 어느 교회에 부임하면서 그 교회 안의 펠라기우스주의 그룹과 칼빈주의 그룹을 화해시키려고 했다. 그의 노력은 잠시 동안 양 그룹의 신학적 긴장을 잠재우고 신자들을 단합시키는 데 이바지했다.18 부쉬넬은 당대에 필요한 기독교의 핵심이 정통교리나 사변신학이 아니라 ‘영과 생명’이라고 말했다. 성현들의 지혜나 문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영과 생명이라고 했다. 교리 때문에 예수의 생명력 있는 말씀이 화석화 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부쉬넬은 조직신학이나 교리가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적 포괄성’을 자신의 신학강령으로 삼았다. ‘모든 진리’를 하나로 병합시키고자 했다. “칼빈주의가 알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알미니우스주의가 칼빈주의를 받아들이게 하자…. 좀 더 포괄적이 될 수록 우리는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며, 좀 더 많은 진리를 소유할수록 우리가 통합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19고 했다. 이러한 신학강령에 따라서 모든 교파들을 “해체시켜… 마침내 거대한 포괄적인 통합”을 이루자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리와 신학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함께 일하며 일치된 예배를 드리게 되기를 희망했다.20
부쉬넬은 교회와 교회 사이에 교리적으로 불일치하는 부분이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형식이라고 보았다. 교리는 언어의 문제이며, 비유적이므로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교조주의, 교리지상주의는 배제되어야 한다. 신조, 교리 때문에 일어나는 분파와 분열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21
부쉬넬은 사도신경이 기독교 세계의 통일에 대한 궁극적 합치점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사도신경이면 연합일치의 조건으로 충분하며 나머지 교리는 사치이다. 사도신경은 비교리적 복음의 완전한 본보기이다. 사변적이지 않으며, 순수하게 역사적이며, 교리라고 부르는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부쉬넬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실제 부활, 구속사역을 믿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제시하는 신조와 교리를 받아들였다.22 기독교의 근본 도리를 수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23를 취했다. 다양한 신학 사상을 수용하는 포용주의를 견지했다.
스피어가 교회연합운동과 선교와 관련하여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고 말 한 것은 부쉬넬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다. 그는 부쉬넬을 그리스도의 제자상(弟子像)의 모델이라고 할 만큼 존경했고, 그의 사상을 추종했다. 부쉬넬처럼 포용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펼쳤다. 그 덕분에 ‘기독교 일치운동의 사도’로 일컬어졌다.
스피어는 교리와 신조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낮게 평가했다. 스피어가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배후에는 교회일치와 연합의 토대가 교리, 신앙고백,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 역사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룩한 주”24를 거듭 강조했다.
스피어는 기독교를 ‘교리 위에 세워진 삶’ 그 이상으로 보았다. 교리와 생명을 대립관계로 본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들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능력은 인간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임재의 가능성이며 실재이다.”25 기독교의 본질은 실존적인 생명에 있다. 그리스도는 단순하고 전지전능하며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이다. 성경은 형이상학적 이론(교리)이 아닌 초자연적 생명을 제시한다. 기독교 사상의 범주, 신학체계, 교회조직은 모두 부속품이며 도구에 불과하다.26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핵심이 교리라고 보지 않고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 속에 있는 영혼”27이라고 본다. 복음은 교리가 아니라 기독교적 생활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단순하게 설교하는 것으로 확장된다고 했다.28
스피어는 교리와 복음, 교리와 그리스도를 나누었다. 학생선교지원운동, 교회통합운동, 선교통합운동의 성공적인 진보가 정통신학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포용주의가 성공의 길이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며, 그리스도만이 교회일치와 선교의 유일한 토대이며, 충분하고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 있고, 자기의 확신이 우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그들이 참여하는 연합체 안에서 진리에 대한 좀 더 크고 포괄적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자신이 믿는 것에도 결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29
스피어가 사도신경을 기독교 통합과 교회일치와 선교의 유일의 토대로 보면서 그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신앙고백공동체의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본 것은 진리가 언어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이론에 근거해 있다. 인간은 제한된 인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용어로 다 정의되지 않는다. 언어는 그것의 모호한 성격 탓에 하나님을 완전히 담을 수 없다. 따라서 특정신학으로 하나님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교리는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결함이 있다. 초자연적 진리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 어느 언어―교리도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을 충분히 서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교리를 수용하고 포용주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30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토대는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스피어는 칼빈주의(어거스틴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펠라기우스주의)가 상호 보충적으로 통일되고 완전한 신학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했다.31 정통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아우르고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신학을 모색해야 하고, 그러한 신학이 태동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고 [교리가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이 기독교 연합과 교회일치의 토대라고 보았다.
