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다물이념
Ⅰ. 서론
고구려는 비록 한반도와 만주를 통합한 통일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동북아시아에서는 가장 강성한 국가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는 건국한 뒤부터 멸망할 때까지 주변의 국가들과 계속해서 전쟁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전쟁은 단순히 영토확장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는 초기에 그 주변에 있었던 소국들을 병합함으로써 그들의 전쟁 성격이 영토확장에 있는 듯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영토가 확보되고 국력이 충실해진 뒤부터는 지금의 요서(遼西)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여 중국의 서한(西漢) 및 그 뒤를 이은 동한(東漢)과 계속 충돌하였다. 서한과 동한은 중국의 통일제국으로서 이제 성장해 가는 고구려로서는 힘겨운 전쟁 상대였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이들 제국과 전쟁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중국이 분열되고 중국의 북부에 이민족들이 침입하여 단명의 황조(皇朝)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중국의 동진(東晉) 시대와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혼란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중국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중단하고 남쪽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로 진출 방향을 바꾸었다. 고구려의 전쟁이 단순히 영토확장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면 중국이 혼란했던 시기에 이를 침공하는 것이 고구려로서는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유리한 상황을 외면하고 고구려는 전쟁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것이다. 고구려가 그러한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을리 없으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대외전쟁이 단순히 영토확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고구려의 건국이념이나 기본정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단순히 전쟁 기록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고구려 기본정책의 일면을 고찰하는 것이 될 것이며, 고조선의 뒤를 이은 열국 시대에 한민족이 지니고 있었던 의식의 일부를 확인하는 작업도 될 것이다.
Ⅱ. 고구려의 지반구축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나라를 세운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은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는데, 맨 먼저 통합한 나라는 송양왕(松讓王)이 다스리던 비류국(沸流國)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원년조에,
왕은 비류국 중에 채소의 잎사귀가 흘러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사냥을 하면서 찾아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국왕 송양이 나와보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바다 귀퉁이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를 얻어보지 못하다가 오늘 의외로 서로 만나보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에 왕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데 이곳에 와서 모처(某處)에 도읍하였다"고 했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기서 여러 대에 걸쳐 왕으로 있었지만 땅이 좁아 두 임금을 섬기기는 어렵겠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지 며칠 되지 않으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말에 왕은 분노하여 그와 시비를 하다가 또한 서로 활쏘기를 하여 재주를 시험해보니 송양이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에 (비류국 왕) 송양이 나라를 들어와 항복하자 (왕은)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그곳의 주(主)로 삼았다. 고구려 나라말에 옛 땅의 회복을 다물(多勿)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이 내용으로 비류국이 고구려 건국 다음 해인 서기전 36년[추모왕 2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기록들은 또 고구려의 기본이념을 알게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 있다. 쳣째로 추모왕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고, 둘째로 고구려는 비류국이 있었던 곳을 다물도(多勿都)라 명명하였는데 다물(多勿)이란 고토회복의 뜻을 지닌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류국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 아니었다.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원래 고구려는 고조선의 서부인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거수국이었는데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만조선이 서고 다시 그곳에 서한의 군현(郡縣)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영토를 잃은 고구려인들이 한때 부여에 의탁해 있다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요동(遼東) 지역에서 서기전 37년에 고구려를 재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 건국된 고구려의 이웃에 있었던 비류국은 이전에 고구려의 영토에 포함된 적이 없다. 비류국은 처음부터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고구려와는 그 지리적 위치와 크기는 달랐지만 대등한 지위에 있었는데 고조선이 붕괴된 뒤 독립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비류국을 병합한 뒤 그 이름을 고토회복을 뜻하는 다물도(多勿都)로 바꾸었다. 고구려가 그의 영토인 적이 없는 비류국 지역을 다물도라 명명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류국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비류국을 병합하고 그곳의 이름을 다물도라 했다면 그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하겠다는 이념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병합한 뒤 그곳에 고토회복의 의미를 지닌 다물도라 명명했을 것이다.
