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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번역, 립싱크보다 못한 비양심적 행위

북코치 2006. 10. 13. 13:53

대리번역, 립싱크보다 못한 비양심적 행위

<오마이뉴스>가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 의혹을 최초로 제기하면서 그동안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해온 번역출판계의 '대리번역'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다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리번역'이라는 '비양심적 행위'에 동참했던 박정혁씨의 고백이다. 박씨는 5년차 번역가로 <엠비에이 인 어 박스(MBA IN A BOX)>와 <비즈니스 내공 9단>, <성장엔진을 달아라>, <마케팅을 혁신하는 5가지 원칙> 등을 번역했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2004 오마이뉴스 남소연


[번역에 관한 안 좋은 추억1] 고스트, 그리고 립싱크

영화 <고스트(사랑과 영혼)>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짜 유령 얘기를 하려는 것도, 댄스가수들의 립싱크 문제를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번역업계의 초후진국적 관행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얘기이므로 더더욱 겉으로 드러내 공론화시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번역서를 보면 옮긴이가 무슨 무슨 대학의 교수이거나, 연구소 소장, 기업체 사장이나 임원인 경우가 눈에 많이 띈다. 이런 분들이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외국어 실력으로, 무지한 독자를 위해 번역에 임해주신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십중팔구 자기 이름만 걸고 아랫사람에게 번역시킨 거라고 보면 된다. 연구활동과 기업경영에 공사다망하신 분들이 원고지 1장당 3000∼4000원 받고 '대한민국 3대 노가다'(구슬꿰기, 인형눈깔 붙이기, 번역) 중 하나에 열중한다면 바보거나 성인군자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면 애초에 맡지를 말아야지 왜 하냔 말이다. 걔중 질 나쁜 사람들은 아랫사람에게 번역을 일임한 후, 번역료마저 착복한다.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상황이 이러니, 번역을 맡은 아랫사람들이 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작업에 임하겠는가? 결국 형편없는 수준의 번역에 의한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들에게로 간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초후진국적 관행에 동참한 적이 있다.

번역은 하지만 존재는 안 드러나는 '고스트(ghost)'

꽤 팔린 마케팅책이었다. 애초에 모대기업 산하 광고대행사의 마케팅컨설팅그룹이 번역을 시도했다가 하도 엉터리로 해놔서 1년 이상 시간을 끌다가 결국 나에게 연락이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심하게 틀린 부분들만 수정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황당한 수준이었다. 중학생 정도 수준의 번역이라면 심한 표현일까? 번역은 고사하고 해석도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책을 내겠다는 용기(?)를 낸 걸까?

그 광고대행사 직원들마다 한 장(章)씩 맡아서 한 모양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오역이 있다. 포스트 시리얼을 만드는 제너럴 밀즈라는 회사가 '플린스톤' TV 시리즈 캐릭터를 활용한 시리얼을 시장에 내놓아 성공했다. 이에 고무받아 '스머프' 시리얼을 시판했는데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말았다. 실패한 이유를 그 회사 부사장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참으로 우울하오(?)."

번역하다 말고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다. 원문은 "It's blue"였다. 스머프 시리얼이니까 당연히 파란색으로 만들었는데, 소비자들은 파란색 식품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웃다 보니 나조차 우울해지는 그런 번역이랄까? 스머프가 뭔지도 모르고 번역하다가 갑자기 'blue'가 나오니까, '아 그래, 제품이 실패해서 우울하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여간 상황이 이러하니 도저히 수정은 불가능하고 처음부터 재번역을 해야 하다고 했더니 그러란다. 두 달간 열심히 번역해서 넘겨주고 나서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출판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XX기획 마케팅컨설팅그룹은 이 책 역자로 안 나오는 거 맞지요?"

그런에 웬걸, 오히려 내 이름이 역자로 안 나오는 거란다. 이름하여 '고스트(ghost)'라는 것이다. 번역은 하지만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보다.

억울했지만 할 수 없없다. 미리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는 건 내 잘못이니까. 하지만 평소에 그토록 결명해 하던 행위(이건 분명 비난받아 마땅할 기만행위다)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말 못할 자책감이 생겼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대리번역

▲ 지난해 11월 출간된 <마시멜로 이야기> 표지. 번역자는 정지영 아나운서로 되어있다.