4. 일치지상주의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전달할 수 있는 완전한 그릇이 아니므로 언어로 구성된 교리가 완전할 수 없다고 하는 스피어의 언어 이론은 코핀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거듭 주장해 오던 것이다. 이 이론은 기독교의 역사성과 교리를 부정하는 데 줄곧 사용되어 왔다. 스피어는 성경의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기적능력을 단지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오번선언서’에 서명한 자들이 비록 서명을 했을지라도 그 교리들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지 않는 한 그들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32
스피어는 선교통일과 교회일치를 위해 기독교 교리를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차원이 아니라 상호 일치점을 찾고 유지하는 차원에서 다시 서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조화, 우주통일, 세계통합에 관심을 가졌다. “오늘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이다. 기독교의 중심 원리도 통일이다. 모든 삶의 근본적인 원리도 통일이다”33고 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평화가 침해당하고 민족분열이 가중되던 시대 상황에 대한 지식인의 고뇌를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스피어가 교리논쟁, 신학논쟁을 혐오한 것은 그것이 선교에 손상을 가져오고 세상의 평화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에 모범을 보이고 선교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회통합과 선교통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선교의 성공은 교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통일에 달려 있다. “모든 경쟁은 그리스도에 대한 불충성이며 모든 낭비는 세상에 대한 불충성이다. 경쟁과 파당은 형제애와 신뢰와 사랑의 정신을 가르친 그리스도와 불일치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불충성이다.”34 교회일치와 초교파 연합에 성공하기 위해 기꺼이 자파의 교리를 희생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5
스피어는 과거의 교회가 올바른 교리를 보존하기 위해 싸웠으나 갈등의 시대는 지나갔고 새 시대가 되었으므로 이제 교회는 교리가 아니라 개인의 지도력, 온건하고 열성적인 인도주의적 봉사, 위대하고 신성한 사랑의 열정으로 불신앙과 이단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36 참과 거짓은 악에 대한 교회의 진취적인 공격과 교회의 헌신적 사랑의 실현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37
스피어는 학생선교지원운동 간사로 활동하던 경험과 전쟁기간교회위원회(General War-Time Commission of Churches)라는 기구의 일원으로 활동한 경험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얻었다. 교회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대처하기 위해 연합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각 교파의 신학과 교리의 차이가 무시되었다. 스피어는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동안에 자세한 것을 따지기보다는 그가 일어나 걷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전쟁 중에 교회가 보여줄 가장 중요한 것은 싸우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스피어에게 교회일치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교회일치운동, 교파통합운동에 열광했다. ‘세계는 통일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복음은 인류통일을 암시하고 있으며, 성경은 형제애와 통합의 규범이다. 교회는 통합을 위한 실용적인 수단이다.38 기독교는 온 세상의 평등과 전 인류의 평등을 가르친다. 교회통합, 선교통합, 세계통합만이 아니라 남녀의 통합도 중요하다. 여성들도 장로, 목사, 복음전파자로 봉사하는 것이 합당하다.39 선교사들은 통합과 평등과 형제애로 뭉쳐진 ‘공화국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스피어는 이처럼 세상·남녀·교파·선교의 통일, 통합, 일치에 최대의 가치를 두었고 그것들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5. 『선교재고론』
성경에 충실한 신앙고백의 일치가 전제되지 않는 연합일치운동이 회칠한 무덤이라는 사실은 곧 드러났다. 스피어의 포용주의 에큐메니즘은 장로교단 안의 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싸움을 촉발했고,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자유주의―근본주의 논쟁은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고, 교회가 정통신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분열은 1930년에 일단의 침례교도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외국선교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사람들이 평신도 외국선교연구기관을 만들었다. 장로교단을 포함한 일곱 개의 주요 교파들의 후원과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 Jr.)의 재정 지원을 받아 종교연구소에 인도, 미얀마, 중국,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연구하도록 의뢰했다. 하버드대학교의 윌리엄 어네스트 호킹(William Ernest Hocking) 교수(위원장)를 포함한 15인 연구위원들은 미국의 외국선교운동의 방향을 제안할 목적으로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호킹이 주도하여 작성한 『선교재고론: 일백년 뒤의 평신도의 평가』(Re-Thinking Missions)40는 구자유주의 신학(Old Liberalism)의 관점으로 쓴 선교평가 보고서였다. 호킹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회중교회의 멤버였다.