그러한 고구려의 뜻은 추모왕이 자신을 천제(天帝)의 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 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조선에서는 통치자를 단군이라 하였는데, 단군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추모왕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고조선의 단군과 동격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기이〉 고구려조의 저자 주석에는 추모왕(주몽왕)은 단군의 아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대의 전설에서는 후손을 아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추모왕은 고조선의 단군 후손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추모왕으로 하여금 자신은 하느님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고조선이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재건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뒤 고조선이 영토회복만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통치질서와 천하질서까지 재건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류국이 고구려 건국 2년 만에 첫 번째로 병합된 나라였다는 점은, 이것이 고구려의 국시(國是)였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추모왕은 서기전 32년[추모왕 6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백두산] 동남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서기전 28년 11월에는 부위(扶尉)을 시켜 북옥저(北沃沮)를 멸하고 두 곳을 모두 성읍(城邑)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기전 9년[유리왕(琉璃王) 11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속국을 만들었다.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던 고구려는 서기 12년[유리왕 31년]에 중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서한 왕실의 외척이었던 왕망(王莽)이 정권을 찬탈하여 국호를 신(新)이라 고치고 유가이론(儒家理論)에 맞는 나라를 만들고자 개혁을 단행하였고 주변의 이민족을 하대하였다. 고구려와 왕망의 충돌은, 왕망이 흉노를 치기 위하여 현토군(玄菟郡)의 고구려현 사람들을 군사로 동원하였는데 이들이 서한의 국경 밖으로 도망하여 고구려국으로 옴으로써 일어났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전에,
왕망(王莽) 초에 구려(句驪)[고구려]의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 사람들이 그것을 하고 싶어하지 않자 강압적으로 그들을 보냈더니 모두 국경 밖으로 도망하여 (중국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은 장수 엄우(嚴尤)에게 명하여 그들을 추격하도록 하였는데, (엄우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꾀어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그의 목을 베어 장안(長安)에 전달하였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高句驪) 왕(王)의 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驪) 후(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관한 기사가 《한서(漢書)》〈왕망전(王莽傳)〉과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유리왕 31년조에 실려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구려(句驪)의 병사가 우리 병사로, 흉노(匈奴)는 호(胡)로, 구려후(句驪侯) 추(騶)는 장수 연비(延丕)로 기술되어 있으며 맥인(貊人)에 대해서는 표기하지 않았지만 문맥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인용문 내용을 왕망이 지금의 요동에 있었던 고구려국의 군사를 동원했던 것으로 인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독립국이었던 고구려의 군사를 왕망이 동원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않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구려(句驪)를 우리 병사라고 표현한 것은, 편찬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잘못 이해했거나 또는 그들이 현도군의 고구려현에 거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자신들과 동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는 왕망의 침략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해 서기 14년[유리왕 33년]에 조이(鳥伊)와 마리(麻離)로 하여금 신(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서쪽의 양맥(梁貊)을 쳐서 병합하게 하고 신(新)의 현도군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당시에 고구려현은 지금의 요하 서부연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시기에 이미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동이열전〉 동옥저전에, "(서한)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는데, 후에 이맥(夷貊)이 침략하므로 군(郡)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고 한 기록은 고구려가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차지할 때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서기 26년[대무신왕 9년]에는 지금의 압록강 상류유역에 있던 개마국(蓋馬國)과 구차국(句茶國)을 병합하였으며, 서기 32년[대무신왕 15년]에는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최씨 낙랑국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한편, 동한에 사신을 보내 화해하였다. 그리고 서기 37년[대무신왕 20년]에는 최씨 낙랑국을 병합하였다. 고구려는 아직 국력이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한에 대해서는 화친하는 척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성장을 동한이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고구려가 강대국이 된다면 동한으로서는 동쪽에 위험한 세력을 두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한은 바다 건너 대동강 유역을 침략하여 최씨 낙랑국의 재건을 도왔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의 군사와 교역의 교도보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동한의 전략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최씨 낙랑국 사람들은 그들의 조국을 멸망시킨 고구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므로 그곳을 치는 것이 비교적 쉬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곳에 최씨 낙랑국을 부활시켜 동한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 나라를 고구려의 배후에 두고 고구려의 성장을 견제하자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당시까지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고구려의 주변, 즉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는 국가나 세력들을 병합하여 그 지반을 구축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그 지반이 어느 정도 확고해지면서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적극성을 보이게 된다.
