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칼럼니스트

[스크랩] 사라진 우리의 원형종교와 원형문화

북코치 2006. 11. 4. 11:25
 

사라진 우리의 원형종교와 원형문화


마고지나

(cafe.daum.net/godam)


샤마니즘은 없다

우리가 샤마니즘이라고 할 때는 미신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말한다. 이때 미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점쟁이가 점을 치고 무당이 푸닥거리를 하는 주술적인 행위이다. 설사 굿을 한다고 해도 불교와 도교와 유교가 덧씌워진 굿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식자(?)의 눈으로 볼 때 남의 종교를 이것저것 끌어다 잡탕을 만들어 버린 것으로 대단히 유치하다는 평가를 내리기 십상이다.


또 샤마니즘이라는 어휘도 서양의 학자들이 한국의 토속신앙을 연구하기 이전에 이미 만든 문자이므로 우리의 토속신앙을 샤마니즘의 범주에 넣는 다는 것 자체에 무리가 따른다. 우리의 토속신앙은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자연회귀 신앙이다. 특정한 샤만이 주술행위를 하면서 자연과 대결을 벌이는 샤마니즘이 아니다. 우리에게 샤마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토속신앙과 샤마니즘은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하게 쓰고 있는 토속신앙이라는 의미 조차도 올바르게 쓰는 것이 아니다. 토속신앙을 태어나게 한 원형 종교가 이미 있는 것이다. 이 원형 종교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동이족이 향유했던 인류 최고 수준의 종교이다. 이 최고 수준의 종교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아 온 무당들에게 넘어가 오랜 세월을 타락해 온 끝에 질이 낮은 토속신앙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유한 종교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질이 낮은 토속신앙이라고 하던가, 정의가 분명치 못한 샤마니즘 정도로 이해해서는 아니 되고, 토속신앙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서 원형 종교를 찾아내어 거기에서 해답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담론의 필요성

우리의 원형 종교는 지금으로부터 14000여 년 전에 마고가 선포한 율려가 처음이고, 다음에 마고의 후예인 황궁이 마고로부터 물려받아 황궁과 유인을 거쳐 한인천제에게로 전수한 천부삼인이 두 번째이고, 한웅천왕이 한인천제로부터 천부삼인을 물려받아 선포한 태백진교太白眞敎가 그 세 번째이며, 단군왕검이 한웅천왕으로부터 천부삼인과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물려받아 선포한 덕교德敎가 그 네 번째이다. 단군왕검 이후에 덕교에서 종교의 특이한 존재양식인 굿이 발생한다. 이 우리의 고유한 종교는 상고시대의 국가체제와 사회조직과 문화에 그대로 나타난다.


마고와 황궁과 유인과 그의 후손들이 율려로 세상을 다스리던 때가 약 4801년 동안이고, 한인천제와 그의 후예들이 천부삼인으로 세상을 다스리던 때가 3301년 동안이며, 한웅천왕과 그의 후예들이 태백진교로 세상을 다스리던 때가 1565년 동안이다. 마지막으로 단군왕검과 그의 후예들이 덕교로 세상을 다스리던 때가 2094년 동안이었다. 이들 기간을 다 합하면 11761년이다. 여기에 서력 2000년을 더하면 13761년이 되므로, 마고의 생존연대를 대략 14000년 전으로 보는 것이다.


14000년이라는 년 숫자는 인간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나온 숫자가 아니고, 고대 천문학에서 나오는 숫자이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지구가 북극성을 향하여 세차운동(歲差運動)을 하는데, 지금의 지축은 지금의 북극성인 천추성을 향하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에는 당시의 북극성인 직녀성을 항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구가 직녀성을 향하여 세차운동을 하다가 극이동極移動을 하여 지금의 북극성인 천추성을 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때 지구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달이 잡아당기는 바닷물은 그대로 있다가 육지를 바닷물로 덮었고, 바닷물이 빠져나간 바다 밑에 있던 땅은 육지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천문학자는 지구가 뒤집어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바다가 된 땅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가 덮치는 바람에 거의 모두 다 바다 속 깊이 가라앉고 말았다.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 운이 좋게 살아남은 분이 마고다. 마고는 당시의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지구가 뒤집어질 때, 지구에 엄청난 재앙을 내린 별들이 있었다. 이들 별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이었다.


마고가 두려워한 것은 언젠가 또다시 지구가 뒤집어지고, 북두칠성과 해와 달이 또 다시 재앙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의 후예들에게 이점을 강조했다. 언젠가는 직녀성이 다시 북극성이 되는 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부도지符都誌에, 직녀의 염원을 ꡔ해혹복본解惑復本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해혹은 왜 우리가 그러한 우주적인 재앙을 당하야 하는가, 그 원인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고, 복본은 직녀성 시대의 마고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옛날처럼 마고성으로 다시 돌아가서 살아야 한다는 의도가 반영이 된 것이 해혹복본이라는 말이다. 이 위대한 가르침을 준 마고를 숭상하는 신앙이 삼신신앙이다. 마고를 숭상하는 신앙을 삼신신앙이라고 하는 이유는 마고가 곧 삼신이기 때문이다. 마고는 해혹복본을 잊지 말라고 돌에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새겨 후손들에게 전했다. 이것이 천부삼인이다.


그의 가르침은 여러 종족들에게 집단무의식으로 자리 잡아 북두칠성을 숭상하는 칠성신앙이 생겨났고, 해를 숭배하는 태양신앙이 생겨났고, 달을 숭상하는 달신앙이 생겨났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요한묵시록에서 지구가 뒤집어지는 때, 북두칠성이 내리는 재앙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불교는 중아함경 제7일경에서 지구가 뒤집어지는 때, 태양이 지구를 태우는 재앙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후예들이 그를 직녀의 신명에 올렸다. 그래서 우리가 상고시대 천문을 알아야만 직녀가 14000년 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상고시대 천문을 살피지 않으면 마고가 직녀성임을 알 수 없고, 그가 세상에 나타나는 년대가 14000년 전임도 알 수 없다.


이 시대는 태평양에 있던 뮤 대륙이나 대서양에 있던 아틀란티스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전한다. 「잃어버린 뮤 대륙」을 쓴 제임스 처치워드는 그의 저서에서, 뮤 대륙에 대한 기록이 인도에서 찾아 낸 가장 오래 된 명판에서 발견이 된다고 말했다.


아틀란티스의 존재는 이미 플라톤에 의하여 밝혀졌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섬으로 대서양의 어느 곳에 있었고, 높은 문화를 지닌 유토피아였다고 설명했다.