『선교재고론』은 기독교의 존재의의가 어떤 특별한 역사나 교리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데 있다고 규정한다. 기독교 신앙은 현대 세속주의에 직면하여 통합된 종교 진리, 곧 다른 세계종교와 공통적인 주장을 해야 하고, 선교사의 기능이 “영적인 차원에서 세계이해를 촉진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41고 한다.
이 보고서는 복음 설교의 중요성과 교리의 가치를 반대한다. 복음화는 ‘사랑과 인간애에 바탕을 둔 봉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세계정복을 꿈꾸는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삶과 생활방식을 나타내고… 전통과 급격하게 단절되는 긴장을 극소화하려고 노력하는 대사(大使)여야 한다.”42 선교의 목적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전하는’ 것보다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더불어 진리를 찾는 데 있다. “종교들 간의 관계는 지금부터는 점차 진리를 공동으로 찾아가는 모양을 취해야 한다.”43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지 말고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44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기독교계에서조차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45 예수는 위대한 종교 교사이며 모범이며, 기독교 신앙생활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그것을 고백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하찮은 일이다.46 이처럼 『선교재고론』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기독교 교리를 통렬히 비난한다.47 거듭남을 정신적인 영향력으로 대체하고,48 그리스도의 유일성의 자리에 종교다원주의를 둔다.
이 보고서가 나오자 보수계 교회들은 즉각 반발했다.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진 미국의 주류 프로테스탄트교회 선교부들도 이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로교단 안에는 주목할 만한 논쟁이 벌어졌다. 폭탄을 터뜨린 사람은 소설 『대지』(The Good Earth)의 저자이며 나중에 노벨문학상(1938)을 수상한 펄 벅(Pearl Buck)49 여사였다. 그는 미국북장로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의 딸로 태어나 상해에서 학교를 다닌 뒤 린치버그에 있는 랜돌프메이컨대학교를 졸업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중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펄 벅은 서평에서 위 보고서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필독해야 하고, 모든 선교부가 시행해야 할 선교지침이라고 극찬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원죄 교리, 기독교의 유일성, 선교지의 기독교회 설립 필요성을 부정했다. 또한 자신에게는 신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예수가 실제로 존재한 역사적 인물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그를 믿는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역사적 실재의 중요성을 사실상 부인한 것으로 알려진다.50
스피어는 위 보고서에 대한 논평에서 연구자들의 연구동기와 포용주의 태도에 감사를 표했다. 토착교회, 선교현장의 협조, 진보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요구 등 실질적 권고사항을 담고 있다고 칭찬했다. 연구를 위해 할당한 시간의 부적절성, 선교역사에 대한 연구자들의 학습부족, 배타성과 당파심 등은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고풍스런 자유주의 신학,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종교인, 도덕교사로 보는 시각으로 쓴 책이라고 지적했다. 스피어는 “그리스도는 [여러 길 중의] 한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51이라고 말했다. 위 보고서가 기독교 일치에 해로운 영향을 주며 각 교단, 교파 선교부 사이의 우호관계를 깨뜨린다고 비판했다.