Ⅲ. 고구려의 요서수복
고구려는 기본적인 지반(地盤)을 다지고 있었던 시기에는 서쪽의 대국인 서한이나 동한이나 가능하면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한으로서는 고구려의 성장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서기 49년[모본왕(慕本王) 2년]에 동한의 우북평군(右北平郡), 어양군(漁陽郡), 상곡군(上谷郡), 태원군(太原郡) 등에 쳐들어갔는데, 동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제동(祭彤)이 화친을 원하므로 다시 국경을 정상화시켰다. 당시에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등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북경 주변 지역이었고, 태원군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로서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황하가 가까운 곳에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고구려는 지금의 북경을 넘어 동한 영토 깊숙이 진출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후에 고구려는 북경 동쪽에 있는 난하 유역에서 동한과 전쟁을 한 것으로 보아 동한과 화친을 약속하면서 태원(太原)까지 쳐들어갔던 군사를 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태조왕(太祖王) 때부터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지반 확장에 나서 지금의 요하 동쪽은 물론 요서 지역 확보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서기 55년[태조왕 3년]에는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동한의 침략에 대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동옥저를 멸하여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동쪽은 동해에 이르고 남쪽은 살수(薩水), 즉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서기 68년[태조왕 16년]에는 갈사국(曷思國)을, 서기 72년[태조왕 20년]에는 조나국(藻那國)을, 서기 74년[태조왕 22년]에는 주나국(朱那國)을 병합하였다. 동옥저는 지금의 함경도에 위치했고, 갈사국, 조나국, 주나국 등은 지금의 요하 동쪽의 만주에 있었던 나라들이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나라들을 모두 병합함으로써 서쪽은 지금의 요서 일부를 포함하고 남쪽은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남만주 일대에 걸친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력의 기초를 튼튼히 한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방에 진출하였다. 서기 105년[태조왕 53년]에 고구려는 동한의 요동군[지금의 난하(灤河) 하류유역]에 쳐들어가 여섯 현(縣)을 약탈하였으나 요동태수 경기(耿夔)에게 폐하였다. 그러나 서기 118년[태조왕 66년]에는 예맥(濊貊)과 더불어 현도성에 쳐들어가 낙랑군의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서방 진격은 자연히 동한과 격전을 가져왔으며 전쟁 규모도 확대되었다. 서기 121년[태조왕 69년]의 전쟁은 그러한 상황을 말해준다. 이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태조왕(太祖王)) 69년 봄에 (동)한((東)漢)의 유주자사(幽州刺使) 풍환(馮煥), 현토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濊貊)의 거수(渠帥)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갔다. 왕이 아우 수성(遂成)을 시켜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풍환과 요광을 맞아 싸우도록 하였는데, 수성이 사람을 보내 거짓 항복하니 풍환(馮煥) 등은 그것을 믿었다. 수성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동시에 몰래 군사 3천여 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붙잡아왔다. 4월에는 왕이 선비(鮮卑) 8천여 명과 더불어 (요동군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부하)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채풍을 위해 몸으로 막다가 모두 진중에서 사망하니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다음 해에도 고구려는 마한, 예맥의 군사와 더불어 요동에 쳐들어갔으나 부여가 원병을 보내 동한을 지원하므로 실패하였다. 이때 부여가 동한을 도운 것은 고구려가 성장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서기 146년[태조왕 94년]에 고구려는 동한의 요동군 서안평현에 쳐들어가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붙잡았다.