마고가 살았다는 마고 본성이 지구에 이었다면, 지금은 사라진 뮤 대륙의 어디에 인지 있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멜키지덱을 하나님이 인류의 시조로 창조했다는 아담(BC 4004출생, 6004년전)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으로 기록했다. 카발라주의자들이 아틀란티스 시대의 사람이라고 밝힌 신비에 싸인 사람이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서 6000년 동안 아담이 태어나기를 기다렸고, 아담이 태어난 이후에도 1996년 동안 아담의 후손인 노아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무려 8000년 동안 기다려 노아가 태어났는데, 그 후로도 노아의 12대 손인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를 더 기다려야 하였다. 아브라함이 세상에 나오자, 그를 제사장으로 세워, 유대교의 시조가 되게 한 사람이 멜키지덱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에는 이렇게 황당무계한 요소가 있다. 실증사학의 눈으로 종교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문화의 시각으로 종교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시대를 뛰어넘는 축시법縮時法이 있고, 공간을 초월하는 축공법縮空法도 있다. 그러니 옛날에 신선들이 단숨에 수 천리를 걸어가는 축지법縮地法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원형 종교인 율려로 세상을 다스린 율려시대를 반영한 율려문화가 있을 수 있고, 천부삼인으로 세상을 다스린 삼신시대를 반영한 삼신문화가 있을 수 있고, 태백진교로 세상을 다스린 시대를 반영한 태백진교문화가 나올 수 있고, 덕교로 세상을 다스린 시대를 반영한 덕교문화가 나올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문화에 율려문화시대가 있었고, 삼신문화시대가 있었고, 태백진교문화시대가 있었고, 덕교문화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 문화와 2000년대


우리는 지금 2000년대니, 새 천년이니, 밀레니엄시대니 하는 격이 낮은 주술에 걸려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 체계에 그러한 얄팍한 주술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1000년이라는 년도의 개념이 없는 것이다. 작년이 기묘년이니까 금년은 경진 년이고, 내년은 신사 년이 된다. 이렇게 몇 천 년 몇 만 년이 가도 그 해의 이름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 이름은 61년째 되는 해에 가서 한 번 바뀐다. 환갑이 되는 해마다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수레바퀴가 시작이 없이 끝도 없이 회전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사고체계는 이렇게 원圓과 구체球體의 개념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구는 직선直線의 개념이고, 앞서는 것과 뒤쳐지는 것의 순서가 정해져 있는 달리기개념이다. 그러므로 2000년이라고 하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2000년이라고 하는 출발선상에 서서 출발신호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승자와 패자, 일등과 꼴찌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일등은 보나마나 미국이다. 이것은 땅을 짚고 헤엄치기이다.


정치와 경제와 외교는 달리기가 가능할지 모르나 문화는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선수들 앞에서 신명 나게 굿판을 벌려 이들을 흥겹게 해 주고 서로 어우러져 승자와 패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문화이다.

이왕 우리가 서양 사람에게 이끌려 2000년이라는 출발선상에 섰으니, 편의상 우리 문화의 역사 연대를 서력으로 끊어 보기로 한다.


우리 역사는 마고년대로 하면 마고기(麻姑紀) 14000년이고, 한인년대로 하면 한기(桓紀) 9199년이고, 한웅년대로 하면 배달기(倍達紀) 5898년이고, 단군년대로 하면 단기(檀紀) 4333년이고, 한국년대로 하면 대한기(大韓紀) 52년이다. 우리의 년대 어디를 보아도 2000년대니, 새 천년이니, 밀레니엄이니 하는 것들은 끼어 들 자리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선무당들이 나타나서, 새 천년의 시대인 밀레니엄 시대에는 문화가 경제를 주도할 것이라는 사탕발림의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이 말에는 조건이 붙어 있다. 문화가 경제를 주도하려면 그 문화가 독창성이 있는 문화라야 한다는 것이다. 독창성이 있는 문화라야 상품성이 있다는 것인데, 독창성이 있다는 말은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고, 경쟁력이 있다는 말은 힘이 있다는 말이고, 힘이 있다는 말은 약한 것을 잡아먹을 수 있는 먹이사슬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문화가 다른 힘이 있는 문화에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하여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우리 문화가 사자나 호랑이처럼 위풍당당해진다는 말이다.


우리 문화가 위풍당당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단히 유리한 입장에 있다. 우선 우리의 역사가 대단히 오래 되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는 말이다. 유리의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고,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가 우리의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하면 기가 죽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문화에 경쟁력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현실은 결코 낙관적이지 못하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상 내 것이라고 내 놀만한 것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급한 문화는 한족문화와 불교문화의 아류를 뛰어넘지 못한다. 우리의 문화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도대체 내 것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소리나 춤 정도가 겨우 명맥을 이어 줄 뿐이다.


종교도 우리의 고유한 종교가 아니다. 남의 종교를 들여와서 내 것처럼 쓰고 있다. 우리의 종교는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빼면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고 만다. 무교巫敎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굿이 명맥을 이어 줄 뿐이다.


그 원인은 우리가 힘 안들이고 남의 것을 손쉽게 베껴먹는데 있다. 표절과 모방의 문화가 판을 치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남의 것을 베껴먹는 문화이다. 불교를 베끼고, 유교를 베끼고, 기독교를 베낀다. 그러면서 유구한 역사를 말하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말한다. 이러한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 우수성이라는 것은 원숭이 수준으로서의 우수성이다.



필요한 대안, 종교의 원형이 있다

이 원숭이 시대에 원숭이 문화를 가지고 오로지 문학 하나가 우뚝하게 발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극 하나만 독불장군으로 우뚝해 질 수도 없고, 음악 하나만 고고하게 판을 칠 수도 없다. 다른 문화가 문학과 어깨동무를 하고 고루 발전할 때 문학도 함께 발전한다. 그러므로 단기 4333년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기대해야 할 일, 우리가 기댈 언덕을 찾는 일은, 우리의 잡다한 모든 문화가 함께 치러야 할 홍역과 같은 것이다.


이들 문화산업은 세계화가 가장 손쉬운 업종이다. 세계화란 정체성의 모호함이다. 한국 사람이 서양 사람처럼 보여야 하고, 생각이 그들과 닮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이다. 결국 나를 허물지 않는 선에서 저들의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종교의 행태도 변한다. 종교의 행태가 변해야 살 길이 열린다. 지금은 종교들이 철옹성으로 집단화 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주식회사가 되어 버렸다. 종교백화점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신학대학교를 나오고 불교대학교를 나와야만 사제나 스님이 되는 시대는 지나가게 될 것이다. 특출한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오는 시대가 온다. 노트북을 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신부가 나오고, 목사가 나오고, 스님이 나온다. 이때는 기성의 종교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위하여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특출한 영적인 능력을 가진 자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기성종교는 개인이나 집단을 구원하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오로지 갈등을 일으키고 분열하고 전쟁을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



샤마니즘에 가려진 마고삼신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우선 도둑질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남의 것을 가지고 교묘하게 변조하여 내 것이라고 내놓은 후안무치한 작태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부도지符都誌와 한단고기桓檀古記라는 글로 쓴 두 가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이들 두 가지를 보충할 수 있는 것으로 진주소蘇씨 족보의 서문인 부소보서扶蘇譜序를 첨가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나라에서 국보로 지정하지 않은 최고의 국보가 이들 세 가지이다.


부도지는 마고시대에서 단군시대로 이어지는 우리의 문화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부도지를 통하여 율려와 천부삼인의 실체를 배울 수 있다.

한단고기에서는 인류 최초로 동이족이 가진 종교의 명칭이 두 가지나 나온다. 그 하나는 한웅시대의 태백진교요, 다른 하나는 단군시대의 덕교이다. 이들 종교는 우리가 세계 최초로 독창적인 종교를 가진 민족이며, 유구하고도 고유한 문화를 가진 민족임을 증명해 보이는 준거가 된다.


