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을 벌어 문화예술을 후원한 캘커타의 부잣집
돈을 벌어 문화예술을 후원한 캘커타의 부잣집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타고르 가문은 이 한 편의 시로 외국의 어느 가문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타고르(1861~1941)의 이 시는 일제 식민지였던 1929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다. 당시 일본을 방문중이던 타고르는 한국 방문 요청을 받았지만, 너무 피로한 나머지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대신 시를 써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를 읽으면 한국인의 자부심과 자긍심이 다시 한 번 용솟음친다. 더욱이 마지막 시어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코리아를 마음속의 조국이라고 부르면서 식민지의 신음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당시 인도도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터라 한국과 인도는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타고르는 인도 전통 명문가의 후손이다. 인도는 신분을 구분하는 카스트 제도(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의 4단계로 계급이 나뉜다)가 엄격했고, 지금도 헌법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브라만 계급에 속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존경받지 못한다. 타고르 가문은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처럼 재력을 가진 양반 계급이었다. 타고르 가는 재력을 바탕으로 예술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을 세워 학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존경받는 부자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메디치 가문 역시 15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 300여 년 동안 피렌체를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예술인들을 지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열었다. 타고르 집안은 대대로 정치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막대한 재물을 바탕으로 문화예술가들을 지원하는 후원자로 더 높은 명성을 얻었다. 벵골 힌두왕국의 5대 명문가들 중 하나였던 타고르 가는 한때 이슬람 주지사를 도왔다는 이유로 정통 힌두교도들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급기야 브라만 계급을 박탈당했다. 타고르 가는 이로 인해 캘커타로 이주하게 된다. 가문의 일대 위기를 경험한 타고르 가는 1790년대 당시 어촌이었던 캘커타가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타고르 가는 상업을 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는데, 그가 바로 타고르의 할아버지인 판차난 타쿠르였다. 대다수의 명문가에는 가문을 일으키고 초석을 쌓은 큰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명문가들에도 퇴계 이황, 청계 김진, 명재 윤증 등 학문에 힘쓰면서 자녀교육에 앞장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 후손들은 선대가 남긴 원칙을 대대로 지키고 발전시키면서 500여 년에 걸쳐 명문가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타고르 가도 그의 할아버지가 상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으면서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판차난 타쿠르는 영국 등과 무역 거래를 하면서 외국인들을 자주 만났다. 이들은 ‘미스터 타쿠르Takur’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대신 ‘미스터 타고르Tagore’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그냥 성으로 굳어졌단다. 타고르 가는 3대에 걸친 노력과 헌신으로 명문가로 재도약할 수 있었다. 대부호였던 타고르의 할아버지는 자선활동뿐만 아니라 캘커타 국립도서관과 캘커타 주립대학을 세우고, 캘커타 최초의 병원을 비롯해 의과대학 설립에도 앞장섰다. 현재 이 대학은 인도 의학 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2. 혹독할 정도로 과외를
받은 어린 시절 타고르는 여덟 살에 노트 한 권을 마련해 시를 썼다. 아이들이 다들 그렇지만 주변에서 재능이 있다고 칭찬을 해주면 더 신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칭찬은 아이들의 재능을 키워주는 보약과도 같다. 또 칭찬을 듣고 자란 아이는 남을 비판하기보다 감싸줄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한다. 아이가 칭찬이란 보약을 먹으면 능력 이상으로 재능을 키워갈 수 있다. 타고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고르는 일곱 살도 되기 전에 당시 명문가들이 그랬듯이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다.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은 혹독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들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과외 등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보다 더 심했다고 보면 된다. 타고르의 하루 일과는 가정교사들에 의해 빡빡하게 짜여져 있었다.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 타고르는 아침부터 레슬링을 배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운동이 끝나면 의과대학 학생으로부터 골격학을 배우며 라틴어를 익혔다. 어린 시절에 영문도 모른 채 골격학을 배운 타고르는 나중에 해골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운동과 골격 공부는 7시 전에 모두 마쳤다. 그리고 7시부터는 가정교사로부터 수학과 자연과학을 배웠다. 수학은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힘든 과목이어서 타고르 역시 산수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9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10시에 등교했다. 말하자면 학교 가기 전에 이미 요즘 아이들이 방과 후에 하는 학원 공부를 다 한 셈이다. 그렇다고 방과 후에 그냥 놀게 내버려둔 것은 아니다. 오후 4시 30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체조 교사에게서 체조를 배워야 했는데,무려 한 시간 반 동안 평행봉 훈련을 받았다. 저녁식사 전에는 그림 수업을 받았고, 저녁식사 후에도 영어 수업이 남아 있었다. 