서기 147년부터 164년까지의 차대왕(次大王) 시대에는 국내 정치가 문란하여 서방으로 진출하는데는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의 신대왕(新大王) 시대[서기 165~178년]까지 영향을 미쳐 고구려는 동한과 관계에서 낮은 자세를 취하였다. 서기 168년에 동한의 현토태수(玄菟太守) 경임(耿臨)이 침략하여 고구려군 수백명을 죽이니 고구려는 동한에 항복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동한의 현토군(玄菟郡) 관리 공손도(公孫度)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자 고구려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기 172년[신대왕(新大王) 8년]부터는 고구려에 유리하도록 상황이 호전되었다. 이 해에 동한은 대군으로 고구려를 쳐들어왔는데, 고구려는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들이 지쳐 돌아가자 명임 부(明臨 夫)가 수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뒤를 추격해 동한의 군사를 대파하여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서기 184년[고국천왕(故國川王) 6년]에는 동한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왕자 수( 須)가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므로 왕이 친히 정예 기병을 이끌고 가서 좌원(坐原)에서 동한군(東漢軍)을 격파하였다. 이 전쟁에서 잘려나간 동한군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동한 말기인 서기 197년[고국천왕 19년]경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황건농민군(黃巾農民軍)의 봉기와 군웅할거(群雄割據)가 계속되어 사회가 혼란하자 고구려로 망명오는 동한인(東漢人)들이 매우 많았으며, 서기 217년[산상왕(山上王) 21년]에는 동한의 평주인(平州人) 하요(夏瑤)가 1천여 호의 동한인들을 이끌고 투항해 왔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책성(柵城)에 살게 하였다.
서기 220년 중국에서는 동한이 멸망하고, 위(魏), 촉한(蜀漢), 오(吳) 세 나라가 분립한 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위(魏)가 중국의 북방을 차지하고 있어 고구려는 자연히 위(魏)와 가까이 있게 되었다. 고구려와 위는 서로의 관계에 매우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234년[동천왕(東川王) 8년]에 위(魏)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는데, 2년 뒤에 서기 236년에는 중국 남부의 오(吳)도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오(吳)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에 보내고, 다음 해에는 위(魏)에 연호의 개칭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가 위(魏)와 화친관계를 갖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음을 알게 해준다.
서기 338년에 고구려는 주부(主簿)와 대가(大加)에게 군사 1천명을 주어 위(魏)가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치는데 도와주었다.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서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 고조선 영토 수복을 주요한 정책의 하나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요동지역에 공손씨(公孫氏)와 같은 독자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위(魏)의 공손연 토벌을 도와준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 지역을 위(魏)가 차지하도록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서기 242년[동천왕 16년]에 고구려는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쳐들어가 위(魏)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고구려가 위(魏)의 영토로 진출하는 것을 위(魏)로서는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서기 246년[동천왕 20년]에 위(魏)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고구려의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여명을 이끌고 나가 이를 맞아 싸워 결국 승리를 하였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동천왕은 처음에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위(魏) 군사 3천여 명을 목베었고 또 양맥(梁貊)의 계곡에서도 3천여 명을 목베거나 사로잡았다. 이러한 승리로 고구려군은 자만에 빠졌다. 반면에 위(魏) 군사는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 결과 고구려군 1만8천여 명이 전사하기에 이르렀고, 관구검의 군사가 환도성(丸都城)을 치니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계략을 꾸며 유유(紐由)로 하여금 음식을 가져가 위(魏) 장수를 접대하다가 찔러 죽이게 하고 이때를 이용하여 일시에 위(魏) 군사를 치니, 그들은 낙랑군을 거쳐 도망하였다.
고구려는 이렇게 서쪽으로 진출을 기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쪽의 신라를 제어하려고 노력하였다. 고구려는 서기 245년[동천왕 19년]에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신라는 이에 대항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3년 뒤인 서기 248년[동천왕 22년]에는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서기 259년[중천왕(中川王) 12년]에는 위(魏) 장수 위지해(尉遲楷)가 쳐들어왔는데, 중천왕은 정예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워 양맥(梁貊)의 계곡에서 이를 격파하고 적군 8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서기 280년[서천왕(西川王) 11년]에는 신( 愼)이 고구려에 침입하여 변방의 주민들을 죽였는데, 고구려는 장수 달가(達賈)에게 군사를 주어 그 추장을 죽이고 그들의 6백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조천(鳥川)으로 옮겼으며, 숙신의 6, 7개 부락한테 항복을 받아 부용(附踊)을 삼았다.