부도지는 영해박朴씨 문중 비서이다. 저자는 신라 내물왕 때 사람인 박제상(朴堤上 363~419?)이다. 그의 저작이 얼마나 위대한가는 제1장의 몇 줄만 읽어 보아도 알 수 있다.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천부天符를 받들어 모시며, 선천先天을 계승하였다. …마고는 짐세朕世에서 태어나 희노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을 남으로 하고, 후천을 여로 하여, 배우자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도지지 제1장 김은수 역 15쪽)


마고는 삼신이고, 궁희와 소희를 합하여 직녀성이라고 한다. 인간의 조상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기록하였다. 선천은 지구의 축이 극이동을 하기 전 시대를 말한다. 선천을 계승하였다는 말은 지구의 측이 극이동을 하여 후천의 세계로 들어갔으나, 선천의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이다. 선천을 남으로 하였다는 말은 선천을 양陽으로 하였다는 말이고, 후천을 여로 하였다는 말은 후천을 음(陰)으로 하였다는 말이다. 음양이 조화하여 궁희와 소희가 탄생한다. 태초의 조상이 우리 종교와 문화의 핵인 천부를 받들어 모셨다.


처음에는 햇볕만 따뜻하게 내려 쪼일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8여의 음만이 하늘에서 들려오니, 실달성과 허달성이 모두 이 음에서 나왔으며, 마고대성과 마고도 이 음에서 나왔다. 이것이 짐세이다. 짐세 이전에 율려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星辰)이 출현하였다. 짐세가 몇 번 종말을 맞이할 때, 마고가 궁희와 소희를 낳아, 두 딸로 하여금, 오음칠조(五音七調)의 음절(音節)을 맡아 보게 하였다.

(부도지 제 2장 김은수 역 22~23쪽)


우주가 창조되는 이야기이다. 우주는 8여의 음에서 창조된다. 8여의 음은 중력의 회전축에서 8방으로 뻗어나가는 중력의 회전축의 진동이다. 마고대성과 마고가 모두 중력축의 진동에 의하여 창조된다. 짐세는 선천과 후천이 교차하는 때이다. 짐세가 몇 번 종말을 맞이한다는 말은 우주에 선천과 후천이 교차하는 종말이 몇 번 있었다는 말이다. 이 기간을 거치면서 마고의 딸인 궁희와 소희가 태어난다. 이들이 율려의 오음과 칠조를 맡아 본다. 오음은 중력축의 중심에서 나는 소리이다. 극대화 하다가 수축하여 사라진다. 칠조는 이 미세해져 가는 소리가 어느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게 하는 조절기능이다. 궁희와 소희가 이 소임을 맡아 본다. 소리를 극대화 하고 극소화 하며 이를 조절하는 기능을 가진 것은 악기이다. 악기 중에서도 종과 고와 생황이다.


이 글은 신화와 철학과 신학과 천문학과 음악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마고의 신명은 직녀가 되어 직녀성에 오른다. 그리고 삼신이 된다. 마고(麻姑)의 마(麻)는 삼(셋, 삼는다)이라는 뜻이고, 고(姑)는 신의 이름(康熙字典에서 姑자 참조)이다. 그래서 마고는 삼신이라고 한다.


마고를 숭상하는 신앙이 삼신신앙이다. 조자용 선생 같은 분은 평생을 삼신신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삼신에 매달렸던 이유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원형을 찾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칠월칠석날은 삼신에게 제사 지내는 날이다. 구한국시대 말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부녀자들이 장독대에서 호박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새로 난 예쁘게 생긴 가지 오이 호박으로 제상을 차리고 직녀성을 향하여 제를 지냈다. 선비들은 눅눅해진 책들을 꺼내어 햇볕에 말렸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7월 6일 ~ 7일 사이에 북두칠성이 뜨는 동북부 거의 전역에서 칠석마츠리(七夕まっり)를 지낸다. 선대(仙臺), 고강(高岡), 양진(兩津), 대동(大東), 안성(安城) 등이 칠석마츠리를 지내는 고장이다.


마고의 위대한 점은 우리 종교와 문화의 핵인 천부삼인을 후세에 전했다는 것이다. 천부삼인은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긴 것이다. 아마 청동을 발명하면서 천부삼인을 청동거울에 새겼을 것이다. 천부삼인을 새긴 거울이 무당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이다. 지금 신당에 걸려 있는 명두를 보면 북두칠성만을 새긴 것이 있는가 하면, 북두칠성과 함께 해와 달 둘 중의 하나 만을 새긴 것이 있다. 원래 북두칠성과 해와 달 셋을 모두 새겨야 이치에 맞는다. 명두를 만드는 사람이 천부삼인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 만든 것이다.


삼신신앙은 우리의 원형 신앙이다. 그러나 우리의 원형 신앙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샤머니즘 운운하며 착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원형 신앙은 그 근원이 우주에 있다. 악귀와 싸움이나 벌이는 샤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삼신신앙이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시대에 어떻게 깊이를 더해 가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웅천왕이 인류 최초로 선포한 태백진교

한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이 여러 시대에 걸쳐 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4종을 편찬하여 한단고기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신원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 두 분이 쓴 것을 합한 것이고,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고려시대의 행촌 이암 선생이 쓴 것이고, 북부여기北夫餘紀는 고려말의 학자인 범장 선생이 쓴 것이고,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이맥선생이 쓴 것이다.


앞으로 오는 천년 동안 인간을 억압해 온 기성종교가 개혁을 당하는 때가 오고,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교단들이 해체되는 시대가 와서, 종교의 실체를 실체대로 바라볼 수 있는 때가 온다면, 부도지와 한단고기는 전 세계 인류의 필독서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부도지와 한단고기에 지상의 모든 종교의 원형이 되는 종교가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고시대를 지나 한웅천왕의 시대에 와서 한웅천왕은 나라에 종교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 종교가 태백진교이다. 이 종교가 목표로 하는 사회는 덕이 실현되는 사회였다. 덕이 실현되는 사회는 유교가 보편화 되는 사회이다. 태백진교에서 이 점을 찾아보기로 한다.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을 두고, 지구가 자전하는 이치에 합치하도록 하고, 또 사람이 하는 일을 이에 맞도록 하였다. 여기에 있어서 정치를 함은 화백에 우선하는 것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화를 꾸짖는 것 보다 착한 것이 없다.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해나가는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였다.