『선교재고론』은 만약 기존 선교부가 이 보고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새로운 선교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스피어는 이 점을 두려워했다. 교회통합, 선교통합, 세계통합을 이루자면 선교단체들이 분열하는 것보다는 단합하여 서로 신뢰하는 가운데 함께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목표에 도달하자면 교리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용주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스피어는 『선교재고론』의 권유에 따라 미국북장로교회의 현재의 선교활동이 선교의 유일한 토대인 그리스도에 기초를 둔 선교활동인지 재평가해야 한다고 하는 모호한 태도를 견지했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 중심의 신앙고백의 일치를 전제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선교통합과 교회통합의 유일한 기초이다’고 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메이첸은 선교부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스피어의 포용주의 태도를 비판했다. 선교부가 펄 벅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위 보고서가 담고 있는 배교적인 내용과 그릇된 신학을 충분하게 반박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52
6. 메이첸의 대응: 독립외국선교회
메이첸은 스피어가 저술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The Finality of Jesus Christ)에 대한 서평에서 이 책 어느 곳도 “성경의 초자연적인 권위에 대한 서술은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만 이야기했지 그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피어는 기독교의 역사성을 말하고 성경이 다른 종교 경전보다 전체적으로 한 등급 높다고 말하지만 칼빈주의 신학이 제시하는 교리와 성경관에 동의하지는 않았다.53 프린스톤신학자들이 강조하는 교리의 자리에 그리스도를, 실상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위치시켰다.
메이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며, 그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교리라고 말했다. 교리와 믿음의 대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현대주의 신학사조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왜곡시키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를 강조하지만 그 그리스도는 그들의 이상이 만들어낸 이념일 뿐이다. 왜곡된 그리스도를 신앙하면 그릇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교리 없는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들은 교리체계에 기초해 있고 말했다.
스피어는 반(反)신조주의자였다.54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교회연합 또는 일치의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이것은 신조의 가치를 경시하는 주장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려낸 왜곡된 그리스도를 교리, 신조의 자리에 갖다 놓았다. 포용주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신학 논쟁을 종식시키고 교회통합과 선교통합을 실현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이롭게 하기는커녕 신앙고백공동체의 정체성과 생명력을 앗아가도록 적에게 성문을 열어주는 행동이었다. 스피어는 교리 없는 기독교의 위험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포용주의가 종교다원주의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메이첸은 자신이 속한 교단의 선교부가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통신앙인들의 재정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서도 선교부가 마치 정통성을 지닌 것처럼 처신하기 때문에 정통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바친 정성어린 헌금이 자유주의 신학을 선전하는 데 전용(轉用)되고 있다고 했다. 헌금을 바친 목적에 반(反)한다고 지적했다.55
『선교재고론』이 알려지자 정통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은 자신들이 보내는 선교비가 과연 복음에 충실하게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장로교회 외국선교부가 위 선교 보고서의 교리 진술들을 정면으로 공박하지 않는 데 의문을 가졌다. 펄 벅처럼 비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는 선교사가 여전히 외국선교부에 소속되어 급료와 활동비를 받고 있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선교부가 파송한 선교사들 가운데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다.
펄 벅은 그 와중에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그러나 교회의 갈등은 그것으로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뿌리를 둔 순수한 복음에 대한 교회의 헌신을 재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교회들은 엉뚱하게도 자유주의 시각으로 작성된 위 보고서를 지지했고, 스피어의 선교활동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었다. 사람들은 신학논쟁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다. 관용이 화평의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일치운동의 흐름 속에서 교리를 경시하는 태도, 포용주의 물결, 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 만큼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이첸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선교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독립외국선교회를 조직(1933)했다. 목회자 15명과 장로 5명과 여신도 5명이 위원직을 맡았다. 장로교회의 영적 유산을 지키고, 단번에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된 영광스런 믿음의 도리를 모호함이나 타협 없이 고수, 전파하고자 했다.56 그러나 총회 관할 밖에서 시작된 이 선교단체는 교회 관료주의, 교권주의의 견고한 벽에 부딪혔다.