서기 3세기 말경에 이르러 중국의 서진(西晉)은 외척이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8왕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정권 내부가 몹시 혼란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중국 북쪽에 거주하던 이민족들은 세력을 키워 중국 북부로 진출하고자 했는데, 그 가운데 동북 지역에선 선비(鮮卑)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비의 모용외(慕容廆)가 서기 293년[봉상왕(烽上王) 2년]과 296년[봉상왕 5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패하고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다.
서기 304년에 이르러 저족(氐族)이 중국 북부에 대성(大成)을 건국한 것을 시작으로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저(氐), 강(羌) 등의 이민족들이 중국이 북부에 16개나 되는 단명의 정권들을 세워 교체가 거듭되는 혼란기가 계속되었다. 고조선의 옛 땅인 지금의 요서 지역의 탈환을 위하여 노심초사해온 고구려로서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천왕은 과감하게 서진정책(西進政策)을 폈다.
미천왕(美川王) 3년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현토군(玄菟郡)에 침입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平壤)으로 옮기었다.
미천왕(美川王) 12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쳐서 이를 차지하였다.
미천왕(美川王) 14년 겨울 10월에 낙랑군에 쳐들어가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미천왕(美川王) 15년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에 쳐들어갔다.
미천왕(美川王) 16년 봄 2월에 현토성(玄菟城)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획득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구려는 서기 302년[미천왕 3년]에 현도성 공격을 시작으로 서기 31년[미천왕 12년]에는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차지하였고, 서기 313년[미천왕 14년]에는 낙랑군을 침공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대방군에 쳐들어갔고, 그 다음 해에는 현도군을 격파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지금의 난하 유역까지 고조선 옛 땅을 환전히 수복하였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이때의 고구려가 서쪽과 남쪽에서 전쟁을 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전혀 방향이 다른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한다는 것은 전략상 매우 무모한 것이다. 고구려가 그러한 무모한 전쟁을 했을리가 없다. 위에 인용된 내용들은 당시에 고구려가 같은 지역에서 계속 전쟁을 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미천왕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을 하면서 서로 인접해 있었던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등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다.
미천왕은 서기 319년과 320년에도 자주 군사를 보내 요동군을 침공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 지역은 원래 고조선 영토였고, 요동군은 진제국(秦帝國) 이래 중국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을 차지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던 것이다.
Ⅳ. 고구려의 천하질서
고구려는 서기 315년에 서쪽으로 지금의 난하 유역까지를 그 영토에 포함시켜 서쪽의 고조선 영토를 수복하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까지 고구려는 주로 서쪽으로 진출을 꾀하여 중국 지역에 있었던 나라들과 무력 충돌을 했으며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나 신라와는 충돌이 거의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 왕실은 자신들이 부여에서 왔다는 친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는 서기 245년에 고구려에 제압당한 뒤 248년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서 일단 현실 상황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요서 지역을 완전히 수복한 뒤 고국원왕(故國原王) 때부터는 고구려의 정책에 변화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중국 지역의 나라들과는 되도록 충돌을 피하고 화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고조선의 영토였던 지금의 요서 지역을 수복하여 일단 고구려가 그 지역에서 추구했던 목표는 달성되었으므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 고구려는 남쪽으로 진출을 꾀하여 백제 및 신라와 잦은 충돌을 보이고 있다.고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고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까지 그들의 통치영역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천왕의 뒤를 이은 고국원왕 시대는 이러한 정책 변화의 과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천왕의 낙랑군, 현도군, 대방군, 요동군 침공을 받은 선비 모용씨가 보복해올 경우를 생각해 이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기 337년[고국원왕 7년]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은 전연(前燕)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서기 339년에 고구려에 침입하였는데, 고국원왕은 이들에게 화맹(和盟)을 청하여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모용황에게 세자를 사절로 보냈다. 