太白眞敎源於天符 而合於地轉 又切於人事也 是以發政莫先於和白 治德莫善於責禍 在世理化 之道悉準於天符

태백진교원어천부 이합어지전 우절어인사야 시이발정

막선어화백 치덕막선어책화 재세이화지도실준어천부


테백진교는 근본을 천부에 둔다고 하였다. 천부는 마고가 후세에 전한 천부삼인을 말하는 것으로 북두칠성과 해와 달이다. 이는 마고가 후대에게 물려준 천부삼인이 한웅천왕 대에 와서 태백진교로 체계가 섰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고를 숭상하는 삼신신앙이 태백진교로 확대되고 심화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태백진교는 땅이 돌아가는 이치에 맞도록 한다고 하였다. 이는 지축이 세차운동에 순응하듯이 하늘과 땅의 섭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인사도 또한 천부와 지구의 세차운동에 맞게 한다고 했으니, 태백진교가 추구하는 종교적인 이념은 인사에 있어서도 천부로 표현되는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해석하면서 태백진교의 내용이 천부天符와 지전地轉과 인사人事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 사상의 원천인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나온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세부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는가를 밝힌 것이다. 천지인 사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방법론이 본문에서는 발정發政과 치덕治德으로 설명이 된다. 발정은 정치를 시작하는 것이요, 치덕은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발정은 순수민주주의인 화백으로 한다. 화백으로 한다는 것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토론을 거쳐 100% 찬성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수결이란 있을 수 없다. 100% 찬성만이 필요하다. 결국 이견異見 조정의 수단으로서 끊임없는 토론을 요구하는 것이 화백의 화和이다. 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100% 찬성이다. 단 1%도 불찬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백白이다. 만약 다수결로서 소수를 무시하려 한다면 이는 화백이 아니다. 전원 찬성을 도출하기 위하여 대화와 이견조정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정치제도가 화백이다.


치덕은 책화責禍로 한다. 치덕은 법률적인 책임을 묻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재해를 당했을 때, 그 책임을 개인에게 물어서 덕을 처벌로서 구현하겠다는 것인데, 재해에 대하여 무과실책임을 묻겠다는 점이 특징이다.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 것이 자기행위 책임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자기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행위책임이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자기가 행위 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자기가 행위 한 만큼 책임을 지는 행위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현대의 형법사상의 시각으로 볼 때, 원시적인 형법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책임이란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비난을 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홍수가 나고, 한발이 드는 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나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임금이 자연재해를 당하여, "짐의 부덕의 소치로서 …운운" 하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책화를 하는 목적은 선善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선은 도덕을 의미한다. 임금이 자연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짐으로써 도덕이 실현된다고 보는 것이 태백진교의 도덕관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발정과 치덕으로 나라를 경영하고, 천지인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태백진교이다. 이를 재세이화의 도라고 하였다. 재세이화의 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천부에 맞추는 것이다. 태백진교가 추구하는 세계는 이렇게 우주의 섭리 속에 있다. 우리는 한웅천왕이 선포하고 시행한 태백진교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유교적인 가치관이 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공자가 유교를 창시하였다는 속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동이문화의 원천 천부경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지금도 전한다. 이들 경전을 태백진훈太白眞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우주의 생성과 이치를 81자에 담은 것으로, 후대에 나오는 태현경太玄經 81괘의 모체가 된다. 한단고기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 本訓은 천부경이 한인천제 때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는 귀중한 말씀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은 신지 혁덕神志 赫德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였다. 한웅천왕이 하늘에 몸소 제사 지내고 백성들에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론하니 크게 깨우치는 이가 많았다. 신라말에 최치원 선생이 신지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이를 한자 81자로 번역하여 오늘에 전하게 하였다.


천부경에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우주의 생성과 운행의 원리와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이라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리가 나와 있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천문에서 나온다. 우주의 중력축의 정점에서 나오는 힘이 하나이고, 이 힘은 셋으로 갈라진다. 갈라진 세 힘은 끝점에 가서 다시 하나로 모인다. 이를 귀일歸一이라고 한다. 축이 회전을 시작하면서 이 세 가닥의 힘은 최초의 파동에서 파장으로 이어진다. 파장은 원의 형상을 만들며 구체球體를 형성한다. 힘은 구체의 맨 밑바닥의 중심점에 가서 모인다. 이곳을 극점極點이라고 한다. 극점은 구체를 세우는 위치가 된다. 세 극점이 균형을 이루므로 구체는 쓰러지지 않는다. 극점이 중용中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점을 중용이라고 한다.


이렇게 일석삼극의 원리에 의하여 회전하는 힘의 단면은 삼태극의 형상이 된다. 삼태극의 좌측에는 양이 있고, 우측에는 음이 있으며, 양과 음 사이에는 음과 양의 힘을 조절해 주는 조정자調整者가 있다. 조정자는 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일석삼극의 원리는 역경易經에 그대로 반영 된다. 계사전繫辭傳에서 역의 육효가 진동하는 이치를 육효지동삼극지도六爻之動三極之道라고 했던 것이다. 화학의 분자식 구조에도 이 일석삼극의 원리가 지배한다. 일은 천제全體가 되고, 삼은 개체個體가 되는 것이다.


우리 선조는 이 원리에 의하여 하늘을 자미원, 천시원, 태미원의 삼원三垣으로 나누었다. 단군왕검시대에 와서는 나라를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三朝鮮으로 나누었다. 삼조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三韓이다. 삼한은 다시 삼국시대로 와서 고구려, 신라, 백제로 고착화 한다. 나라의 수도인 국도를 정할 때도 세 강물이 합수하여 삼태극을 형성하는 곳에 자리 잡았다. 서울은 한강과 청계천과 중량천이 합수하므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 선조는 3이라는 수를 이토록 숭상하였다. 그 이유는 3이 삼태극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선조는 삼태극, 일석삼극, 마고삼신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살았다. 적어도 공자의 유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러하였다.


삼태극 우주관에서 양태극 우주관을 도출한 한족

한족漢族은 우리와 다르다. 한족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黃帝, BC 2517에 帝가 된 유망과 동시대 사람)가 역사에 출현하기 전까지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동이족의 종손인 신농계열의 유망楡罔을 탁록涿鹿(탁록이 되기 전에는 청구靑丘로 불렸다)에서 아우르고, 이어서 신농을 구원하러 갔던 치우천왕과 기주冀州에서 싸워 치우천왕을 전사시킨 후에, 명실상부하게 탁록의 주인이 되면서, 동이족의 족보로부터 독립하여 화하족華夏族의 시조가 되었다. 화하족은 절치부심하며 동이족의 족보와 문화로부터 떨어져 나가기 위하여,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폄하하고 왜곡하는 작업을 대를 물려가며 해왔다. 이 작업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 공자와 사마천이었다. 그리하여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에서 독립한 한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족은 동이족의 존재 원리인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독립하기 위하여 일석이극一析二極의 원리라는 새로운 원리를 하나 만들었다. 삼극三極에서 일극一極을 빼어 이극二極을 만들었던 것이다. 음과 조정자와 양에서 조정자를 빼고 음과 양만을 택했던 것이다. 신을 빼버린 것이다. 중국의 유교가 무신론에 빠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족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동이족과 화하족을 차별화 하기 위하여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올리지 말라君子不言怪力亂神"고 하였다. 이 말은 신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말이다. 동이족이 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화하족이 동이족에서 떨어져 나가려면 동이족이 숭배하는 신을 버려야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한족의 우주관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한족은 우주의 형체가 구체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 우주의 형상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중력의 회전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족의 우주관은 중력의 회전축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주관을 중력의 회전축과 우주의 원주율과의 관계에서 찾아내지만 한족은 다만 중력의 회전축에만 한정하는 것이다.


우주관을 태일로 하였다.

(主之一太一 주지일태일) 莊子 天下


한족이 우주관, 즉 신관을 태일로 하였다는 것은 우리와 같다. 주지일主之一은 주가 되는 하나, 곧 단일신이요, 이 신이 지배하는 우주를 말한다. 단일신은 아직 삼의三儀(삼태극)나 양의兩儀(양태극)으로 분화되지 않은 태초의 신이다. 그러나 이 단일신은 우리의 신과 비교할 때 명칭만 같을 뿐이고, 그 스케일은 1/3에 불과하다. 우리는 일석삼극의 원리에 의하여 신이 있는 곳을 셋으로 나누고, 중심이 되는 최고신을 태일이라고 하였다.