하물며 가수들이 립싱크를 해도 누리꾼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립싱크가 뭔가? 자기 노래 테입에 맞춰 입을 벙긋거리는 행위다. 그래도 자기가 직접 부른 노래라는 점에서, 자기가 번역하지도 않고 자기가 했다고 세상에 공표하는 비양심적 행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미국의 팝 듀오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는 앨범 녹음에도 참여하지 않고 다른 가수들이 불러준 노래에 입만 벙긋대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다가 결국 사실이 들통나서 멤버 중 한 명이 권총자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양이라는 가슴 큰 탤런트가 다른 가수 노래에 립싱크하다가 퇴출된 사례가 있다.

그런데 이런 짓이 번역출판계에서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진행되고 있다.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고스트를 써서 번역 립싱크를 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아무도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이가 없다. 이거 문제 아닌가? 우리의 정의로운 누리꾼 독자들은 이럴 때 뭐하고 있단 말인가?

이 슬프고 황당하고 기가 막힌 이야기의 마지막은 한 독자가 인터넷서점에 다음과 같은 독자서평을 남겨줌으로써 '아주 깔끔한' 희극으로 마무리해주었다.

"번역작업도 현업에 종사하는 마케팅그룹에서 해서 그런지 아주 깔끔하다."

[번역에 관한 안 좋은 추억2] <꿈의 해석>은 정말 어려운 책일까?

꿈을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 있다니…. 바로 이거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든 나는 바로 엎드려서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에 한창 목말라 맹렬한 속도로 읽던 나는 같은 내용을 두 번, 세 번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됐다. 결국 책장을 덮고 다음날 다시 꺼내 읽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아아, 중3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아직까지 이다지도 많다는 데 실망하며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꿈의 해석>은 과연 그렇게 어려운 책이었을까? 어른이 된 지금 보면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까? 대답은 둘 다 '노'다. 물론 중3 학생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하겠지만 전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같은 책을 지금 펼쳐봐도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거 지금 내가 앞뒤가 맞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문제는 번역이다. 내가 읽었던 <꿈의 해석>은 독일어 원문을 번역해 놓은 영어판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었다. 대학 다닐 때 불어 희곡 번역 숙제가 귀찮아서 국내 번역판을 찾았더니 없고 대신에 영문 번역판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잠시 기뻐했던 적이 있다. '남들이 밤새가며 불어 번역하고 있을 때 난 재빨리 영문판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제출해야지' 하는, 아주 아주 얕은 생각이었다. 확인차 불어 원문 텍스트와 영문 번역판을 비교해보다가, 난 두 책의 표지 제목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거 같은 책 맞아?

정확한 원문 번역 없이 인문학 발전 없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A라는 언어를 B라는 언어로 번역하고, B를 다시 C라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가리켜 '중역(重譯)'이라고 한다. 단언하건대, 이건 대부분 번역이 아니라 쓰레기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서양고전들 대부분이 일본어판을 번역해서 들여온 중역판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고전들, 예를 들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단테의 <신곡>,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호메로스의 <일리야드> 같은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주위에 있는가? 고전 명작이니까 그런가 보다 할 뿐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어서 아무도 읽지 않고 장학퀴즈에서 문제로 나오면 '정답!'이라고 외친 뒤 작품 제목을 줄줄이 읊을 때나 필요한 존재인 고전들….

이런 고전들에 대한 정확한 원문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인문과학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할 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돈이 안된다, (2)잘해봐야 본전, 못하면 욕 먹는다는 것이다.

이건 독자들이 나서서 능동적으로 고쳐줘야 할 문제다. 독자가 저자의 유명도에만 집착해서 책을 고를 때 특히 엉터리 번역이 많이 나온다. 경영학의 대가들 책 중에서 정작 읽고 활용할 만한 책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해가 안 간다고 해서 자신의 이해력을 탓하지 말자. 번역이 잘못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성의없거나 잘못 번역된 책을 발견했다면 인터넷서점 독자평에라도 적극적으로 올려서 그런 책을 다른 사람들이 사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피드백이 출판사나 번역자들한테 전달되어 더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 더 많아지는 것이다.

현재 출판사들은 작가의 명성에 기댈 뿐, 번역의 품질이 책의 판매 포인트(selling point)가 못된다는 판단하에 번역에 투자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소비자인 독자들이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 한, 교수의 사주(?)를 받은 대학원생이나 용돈벌이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설픈 번역은 당분간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오마이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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