어린 타고르는 매일 파김치가 될 정도로 강행군을 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타고르는 영어와 수학,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미술, 심지어 체력 단련을 위해 레슬링과 체조까지 해야 했다. 타고르는 졸음을 이기며 공부하면서도 연습장에 틈틈이 시를 적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시가 어린 타고르에게는 고단한 공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비장의 무기였던 셈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컴퓨터 게임이 타고르처럼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비장의 무기다. 중독될 정도로 빠져들면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는 허용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머리가 지끈거리다가도 게임을 하면 금세 두통이 사라진다”는 어느 초등학생의 말처럼 요즘 아이들에게는 게임이 고단한 학업을 잊게 하는 두통약인 셈이다. 타고르는 학교생활에서 이내 좋지 않은 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의 선생님은 늘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적이었고, 학생들을 편애하거나 불공평하게 대했다. 이러한 경험은 타고르가 아이들에게 즐거운 학교를 만들어주기 위해 평생 교육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타고르가 경험한 학교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이 오히려 인도 근대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으로 작용한 것이다. 타고르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그만두고 만다. 그는 사립학교와 공립학교를 전전했으나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고, 다시 영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들어갔지만 끝내 자퇴를 했다. 아이들을 무시하는 교사들의 태도와 거친 학생들 탓에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고르는 열일곱 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거기서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타고르 역시 평생 단 한 장의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은 결국 누구나 존경하는 큰 인물이 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대신 그는 독서를 통해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과 사상을 흡수했다. 십대 후반에 이미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괴테, 단테, 바이런 등의 문학작품을 섭렵했다. 또한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인도 시인들의 영감에 넘친 시들을 접하면서 학문의 심오한 깊이를 알아갔다. 학교 교육을 그만둔 타고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타고르의 아버지는 당시 캘커타의 문화예술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거의 매일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철학, 과학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응접실 한쪽에서는 인도의 전통음악이 연주되었다. 타고르 가의 응접실은 어린 타고르에게는 ‘살아 있는 학교’ 그 자체였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타고르는 시집 『기탄잘리』를 펴내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 외에도 소설, 단편, 희곡, 평론, 전기,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출간했다. 뮤지컬을 비롯해 2,000여 곡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중 600여 곡은 오늘날에도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애창되고 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는 타고르가 직접 작사, 작곡한 것이다. 또 그림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 수채화 3,000여 점을 남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근대과학 입문서인 『우주 입문』을 펴냈다. 그의 재능은 역사상 최고의 다재다능한 천재로 꼽히는 괴테를 연상시킨다. -------------------------------------------------------------------------------------------- 3. 왕따 아이를 변화시킨 아버지와의 히말라야 여행
어린 시절 타고르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아버지와 떠난 히말라야 여행이었다. 무려 4개월 동안 아버지와 함께한 이 여행을 통해 타고르는 한층 성숙한 소년으로 바뀌었다. 타고르는 열한 살이 되던 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은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행하는 인도 전통의 성인식을 치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타고르 부자가 처음 도착한 곳은 샨티니케탄으로, 후일 타고르의 대안학교가 세워져 세계적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세계적인 교육 도시로 자리잡았지만, 어린 타고르가 여행할 때는 궁벽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샨티니케탄에 땅을 사둔 터였다. 타고르가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캘커타에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샨티니케탄의 친구 집으로 가던 도중 광활한 평원을 만나 그만 그 광경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곳을 매입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결국 그 땅을 친구로부터 사들였다. 요즘처럼 단순히 땅투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그곳은 대자연 속에서 명상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우선 그는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평화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버지가 첫 여행지로 타고르를 데리고 샨티니케탄에 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아들을 위해 미리 계산된 여행이었다. 아버지는 먼저 아들에게 대자연의 한가운데서 우주의 신비와 무한한 상상력을 맛보게 했다. 그런 다음 산스크리트어나 영어로 된 문학작품을 읽게 했다. 