상계의 주신은 천일이라고 하고, 하계의 주신은 지일이라고 하고, 중계의 주신은 태일이라고 한다.

上界主神其號曰天一 下界主神號曰地一 中界主神號曰太一 상계주신기호왈천일 하계주신호왈지일 중계주신호왈태일 (「삼신오제본기」)


우리는 천일 지일 태일 삼신을 주신으로 한다. 천일은 생수生水하는 자리에 있는 신이고, 지일은 생화生火하는 자리에 있는 신이다. 태일은 치화治化하는 자리에 있는 신이다. 태일이 치화하는 자리에 있는 신이라고 함은 태일이 삼태극을 관장하는 자리에 있는 신이라는 말이다. 천일은 물의 자리인 흑黑의 자리에, 지일은 불의 자리인 홍紅(赤)의 자리에, 태일은 치화의 자리인 황黃의 자리에 있으니, 치화란 음과 양을 다스려 조절하는 자리를 말한다. 태일이 있는 자리가 신의 자리이다. 이들 셋은 삼신이자 삼태극이다.


단군왕검은 조선의 임금으로 등극하던 해인 BC 2333년에 그의 처조부를 천일태제天一泰帝로, 장인을 지일홍제地一洪帝로 추존하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셨다. 단군왕검은 임금으로 즉위하던 날부터 천제天帝의 화신인 태일로 불렸다. (李固善의 「朝鮮紀」에서)


상고시대에 한족이 일석삼극인 삼태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생각해 낸 것이 복희가 완성한 양태극에서 양의를 도출해 내는 일이었다. 한족의 문화는 여기에서 기원한다.


태일에서 양의가 나오고, 양의에서 음양이 나온다. 만물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태일에서 만들어지고 음양으로 화한다.

太一出兩儀 兩儀出陰陽 萬物所出 造於太一 化於陰陽

태일출양의 양의출음양 만물소출 조어태일 화어음양

(「呂氏春秋」 仲夏紀)


중력의 회전축을 태일로 정한 한족은 중력의 회전축을 1/2로 나누어 양의라고 하고, 중력의 회전축이 태초의 언젠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때 최초의 파동을 음양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만물이 생성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도출한 일석이극의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중력축이 회전하는 원리로 우주의 원주율을 나누어 나온 숫자인 3이이 이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주의 원주율에서 3이라는 숫자를 찾아내고, 한족은 중력의 회전축에서 2라는 숫자를 찾아낸다는 데에서, 우리와 한족과의 사고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주역의 계사전에서는 한족이 어떻게 중력의 회전축에서 2라는 숫자를 구하는 가를 보여준다.


역에 태극이 있다. 태극에서 양의를 생하고, 양의가 사상을 생하며, 사상이 팔괘를 생한다.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 사상생팔괘

(「易經」 繫辭上傳 제11장)


역에 태극이 있다고 했으니, 역은 우주를 말한다. 우주에 태극이 있다는 말이다. 우주 안에 있는 태극은 중력축이다. 중력의 회전축을 1/2로 나누면 그것이 아직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음양, 즉 정지상태에 있는 음양이다. 이를 양의라고 하였다. 또 양의를 1/2로 나누면 사상이 된다. 또다시 사상을 1/2로 나누면 팔괘가 된다.


한족은 이렇게 중력의 회전축을 계속해서 1/2로 나누어 가며 사상과 팔괘를 도출한다. 이것이 한족이 세운 음양사상의 논리 구조이다.

그러나 우리의 음, 조정자, 양의 삼태극 논리 구조는 중력축으로 우주의 원주율을 나누어 나온다. 그래서 3이라는 숫자가 도출 되는 것이다. 계사전에 나오는 위 글을 동이족의 논리 구조에 맞도록 고치면 아래와 같이 된다.


우주에는 삼극이 있다. 삼극이 삼의를 낳고, 삼의가 육효를 낳는다.

易有三極 是生三儀 三儀生六爻

역유삼극 시생삼의 삼의생육효


삼의는 원주율을 셋으로 나오는 수인데, 이 수를 중력축의 반지름인 1/2로 나누면 6이라는 수가 나온다. 이를 6효라고 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1⇒3⇒6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水)이 6각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거나, 눈(雪)이 6각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계사상전 제2장에서 삼극이 육효를 동하는 이치(六爻之動三極之道)가 된다고 했던 것이다. 이 글은 육효가 진동하게 되는 원인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주역이 한족의 저작이 아니라 동이족의 저작이라는 강력한 시사가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우리 태극기에 그려진 양태극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한족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내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알고 산다.


덕교를 가르친 단군왕검

단군왕검시대에 와서, 단군왕검은 3이라는 숫자를 뛰어 넘어 4라는 숫자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자 주목한 것은 천부경에 나오는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이다. 운삼사성환은 3이라는 수가 우주를 한 바퀴 돌고 나면 4라는 수를 생성하여 고리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이 이치가 태양이 운행하는 길인 황도黃道를 만들고, 달이 운행하는 길인 백도白道를 만든다. 황도와 백도는 중력축의 삼태극인 삼의三儀가 운행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황도와 백도가 완성되면 거기에 4라는 수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춘하추동의 사계절이다. 이렇게 발전해 가는 우주의 이치를 원형이정이라고 한다.


원은 우주의 시작을 의미하고, 형은 우주의 운행을 의미하고, 이는 우주운행의 결실인 사계四季를 의미한다. 정은 우주가 생성하고 운행하는 원리 즉 이理를 말한다. 원형이정을 사덕四德이라고 한다. 덕교의 내용은 이 사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군왕검은 사덕을 가르치기 위하여 덕을 상징하는 떡을 만들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사상에 올리고 제를 지낸 후에 나누어 먹게 하였다. 우리가 정월 초하룻날 떡국을 끓여 먹는 이유도 떡을 잘게 썰어서 나누어 먹음으로써 덕을 고루 나누어 알게 하자는 의도였다.


경자 93년(BC 2241) …덕교는 점점 위세를 얻고 널리 퍼져나갔다.

德敎漸得偉廣 덕교점득위광 (「단국세기」 단군왕검조)



단군세기는 단군왕검이 덕교를 선포했음을 분명히 기록하였다. 덕교가 세상에 나온 때는 BC 2241년이다. 기독교가 세상에 나온 때를 AD 33 년경으로 보고, 불교가 세상에 나온 때를 BC 500 년경으로 본다면, 덕교는 기독교보다 2274년 전 불교보다 1741 년 전 세상에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원형종교의 위대함은 이런 데서 나타난다.