영토가 연접되어 있는 중국의 세력과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하 중류 유역으로 진출을 꾀하는 모용황으로서는 배후에 고구려라는 강한 세력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기 342년에 모용황은 친히 정병 4만 명을 거느리고 남족 길로, 다른 한편으로는 장사(長史) 왕우(王寓)에게 따로 군사 1만 5천 명을 주어 북쪽 길로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이때 모용황은 궁궐에 불을 질러 환도성(丸都城)을 허물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남녀 5만 명을 사로잡고 미천왕릉을 발굴하여 그 시체와 보물들을 가지고 돌아갔다. 다음 해에 고구려에서는 왕의 동생으로 하여금 진귀한 예물을 많이 가지고 가서 전연(前燕)에 칭신(稱臣)하는 조건으로 미천왕의 유골은 돌려받았으나 왕의 어머니는 볼모로 그대로 남겨두었다. 서기 345년에도 모용황은 그의 동생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을 빼앗아 군대를 주둔시키고 돌아갔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일부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 355년[고국원왕 25년]에 고구려는 사신을 전연에 보내 다른 볼모를 주고 왕의 어머니를 환국토록 하여 전연과 고구려의 관계는 일단 원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도 고구려는 중국 남부의 한족(漢族) 정권인 동진(東晉)에 서기 336년과 343년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화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에 고구려가 중국에 있는 세력들과 화친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게 해준다. 고구려가 이 시기에 특별히 중국의 세력들과 화친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남쪽으로 진출할 때 배후세력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연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되자 고구려는 백제 정벌에 나섰다. 서기 369년[고국원왕 39년]에 고국원왕은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백제에 쳐들어가 치양(雉壤)[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평화는 깨어지고 전쟁이 계속되었다. 2년 뒤인 서기 371년에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에 쳐들어갔는데 고국원왕은 이를 막다가 전사하였다.
바로 전 해인 서기 370년[고국원왕 40년]에 전연은 전진(前秦)에게 멸망하였는데, 이때 전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도망오자 고구려는 이를 붙잡아 전진에 보냈다. 당시 고구려와 전진은 마찰이 없었고 고구려가 이렇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화친관계가 계속되어 서기 372년[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는 전진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불교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내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전하니 고구려도 이에 회사(廻謝)하였다. 이러한 평화적 상황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서기 375년[소수림왕 5년]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지금의 황해도 신계군]을 치고 그 다음 해에도 백제의 북부 국경을 침공하였다. 이에 백제는 서기 377년에 3만명의 군사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였는데, 고구려도 백제를 침공하는 한편 전진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유지하였다.
서기 384년에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이 사망하고 고국양왕이 즉위하였고, 중국의 동북부에서는 전진에게 멸망한 전연 모용황의 아들 모용 (慕容 )가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전부터 고구려와 모용씨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던 요동군과 난하 서쪽으로 옮겨졌던 대방군, 현도군을 고구려가 침공하기도 하고 후연이 이를 탈환하기도 하는 전쟁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중단하지 않았다. 서기 386년[고국양왕 3년]에 고구려는 백제를 침공하였는데, 이에 대응해서 백제도 서기 389년과 그 다음해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하여 도압성(都押城)을 격파하고 주민 2백여명을 사로잡아갔다. 서기 392년에 고구려는 사신을 신라에 보내 수호관계를 맺었는데, 신라의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은 그의 조카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이렇게 되어 신라는 완전히 고구려의 통제 아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아래서 서기 392년에 고구려에서는 고국양왕이 사망하고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즉위하였다. 광개토왕은 원년[서기 392년] 7월에 백제를 쳐서 10개의 성을 빼앗고 10월에도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에는 북쪽의 거란을 쳐서 5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이전에 거란이 잡아간 고구려인 1만여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서기 393년과 394년에 고구려는 백제가 남변(南邊)을 침략하므로 이를 막고 7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다음 해에 광개토왕은 친히 패수(浿水)[지금의 예성강]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천여명을 사로잡아 백제를 제압하였다.