그리고 밤하늘에 찬란한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주의 신비로움 등 천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여행지에서 아들에게 특별한 체험을 하게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상인 집안의 후예답게 타고르가 돈에 대해 책임감을 갖도록 여행 경비를 관리하게 한 것이다. 아들에게 지갑을 맡기고 매일 지출 내역을 적게 함으로써 직접 실무경제를 익히게 했다. 실전 경험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타고르 부자는 히말라야로 가는 도중에 시크교도의 성지에도 오래 머물렀다. 인도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발상지이다. 또 힌두교와 이슬람의 신비사상을 접목한 시크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다양한 종교로 인해 종교 간 갈등이 심한 인도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른 신을 존중하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였던 타고르의 부친은 아들에게 시크교의 황금사원을 참배하고 때로는 신도들의 모임에 참석해 찬송가를 부르게 했는데, 이는 후일 타고르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이에게 종교에 대한 포용성을 갖게 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게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을 떠나 한 달간 여행을 한 타고르 부자는 4월 초봄에 히말라야에 도착해 그곳에서 3개월을 보냈다. 해발 2,000미터 고지의 산장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온통 히말라야 삼나무로 울창했고, 소년이 처음 보는 꽃들로 가득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곳에는 흰 눈에 덮인 히말라야 봉우리의 신비스런 모습이 눈앞에 다가왔다. 열한 살 소년은 대자연의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절로 경탄의 감정이 일렁였다. 소년 타고르는 히말라야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에 빠져들었고, 대자연의 감동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행의 목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소년에게 대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호흡하게 하면서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공부하도록 시켰다. 대자연 속에서 뛰놀게 하면서도 교만이나 나태함,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가르친 것이다. 타고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린 후에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이 공부가 끝나면 아버지와 아들은 아침 우유를 마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원전 1,000년 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우파니샤드』를 읽었다. 아버지가 낭송하면 소년은 음률을 들었다. 이어 태양이 떠오를 때쯤 아버지와 아들은 히말라야의 정기를 호흡하면서 아침 산책에 나섰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영어를 가르치고 히말라야의 눈을 녹인 찬물에 목욕을 하게 했다. 오후에도 수업을 진행하며 마냥 놀게 하지 않았다. 히말라야의 대자연으로 여행을 가서도 아버지는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아들을 가르친 것이다. -------------------------------------------------------------------------------------------- 4. 여행지에서도 영어와 종교 공부를 시키다
대자연을 체험하는 모험여행에 나서면서도 타고르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맞춰 여행을 했다. 요즘 자녀들과 함께 세계일주에 나서는 일부 부모들은 여행만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여행을 하더라도 타고르의 아버지처럼 정해진 계획이나 원칙에 따라 공부하는 여행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행이나 모험의 경험만 강조하다 보면 단순한 여행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무리한 일정으로 심신이 지쳐 제대로 여행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와 함께 대자연 속에 머문 4개월 동안의 모험여행은 소년 타고르에게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특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타고르에게 아버지는 최고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학교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4개월간의 여행 기간 동안 전부 배울 수 있었다. 캘커타로 돌아온 소년 타고르는 더 이상 4개월 전의 소년이 아니었다. 이미 몰라보게 성숙해져 있었다. 캘커타에서 서부 히말라야까지는 11세 소년이 감당하기에 결코 쉬운 여행 코스는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지금처럼 기차나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비행기는 더군다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험한 히말라야까지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소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요즘도 도보로 전국 산하를 누비면서 극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초등학생대상의 국토순례 여행도 있다. 힘든 여행일수록 깨달음도 큰 법인데, 이런 여행을 다녀오면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내심과 책임감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단체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가짐도 갖게 된다. 여행 도중 겪게 되는 갖가지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단계 성숙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4개월 동안 아버지와 함께한 타고르의 모험여행은 훗날 그를 시인이자 사상가, 교육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신뢰, 대자연에서 호흡한 경이로움, 아버지로부터 흡수한 지식에의 열정, 종교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배려 등은 모두 이 여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타고르는 훗날 회상했다. 아버지와 아이가 함께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라. 그렇지만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자녀교육의 원칙을 가지고 목적 있는 여행을 떠나라는 말이다. 여유가 있다면 130여 년 전에 타고르 부자의 체취가 남아 있는 샨티니케탄이나 히말리야에 다녀오는 것도 괜찮겠다.