우리가 중국인의 저작으로 오해하고 있는 주역을 주의 깊게 살피면 단군왕검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역을 읽다 보면, 주역이 마고시대와 한웅천왕시대와 단군왕검시대의 종교와 문화와 전쟁과 제의를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머리가 혼란스러워 진다. 공자의 사상이 담긴 논어도 역시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단군왕검이 선포한 덕교를 공자 나름대로 페러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어지럽기는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상고시대의 저작물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역에서 예를 하나 들어 덕교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사덕을 한마디로 줄려 말하면 중용(中庸)이 된다. 삼극의 극점이 중용이기 때문에 삼극이 완성하여 나타난 황도와 백도와 사계의 중심을 잡아 주는 극점이 중용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중용의 덕이 됨은 지극한 것이다. 조선의 백성이 지켜 온지 오래이다.

中庸之爲德 其至矣乎 民鮮久矣 중용지위덕 기지의호

(「論語」 雍也)


위 문장을 지금까지 해석해 온 것을 보면 "중용의 덕이 됨은 참으로 지극한 것이다. 중용을 능히 행하는 자가 적었다." 였다. 그러나 이 해석이 제대로 된 해석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민선民鮮이라는 두 글자 때문에 다시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선鮮 鮮자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하여 문자학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자학이란 금문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현대 중국의 금문학자인 낙빈기(駱賓基 1919~1993)에서 시작한다. 금문은 신농神農의 문자이다. 낙빈기의 금문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받아들인 사람은 김재섭 선생이다. 금문金文에 따르면, 조선이라는 문자는 중여곤衆艅鯀에서 나온다. 중여곤은 탁록에서 황제에게 패한 유망의 후손이다. 낙빈기 선생이 밝힌 유망의 가계는 유망의 큰딸인 뉘조와 황제로 이어지고, 뉘조와 황제가 낳은 항아로 이어진다. 항아는 유망의 큰아들 희화와 혼인하여 전욱고양을 낳는다. 전욱고양은 황제의 손녀이고 소호김천의 딸인 칭과 혼인하여 큰아들 성축과 여를 두었는데, 이 두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대계(전욱고양의 동생)의 아들 중여곤을 양자로 들인다.


금문에서 밝혀진 것을 보면, 중여곤은 신농조선(필자는 막조선으로 본다)의 첫 제관이었다. 금문에서는 중여곤이라고 쓴다. "곤은 하늘의 삼신(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살펴 날을 받아 사당에 술과 차를 올려 제를 지낸다."는 뜻이다.


곤은 동양 역사상 몇 사람 안 되는 위인에 드는 분이다. 장자는 곤의 위대함을 한 마리의 물고기에 비유하여 말했다.

북명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은 곤이다.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변해서 새가 되었는데, 그 이름은 붕이다.

北冥有魚 其名爲鯤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북명유어 기명위곤 부지기기천리야 화이위조 기명위붕

(「逍遙遊」 莊子ꡕ)


이렇게 장자는 인간의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곤을 모델로 하여 위와 같은 글을 썼던 것이다. 곤鯀에서 나온 선鮮자를 적다로 풀이한 것을 장자가 보았다면 웃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선鮮자를 적다는 뜻으로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民鮮을 조선의 백성으로 해석하였다.

여기에서 또 밝혀야 할 것은 조선으로 국호를 정한 단군왕검과 곤의 관계이다. 이고선은 그가 쓴 「조선기」에서 단군왕검이 애초부터 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배달나라의 임금이 되고, 배달나라의 임금이 된 후에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다고 썼다.


경인 23년(BC 2311) 제(단군왕검)는 도읍을 길림의 서부로 옮기어 평양으로 칭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다.

帝移都于吉林之西部 秤曰平壤 改國號曰朝鮮

제이도우길림지서부 칭왈평양 개국호왈조선


단군왕검이 국호를 배달나라로 고치기 전의 나라이름은 거발한 한웅천왕에게서 나온 배달나라였다. 그는 경진원년(BC 2333)에 임금으로 등극하고, 22년 후 경인 23년(BC 2311)에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에서 조선으로 고쳤다. 그가 임금이 되면서 국호를 조선으로 고친 이유는 조선이 곤의 또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5가加였던 부족이 8가로 불어났는데, 불어난 부족이 단군왕검이 임금이 되면서 단군왕검에게 편입된 곤의 후예였다. (「조선기」 참조)


웅녀군熊女君의 후손으로서 여黎(黎는 衆艅의 또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 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이 되었다. 섭정한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을 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九桓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삼한관경본기」)


중여곤과 단군왕검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웅녀군은 웅녀의 남편이라는 뜻이다. 웅녀는 곰을 토템으로 한 집안의 후손이다. 본문은 중여곤의 외가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엔 여러 곳에 왕검王儉들이 있었다. 곤은 여러 왕검 중의 한 왕검이었다. 곤보다 후대에 태어난 단군왕검도 왕검이었다는 점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다.


검儉은 아버지 집안의 씨칭氏稱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썼던 씨칭이 검씨였다. 검儉자는 인人자와 첨僉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문자이다. 인人은 상고시대에 임금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단군왕검이 임금이 되기 전의 진짜 씨칭은 검자가 아닌 첨僉자로 보아도 될 것이다. 당시엔 백성을 여민黎民(「書經」 堯典 1장 참조)이라고 하였다. 곤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서경 요전(「書經」 堯典)에는 묘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 임금은 황제계인 제곡고신이 하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유망계인 곤이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황제계와 유망계가 번갈라 가면서 임금을 하는 것이 당시의 임금 자리 세습제도였다. 그런데 제곡고신은 임금 자리를 곤에게 물려주지 않고 그와 간적(본부인) 사이에서 낳은 지에게 물려주었다. 지는 8년 동안 임금을 하고 제곡고신과 종규(작은 부인) 사이에서 낳은 요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다. 유망계와 황제계의 약속이 파기된 것이다.

요가 임금이 된 후에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곤이 거론되었다.


첨씨들이 말했다. 곤이 있습니다.

僉曰於鯀哉 첨왈어곤재 (「書經」 堯典ꡕ


이 기록은 곤이 첨씨라는 단서가 된다. 첨씨들이 곤을 요임금에게 추천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단군왕검이 곤의 다른 이름인 조선을 국호로 하였으므로 곤의 후손이 된다는 말도 된다. 중국측의 기록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그의 사위인 우임금에게 사형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삼한관경본기에 나온 여(곤)을 보면, 곤이 사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를 왕따시킨 황제계를 피하여 어디로 행방을 감추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곤에 대하여 좀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시월상달에 지내는 고사에서 곤이 그대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고사상에는 떡시루와 북어와 타래실을 올려놓는다. 떡시루의 시루는 나라를 의미한다. 떡은 덕을 의미한다. 북어는 곤을 의미한다. 타래실은 곤의 조상 희(熙)와 곤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곤은 이렇게 고사를 지낼 때 마다 고사상에 살아난다. 고사상에 돼지머리는 올려놓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돼지는 고구려의 조상이 된 사방책봉의 토템이다. 그러므로 사방책봉의 목을 쳐서 제상에 올려놓은 것과 같은 의미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왕검이 국호를 배달나라에서 조선으로 고치고자 했을 때, 단군왕검이 곤에게 지낸 제사가 오늘날 고사로 전해 오는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고사는 수천 년 동안 내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온 의식이다.


자는 조선朝鮮의 선자이다. 이 문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오로지 조선으로 쓰기 위하여 만들어진 문자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적다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면 여기에는 정치적인 장난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주역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덕

주역에는 단군왕검과 단군왕검이 천명한 덕이 함께 나오는 괘가 있다. 천지비天지否괘가 바로 그 괘이다.