광개토왕은 서기 346년에 전연에게 멸망한 북부여 지역이었던 지금의 난하 상류 유역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고 서기 395년에는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던 비려(碑麗)를 정벌하였으며, 다음 해인 서기 396년에는 백제를 침공하여 58개의 성과 700개의 마을을 빼앗고 백제 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데리고 갔다. 이때 백제의 아신왕(阿辛王)은 앞으로 영구히 고구려의 노객(奴客)[臣下]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서기 398년에는 숙신에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 서기 400년에는 고구려의 신하나라가 되어 있는 신라에 쳐들어온 왜구와 왜구를 조종한 임나가라(任那加羅)를 정벌하였다.
한편 그 해[광개토왕 9년]에 고구려는 후연에 사신을 보냈는데, 후연은 고구려 왕이 거만하다는 트집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와 남소(南蘇)와 신성(新城) 두 군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음 해 고구려가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치자 평주자사(平州刺史)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고, 그 다음 해에도 고구려는 후연을 공략하였다. 서기 404년에 고구려는 대방[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궤멸하였고, 서기 405년과 406년에는 고구려의 요동성과 본저성(本底城)에 후연이 쳐들어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돌아갔다.
서기 408년[광개토왕 17년]에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후연 왕 모용운(慕容雲)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었다. 모용운은 원래 고구려의 사람으로 성이 고씨(高氏)였는데, 모용 (慕容 )의 아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을 때는 그를 종족의 예로 대했던 것인데, 모용운은 이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서기 410년에 고구려는 동부여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이를 정벌하였는데 이때 64개의 성과 1천 4백여 개의 마을을 함락시켰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광개토왕 시대에 이르러 동서남북의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고 고구려 중심의 천하질서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추구해왔던 다물이념, 즉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회복한다는 국가시책이 명분상으로는 일단 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長壽王)은 서기 413년[장수왕 원년(元年)]에 중국 남부의 동진에 사신을 보내 국서를 전하고 도화색(桃花色)의 말을 선물하였고, 서기 424년[장수왕 12년]에는 신라가 사신을 보내니 이를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서기 425년과 435년, 437년에는 중국 북부를 통합해 가고 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에 있던 나라들과는 화친을 유지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침공하는 정책을 폈다. 이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강대한 고구려에 위압당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도 날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추구하는 천하질서를 실질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독립국으로 두기보다는 병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에 서기 439년 11월, 12월, 462년 3월, 465년 2월, 466년 3월, 467년 2월, 468년 4월, 469년 2월, 470년 2월, 472년 2월, 7월, 473년 2월, 8월, 474년 3월 7월, 475년 2월, 8월, 476년2월, 7월, 9월, 477년 2월, 9월, 479년 3월, 9월, 484년 10월, 485년 5월, 10월, 486년 4월, 487년 5월, 488년 2월, 4월, 8월, 489년 2월, 6월, 10월, 490년 5월, 9월에 북위에 사신을 보냈고, 서기 455년, 474년, 478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송에도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송의 정권을 찬탈하여 건국된 남제(南齊)도 고구려와 화친을 원하므로 고구려는 서기 480년과 481년에 남제에도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는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위에는 거의 매년, 어떤 해에는 두세번 사신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신라나 백제와는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서기 440년[장수왕 28년]에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의 변방 장수를 죽이니 장수왕은 신라를 치려하였으나, 신라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서기 454년[장수왕 42년]에 신라의 북부 변경을 침공하였고, 서기 468년에는 장수왕이 말갈병(靺鞨兵) 1만명을 이끌고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강원도 삼척]을 쳐서 빼앗으며, 서기 489년에도 신라에 침공하여 고산성(孤山城)을 함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기 469년에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부 변경을 침공하였는데, 장수왕은 서기 475년에 군사 3만명을 이끌고 백제에 쳐들어가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하막하여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여명을 사로 잡아왔다.