아버지의 자녀교육에 힘입어 타고르의 형제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형제들은 각자 화가와 시인 혹은 음악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타고르의 큰형은 시인이자 음악가, 철학자, 수학자이면서 사상가로 타고르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둘째 형은 인도 고등문관(고시)을 최초로 통과한 수재로 산스크리트 학자였으며, 다섯째 형은 음악가이자 시인, 극작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 다섯째 누나는 음악가이자 벵골 최초의 여류 소설가였다. 타고르는 자신의 가정에 대해 “우리 가정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창조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한 히말라야 모험여행을 통해 “거의 공상에서 비롯되었다 싶을 정도로 자연의 아름다움, 나무, 구름과 친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년 시절, 히말라야 여행에서 대자연이 불러일으킨 영감은 이후 그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타고르 가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타고르라는 위대한 인물을 배출했다. 타고르는 인도에 근대교육을 뿌리내리게 했을 뿐 아니라 시인과 교육가로서도 크나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현재 캘커타의 중심부에 있는 타고르의 저택은 라빈드라 바라띠대학교로 이용되고 있다. -------------------------------------------------------------------------------------------- 5. 아버지가 산 땅에 대학을 세우다
캘커타에서 기차로 2시간 30분을 가면 볼푸르 역이 나온다. 이곳에 내려 다시 인력거(릭샤왈라)로 갈아타고 3.2킬로미터를 가면 샨티니케탄이다. 그곳에 바로 타고르가 교육의 이상을 실험한 교육공동체가 있다. 이미 100여 년 전에 타고르는 샨티니케탄에 우리나라의 ‘간디학교’와 같은 대안학교를 세워 자연과 어우러진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타고르는 히말라야 여행에서 캘커타로 돌아온 후, 학교에 다시 입학했으나 6개월도 안 되어 그만두었다. 타고르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아들을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다. 사실 자신의 이런 경험 때문에 타고르는 다섯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먼저 시골 마을에 살면서 집에서 다섯 남매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볼 때 학교보다 오히려 집에서 더 많은 지식과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고르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교육 방침에 잘 따라주지 않았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가르칠 경우, 아이들에게 만족스런 교육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공자는 이미 2,500년 전에 자녀를 직접 가르치기보다 공부를 점검하고 조언해 주는 데 그쳤다. 타고르의 큰딸은 하루종일 책을 읽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또 4시간 동안 가정교사와 함께하는 영어 수업도 어렵고 공부가 너무 지루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불만이 커지자 타고르는 아예 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수업에 감동이 없고 아이들이 지루해한다면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타고르의 아버지는 오래전에 사둔 샨티니케탄의 땅을 타고르에게 맡겼다. 타고르의 아버지는 자신이 꿈꿔 온 이상을 막내아들인 타고르가 이뤄낼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샨티니케탄을 이상적인 교육공동체로 가꿀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타고르는 1901년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그의 다섯 자녀를 비롯해 여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1921년에 비슈바바라티 대학교로 이름을 바꿔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연구하는 대학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현재 이곳은 유치원부터 국립대학까지 갖춘 세계적인 교육 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도시로도 명성이 높다. 타고르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빈곤 문제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1998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이다. 1913년 타고르가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아마티야 센은 비서양인 최초의 노벨경제학 수상자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또 창조적 작품활동을 하는 수많은 영화감독과 예술가 들이 이곳 출신이다. 오늘날 교육이 단순히 획일적인 인간보다 창의적인 인간을 원한다고 볼 때,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배우며 상상력을 키우는 샨티니케탄은 그 어느 곳보다 경쟁력을 가진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은 규제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 억압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분위기에서 아이들은 더욱 성숙하는 것이다. 아이의 성적이 고민된다면, 샨티니케탄을 생각해 보자.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은 이미 병들 대로 병들어 있다. 그래서 이민을 떠나기도 하고 대안학교를 찾기도 한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원칙이 확고해야 한다. 아이에게 상상력을 키워주면서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교육 방법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칙만 있다면 아이가 입시나 성적 지옥에서 벗어나 독서와 다양한 체험을 통해 재능을 키워 나갈 수 있다. 아이들의 성적이 뒤쳐져 고민에 빠져 있는 부모라면 한 번쯤 노벨상을 두 명이나 배출한 샨티니케탄의 자연학교를 떠올려보자. 그곳에 해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담 출판사『세계 명문가 자녀교육』인도의 명문가 타고르 가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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