상에 이르기를 천지가 사귀지 못하는 것을 비라고 하였다. 군자는 단군왕검의 덕으로써 어려움을 피한다. 복만으로 영화롭게 되지 못한다.

象曰 天地不交否 君子以儉德†難 不可榮以祿

상왈 천지불교비 군자이검덕피난 불가영이록


이 괘는 주역에 나오는 군君子가 단군왕검의 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군자를 단군왕검의 아들檀君王儉之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검덕儉德은 단군왕검의 덕檀君王儉之德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을 해석해 보기로 한다. 천지가 사귀지 못하는 것은 천天 곧 건乾과, 지地 곧 곤坤의 불일치를 말한다. 건은 우주 전체인 원元이다. 곤坤은 우주의 일부인 천체를 의미한다. 천체의 운행이 형亨이다. 그러므로 천과 지의 불일치는 건과 곤의 불일치이고, 원과 형의 불일치이다. 이를 비否라고 하였다. 비는 곧 우주 질서의 불일치이다. 우주질서가 깨어지는 것이 우주질서의 불일치이다. 이때는 음과 양의 조화가 깨진다. 그래서 가뭄이 든다던가, 홍수가 난다던가, 태풍이 불어 닥친다던가 한다. 이런 자연재해는 태백진교에서 말하는 화禍이다.


본문에서는 화를 난亂이라고 하였다. 화에 대한 책임은 자연이 지지 않는다. 노자가 말했듯이 천지가 인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한다. 그래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은 좋든 싫든 임금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단군왕검은 임금이 자연재해에 대하여 책임을 져서는 아니 된다고 말한다. 그대신 난(難, 태백진교의 禍)을 피辟하라고 가르친다. 이 점이 한웅천왕이 태백진교에서 가르친 화에 대처하는 방법과 다르다.


태백진교는 책責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덕교는 피辟로 대처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본문은 난難, 즉 화禍를 피하는 방법으로 검덕儉德을 제시한다. 검덕은 단군왕검이 천부경에서 도출하여 완성한 사덕四德을 의미한다.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몫까지 책임을 져봐야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검덕이 책화처럼 임금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피난辟難하면, 나라에서 녹을 먹는 동안 영예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주역의 천지비괘를 해석함으로써 단군왕검이 선포하신 덕교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주역은 이렇게 덕교의 심오한 의미를 감추고 있다.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주역을 읽었다고 해도 검덕의 의미는 찾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주역을 해석해 온 사람들이 검덕을 단군왕검의 사덕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ꡔ검소한 덕ꡕ으로 만 해석을 한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주역은 단군왕검과 단군왕검이 선포한 덕교가 함께 살아 있는 은둔처이다.


굿이 생겨나다

굿은 한국桓國시대의 역사, 종교, 철학, 사상, 문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대단히 훌륭한 말이다. 그 어원은 구사천(丘 …事天)과 구사지(丘 …事地)에서 나온다. (康熙字典 참조) 구丘자는 청구조선靑丘朝鮮의 구丘자이다. 나라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라에서 굿을 하는 제사 터를 의미하기도 한다. 강화도 마리산과 같은 곳이 상고시대의 굿터였다.


굿터에서는 원형이정의 이利를 기리는 행사를 한다. 이利는 덕교의 사덕 중에서 세 번째이다. 宇宙의 운행이 시작되면서 생겨나는 결과가 바로 사덕이다. 사덕의 결실은 춘하추동 사계이다. 이 사덕을 기리는 행사가 바로 마지굿이다. 봄에는 춘분마지굿을 하였고, 여름에는 하지마지굿을 하였고, 가을에는 추분마지굿을 하였고, 겨울에는 동지마지굿을 하였다. 사계의 길일吉日에 마지굿을 하는 것은 그 차제가 하늘과 땅(元과 亨)을 공경하는 일이 된다.


우리가 굿을 하였다는 것은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이라는 문자를 풀어보아도 알 수 있다. 영고迎鼓는 ꡔ북을 치며 맞이한다ꡕ는 뜻이므로, 여기에서 마지굿을 도출할 수 있다. 부여에서 춘분, 하지, 추분, 동지에 마지굿을 하였음을 영고라는 문자가 말하고 있다.


무천舞天은 ꡔ하늘을 향하여 춤을 춘다ꡕ는 뜻이므로, 무무舞巫를 말하는 것이라 이 역시 굿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상고시대에 굿을 할 때는 털이 긴 하얀 소를 잡아서 쇠꼬리로 깃발을 만들었다. 이 깃발을 모旄라고 한다. 임금이 무무가 되어 모를 들고 춤을 추었다.


그래서 우리의 속담에 ꡔ쇠꼬리를 잡은 놈이 임자ꡕ라는 말이 생겨났다. 임자壬者란 임금을 말한다. 일을 맡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상고시대엔 맡길 임壬, 任자를 임금 왕王자와 같은 뜻으로 썼다. 풍물패들을 이끌어가는 상모의 벙거지에는 모旄가 달려 있다. 모를 단 사람을 상모上旄라고 한다. 풍물패의 풍물風物은 풍이風夷에서 나온 것이다. 풍이는 풍주風州에서 한국을 개국한 한인천제의 부족을 말한다. 풍물은 이들 부족의 풍속과 문물, 즉 풍이의 문화이다. 따라서 풍물패가 쓰이는 용도가 굿이었을 것이고, 풍물패는 풍백風伯이 이끄는 굿패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동맹東盟은 문자를 풀어 보면, 동쪽을 향하여 해日와 달月에게 제물을 차리는 제기皿를 진설한다는 의미이니, 이 역시 일월성신마지굿을 하기 위하여 차리는 제물이라, 칠성마지나 해마지나 달마지를 하기 위하여 차린 제물로 볼 수 있다.

우리 조상 중에서 누가 제일 먼저 제사를 지냈을까? 그리고 제관은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산해경山海經에 실려 있다.


천제天帝가 수해豎亥에게 명하여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걷게 하였는데, 5억10만9천8백 걸음이었다. 수해는 오른 손에 산算가지를 잡고 왼손이 청구靑丘의 북쪽을 가리켰다. (「산해경」)


위 글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천제인데, 한인천제가 중원을 다스렸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9천여 년 전이므로, 당시에 중원 땅에서 천제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한인천제 한 사람 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수해豎亥이다. 그의 이름 수해에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의 이름 수豎자를 파자하면 신臣, 우又, 두豆자가 된다. 臣자는 천제의 신하라는 뜻이고, 又자는 또 라는 뜻이고, 豆자는 제물을 담는 제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豎자만 보아도 그가 천제의 신하로서 제사를 관장하는 제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낼 때 豆에는 어떤 제물을 담았을까? 그의 이름 해亥자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 해亥는 동지마지굿에 올리는 검은 돼지이다. 검은 색은 겨울을 의미하고, 해는 떠오르는 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자 해자가 순수한 우리글임을 알 수 있다.