그 무렵, 만주에서 사역하던 한부선 선교사, 배의남 선교사 부부(의사), 평양에서 사역하던 함일돈 선교사 등은 장로교회 외국선교부에서 메이첸이 설립한 독립외국선교회로 소속을 옮겼다. 자유주의 기독교를 거부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편에 서기로 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스피어는 신학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용주의를 지향하며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데 교리를 자세히 따져 무엇하겠는가” 하고 외쳐댔다. 그는 교회가 신학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교회를 믿는 바가 분명하지 않은 종교집단으로 변질시켰다. 그가 총회장으로 봉사하는 동안에 교회는 좌경화를 고착시키는 중요한 결정들을 했다.
스피어가 포용한 자유주의 기독교는 신앙의 핵심이 윤리적 삶에 있지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종교경험을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한다. 신조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다. 성경이 제시하는 교리에 연연하는 사람을 ‘교리지상주의’라고 비난한다. 신조는 경험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고, 각자의 경험은 동등하게 중요하며, 따라서 유태인, 일본인, 인도인, 아랍인의 종교경험과 기독교인의 신앙경험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의 신조는 인간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동일한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어느 한 교리체계를 절대화하는 것은 ‘진리’에 모순되며, 반지성적인 태도라고 비판한다.57
유서 깊은 기독교는 교리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려 체계화한 것으로 본다. 기독교인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경험의 기초가 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제시한다고 본다.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본다.
스피어가 기독교 중추 교리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역행하는 자들을 포용하면서 펼치는 교회통합, 선교통합, 연합일치 운동은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한다. 교리를 경시하고 그리스도나 그의 인격에만 신앙의 초점을 맞추면서 하나됨을 말한 것은 일종의 기만이다. 교리를 희생시켜 연합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팥죽 한 그릇에 생명을 맞바꾸는 것과 같다. 연합과 일치를 위해 자유주의 기독교에 교회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적군의 입성을 돕는 것이다. 유서 깊은 기독교를 파괴할 폭탄장착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
스피어는 분열을 치유한다는 미명으로 또는 화평을 빌미로 이단보다 더 위험한 자유주의 신학에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는 개혁주의 신학자가 거짓교사보다 더 위험하고 유해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보수와 진보’가 그다지 ‘차이가 없다,’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거나 ‘서로에 대한 오해이다,’ ‘모두 다 선교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사도신경이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58고 하는 따위의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개혁주의 신학자는 자유주의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피어는 연합일치운동에 앞장 서는 복음주의 진영의 에큐메니스트들을 연상시킨다.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수용하고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하고, 신학적 다양성과 포용주의를 지향하는 인사들을 떠올린다. 몇 대에 걸친 개혁주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고, 학생선교운동의 ‘세계복음화’ 강령에 감동을 받고, 장기간 그 단체의 간사로 봉사한 것도 흥미롭다. 당대의 장로교회 안에 가장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며,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인 것도 특기할 만하다.
스피어 타입의 에큐메니스트는 자유주의자와 동일한 사상과 사고양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자신이 개혁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교리지상주의를 지탄한다. 교회의 정체성을 허무는 신학사상을 펼치면서도 신앙고백공동체의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명분 없는 논쟁으로 본다.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어떤 종교 그룹과도 연합하고 일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류의 에큐메니스트들과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기독교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음으로써 정통신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면에서 가장 공격적인 자유주의자보다 훨씬 더 유해한 영향을 교회에 미칠 수 있다. 메이첸이 스피어를 장로교단 안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은 개혁주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말하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 신학과 시류(時流)에 교회의 문을 열어주는 회색주의자와 포용주의 태도를 가진 중도파 인사들의 처신의 위험성, 해독성을 경계한 말이다.
최덕성 저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5)에서 옮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