이후 고구려는 서기 598년[영양왕(嬰陽王) 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隋)와 충돌하기까지 중국에 있는 나라들과 화친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의 침공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중국은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의 북부에서는 북위가 분열되어 서기 534년에는 동위(東魏), 다음 해 서기 535년에는 서위(西魏)가 섰으며, 서기 550년에 동위는 북제(北齊), 서기 557년에 서위는 북주(北周)라고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가 서기 577년에 북제는 북주에 병합되었다. 그리고 남부의 황조(皇朝)인 남제(南齊)는 서기 502년에는 양(梁)으로, 서기 557년에는 진(陣)으로 바뀌었다. 서기 581년에는 북주의 외척인 양견(楊堅)이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수(隋)라 하고 서기 589년에 남조(南朝)의 진(陣)을 병합함으로써 중국을 통일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동위, 북제, 북주, 남제, 양, 진 등의 나라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는 서쪽으로 중국을 통일한 수, 당과 충돌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어려움을 맞게 되었고, 끝내는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Ⅴ. 결론
고구려가 그 말기에 수, 당과 충돌하기 전까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대외관계 기록(주로 전쟁기록)을 살펴보면서 고구려 대외전쟁의 성격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첫번째 단계는 추모왕[서기 전 37~20년] 때부터 민중왕[서기 44~47년] 때까지로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반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두번째 단계는 모본왕[서기 48~52년] 때부터 미천왕[서기 300~330년] 때까지로서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나 신라와는 거의 마찰이 없었다. 백제와는 동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화평을 유지하였고, 신라와는 신하나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갈등의 요인을 없앴다. 세번째 단계는 고국원왕[서기 331~370년] 때부터로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침공한 시기였다. 이 기간에는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의 대외정책에 보이는 이러한 분명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고구려가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기는 중국에 서한과 동한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있던 시기였으며, 고구려의 대외전쟁이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향하던 시대는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흥망과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일반 상식으로 본다면 중국이 분열되어 혼란하던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를 중단하고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는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 지역을 진출했던 것은 맹목전인 영토 확장이 아니었고 다른 목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 방향에서 추구했던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으므로 그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이 있기 직전 미천왕 때인 서기 315년에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중국의 군현을 모두 축출하여 지금의 난하 유역까지 그 판도에 넣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으나 고조선 말기에 위만조선이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서한이 차지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 목표는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남쪽으로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것도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남부 해안까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서기 392~412년]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지금의 요서 밖의 비려,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 왜구 등을 침공하여 신하나라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는 이미 전부터 신하나라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와 마주 전지역은 물론 그 밖까지 호령함으로써 형식적이지만 고조선의 천하질서는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들 나라를 완전히 병합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들을 신하나라로 삼아 조공을 바치도록 했으니 고조선 시대의 거수국(渠帥國)과 비슷한 천하질서가 일단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장수왕[서기 413~491년] 때부터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천하질서를 이루기 위하여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직접 지배 영역으로 만들 필요를 느끼고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전쟁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고구려는 배후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나라들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화친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에 수, 당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출현하여 이들과도 마찰을 빚게 됨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구려의 대외전쟁은 한반도와 만주를 재통합하여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거승로서, 바로 다물이념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형식적이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이념은 광개토왕 때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수왕 때부터 추구했던 실질적인 통합에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이 고조선의 계승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가졌음은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으로도 뒷받침된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속민(屬民)이었다"하였고,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역사 사실과는 다르다. 광개토왕 이전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동부여도 추모왕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구려 시대가 아닌 그 이전 고조선 시대의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 시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거주민이 고조선의 속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단군의 후손이라 믿었으므로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를 포함한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들은 당연히 고구려 왕의 속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의 의식은 바로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다물이념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단순히 영토만의 병합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출처: 단국대학교/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북칼럼니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판계 ‘도서정가제’ 격론...묘안이 없다? (0) | 2006.12.09 |
---|---|
세 대 론 (0) | 2006.11.18 |
[스크랩] 사라진 우리의 원형종교와 원형문화 (0) | 2006.11.04 |
[스크랩] 배달문명이 황하문명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0) | 2006.11.04 |
[스크랩] 두만강이 국경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0) | 2006.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