단군왕검시대까지는 원형이정인 사덕을 바르게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마지굿을 하였다. 그러나 단군왕검이 돌아가시고 나서 단군청배굿이라는 새로운 굿이 생겼다.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태자가 2대 단군인 부루단군이 되면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단군청배굿을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에 단군청배굿이 추구하고자 했던 최고의 덕목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화해동심和解同心이었다. 또한 군신간의 화해동심, 단군왕검과 백성들 간의 화해동심도 추구하였다. 오늘날에도 무당은 어느 굿거리에서나 화해동심을 구연한다. 몇 천 년 세월이 흘렀어도 화해동심을 잊은 적은 없었다.


조선조(李氏)말에 만든 「무당내력巫黨來歷」(규장각 소장)은 단군청배 굿을 제석거리, 대거리, 감응청배, 별성거리, 성조거리라고 하였다. 단군청배굿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여자였다. 무당내력이 이 점을 밝혀 준다.


상원 갑자 10월 3일 신인이 태백산에 내려오시어 신의 가르침을 설하고, 백성을 가르쳤다. 큰아들 부루가 어질고 다복하여 집집마다 땅을 택하여 단을 쌓고, 질그릇에 벼와 곡식을 채워 짚으로 영을 짜서 덮는다. 부루단지扶婁壇地, 업주가리業主加利라고 하였다. 매년 시월에 햇곡식으로 채운다. 떡과 술과 과일을 바쳐 기도한다. 기도할 때는 반드시 나이 든 여인을 쓴다. 무당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불가에서 이르기를 신라 중엽에 함양지방에 법우法雨화상이 있어, 여인 8명을 팔도에 나누어 보내어 무당을 삼았다고 한다. (「檀君」 작자미상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 글은 작자가 단군세기 부루단군 무술 58년(BC 2183)조에서 인용하여 기록한 것이다. 부루단지와 업주가리는 요즈음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새마을사업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농가에서 더러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부루단군이 돌아가시면서, 제 3대 가륵단군이 즉위하던 그 해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부루단군을 추모하며 그를 신격화 하여 모신 것이 부루단지이다. 놀랍게도 이 나라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부루단지를 집안에 두었다.


우리나라 무당 역사의 기원이 바로 이 부루단지에서 시작한다. 부녀자들이 부루단지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 조상의 신명이 내려 무당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무당내력은 이 부분을 훼손한다. 불교에서 무당이 나온다는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늘어놓았으니 그리 말하는 것이다. 부루단지가 생기기 시작한 때는 BC 2183 년경이다. 그때 벌써 무당이 나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라 중엽에 불가에서 무당이 나왔다고 했으니,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속에 법우화상이 등장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법우화상에서 법法자와 우雨자를 따로 떼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단군조선 초기에는 굿을 관장하는 관직에 우사雨師나 풍백風伯이 있었다. 본문에서 법法자는 사師자나 백伯자를 바꾸어 쓴 것으로 보인다. 법우는 우사를 바꾸어 쓴 것으로 본다. 신라도 잘못 된 기록이므로 단군조선으로 바로잡는다. ꡔ법우화상이 무당 8명을 8도로 나누어 보냈다ꡕ는 기록도 엉터리이므로, 풍사가 무당 8명을 8도로 나누어 보냈다"는 말로 바꾸어 쓴다. 함양지방을 빼기로 한다. 이렇게 바로잡으면 "단군조선시대에 풍사가 무당 8명을 8도로 내려보냈다"는 진짜 무당내력이 밝혀진다.


중국과 북한이 변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와 종교는 심히 왜곡되어 있고,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손상되어 있다. 그 원인은 우리의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무분별하게 수입해 쓴 때문이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왜곡과 손상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유교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정신과 사상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는 이제 몸이 걸레가 된 창녀 꼴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의 창창한 천년을 이 상태로 간다면 인류 역사를 처음 시작한 동이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필자가 소속한 한배달역사천문학회 회원들이 1999년 6월 5일에 탁록에 갔을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중국이 탁록에 귀근원(歸根苑)이라는 거대한 사당을 이룩하고, 그 안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라는 당집을 짓고, 당집 안에 치우, 황제, 신농(유망) 세분을 나란히 모시고, 나라에서 이분들을 중국의 시조로 모시고 제를 올리고 있었다.


90년대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황제만을 조상으로 모시며 스스로 황제의 자손(黃帝之孫)이라고만 해 왔다. 그 역사가 5천 년이었다. 그들은 황제가 동이족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치우와 신농을 동이족이라고 하여 자기들의 조상으로 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90년대 초에는 그들의 이런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 다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之孫)이라고 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한족의 족보를 동이족의 족보로 바꾼 것이다. 지금 중국 땅에는 동이족이 정체성을 상실하고 소멸하여 자기가 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에 한족의 조상이 동이족의 족보를 버리고, 한족이라는 새로운 족보를 만들었는데, 진짜 족보인 동이족의 족보를 찾았다고 떠들어대는 웃지 못 할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조문화(三祖文化)를 국가적인 담론에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심한 우리는 왜 중국이 그렇게 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단군왕검의 조상은 신농이고, 신농의 조상은 한웅천왕인데, 중국이 신농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결국 중국이 한족임을 포기하고 동이족으로 원시반본을 한 것이 아닌가.


중국이 삼조를 조상으로 모시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모르긴 해도 아마 삼태극사상으로의 회귀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만 중국의 5천년 역사가 14000년 전의 마고문화시대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황제에게 말목이 묶여 있는 한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인류에게 천부를 가르친 마고삼신에게는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삼태극사상은 음양조화의 사상이다. 그 철학적인 근거는 천부경의 일석삼극에서 나온다. 이를 천부경의 운삼사성환에서 사덕으로 발전시킨 단군왕검은 원형이정과 중용이라는 유교의 기초를 세웠다. 주역에는 첫 괘인 건위천괘와 두 번째 괘인 곤위지괘와 세 번째 괘인 수뢰준괘의 머리에 사덕인 원형이정을 올려놓았다. 누가 이일을 하였을까? 이 일을 한 사람은 단군왕검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주역을 덕교의 경전으로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서 생긴다.


황제의 후예들이 추구해 온 사상은 음양조화에서 조화를 빼버린 음양사상이다. 음양사상은 조화를 빼버렸으므로 분열을 일으키고 갈등을 유발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덕인 원형이정은 나오지 않는다. 양태극사상의 한계점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중국이 이를 깨달은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이제는 북한조차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 평양에 단군릉을 복원한 것이 이를 말하고 있다. 북한은 개천절을 환원하고 나라에서 단군왕검에게 제사도 올린다고 한다. 풍문에는 문익환 선생이나 안호상 선생이 조언하여 북한에서 단군능을 복원했다고 하는데, 나는 북한이 그 분들의 충고를 들어서가 아니라, 중국의 변화를 일찍 감지한데 원인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중국이 신농과 치우를 자기의 조상으로 선언했다고 해서 이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의 뿌리가 거기에 있으니까 누가 시비를 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크게 반성해야 한다. 밀레니엄시대를 떠들어대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중시조들과 그의 후손들이 저질러 온 역사에 대한 반역과 죄악을 우리 시대에 반성하고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대로 나가다가는 아마 우리의 정신과 사상은 중국사람이 되어 있거나, 일본사람이 되어 있거나, 미국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이제 글 쓰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차라리 포장마차에 앉아서 소주나 마시며 문학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다. 끝


출처 : 솟대
글쓴이 : 소도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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