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10권중 6~7권은 대필"
기획출판 유행하면서 재테크·자기계발書부터 동화·수필집까지 번져
저자의 1/10 수입이지만 생활고 겪는 문인들에 대필은 달콤한 유혹
“자서전과 자기계발서는 100%, 베스트셀러 10권 중 6~7권은 대필이다. 글쓰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대필작가의 도움 없이 책을 내는 건 불가능하다.”(등단 6년차 소설가)
“대필에 대해 영혼을 파는 행위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당장 생존의 문제 앞에서 대필은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다.”(등단 5년차 시인)
우리 사회에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책들 속에 자신의 흔적만 남긴 채, 정체를 좀체 드러내지 않는 유령들. 우리는 그들을 ‘대필작가(Ghost writer)’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책을 빛나게 하는 수려한 문장과 적절한 비유들은 자신이 낳은 사생아일 뿐이다. 반면 유령의 도움을 얻어 책 표지에 이름을 박은 이들은 ‘저자’라는 왕관을 쓴다.
정지영 아나운서의 대리번역 파문에 이어 유명 방송인 한젬마씨의 책들이 대필 논란에 휩싸였다. 출판계에선 대필이 책을 내기 위한 통과의례로 굳어진 지 오래라고 말한다. 최근엔 독자들의 관심분야가 다양해지면서 자서전 위주의 대필 관행이 자기계발서 수필집 동화 등에까지 번져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장르를 넘나드는 대필관행이 도를 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문체와 감성 위주의 수필까지 대필 성행
정치인이나 기업인 등 사회 저명인사의 자서전 대필은 출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필작가가 저명인사의 구술을 받아 글로 풀어내는 방식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등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대필작가가 받는 원고료는 권당 200만~1억원 가량. 대선주자 관련서적의 대필료는 5,000만원을 호가하며, <시련은 있어도…>의 작가는 1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순수 창작활동 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힘든 시인 소설가 등 문인들 입장에선 대필이 창작의 물꼬를 터주는 단비 같은 존재인 탓에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독자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의 책들을 신속히 출간해야 잘 팔리기 때문에 전문작가를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동안 11권의 책을 대필한 경험이 있는 시인 K씨는 “등단 초기에는 생존의 문제 때문에 누구나 대필 유혹에 쉽게 빠진다”며 “대필작가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글솜씨와 빠른 타자실력”이라고 꼬집었다.
외환위기 이후 독자들의 관심이 순수문학보다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분야로 옮겨가면서 재테크와 자기계발서 분야의 대필도 활발하다. 경제 일반이나 재테크 전문 출판사들은 전문적인 식견과 스타성을 갖춘 저자들도 글솜씨가 부족하기 때문에 대필작가를 고용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2003년 베스트셀러였던 <총각네 야채가게>와 최근 출간된 투자자문사 에셋플러스 대표 강방천씨의 <강방천과 함께하는 가치투자>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B출판사 권모 팀장은 “대필작가를 활용하지 않으면 국내 출판 종수가 60% 가량 감소할 것”이라며 “대필은 출판물의 다양화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다수 양식 있는 출판인들은 대필을 대중소비사회의 필요악으로 인정하면서도 대필 여부를 밝히지 않는 것은 독자들을 속이는 사기행위라고 말한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아이디어 중심의 기획출판이 대필관행의 주범으로 꼽힌다. S출판사 장모 대표는 “아이디어만 괜찮다면 누가 글을 쓰든 상관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대필이 효과적인 사실 전달을 위한 고쳐쓰기 수준을 넘은 지 오래”라며 “독자들에게 대필 여부를 알리지 않는 행위는 명백히 출판윤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재주는 대필작가가 넘고 돈은 저자가 벌어
한젬마씨의 책들 역시 대필작가를 활용한 기획출판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와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를 출간한 명진출판 관계자는 “난해한 그림 해설을 가볍고 소소한 일상 체험을 통해 풀어내자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씨를 저자로 선택했고, 이미지도 철저하게 관리했다”고 밝혔다.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기 위한 글과 다양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출판사 내부직원과 대필작가 등이 동원됐음은 물론이다.
<화가의 집을 찾아서>와 <그 산을 넘고 싶다>도 소재의 상당부분이 대필작가 아이디어였다. <화가의 집을…>에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고은의 <만인보>, 중국 테웨이 감독의 애니메이션 <피리부는 목동>, 팝송 <바이바이블루스>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인용됐다. 출판사가 보도자료를 통해 ‘유행가나 팝송 가사에서 화가와 작품들을 접한 느낌을 맛깔스럽게 자신의 이미지대로 해석하는 한젬마식 비유’라고 밝힌 대목들이 상당부분 대필작가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두 책은 ‘한젬마 지음’으로만 표기하고 있다.
대필작가들은 자료조사와 집필 등 실질적인 저자의 몫을 하고 있지만, 수입은 저자의 10분의 1도 안 된다. 한씨의 책 <화가의 집을…>과 <그 산을…>의 대필작가는 3년여에 걸쳐 화가에 대한 기초조사부터 현장답사, 아이디어 제공, 초고 수정까지 전담했다. 이 작가는 그나마 저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인세를 받기로 계약했지만, 상당수 대필작가들은 인세 방식이 아닌 일시불(매절)로 원고료를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출간 이후 30만부 이상 팔린 <총각네 야채가게>의 저자는 수억원의 인세를 받았지만, 대필작가의 손에 떨어진 건 800만원에 불과했다. 해당 출판사는 대필작가의 존재를 인정했다. 현재 5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마법천자문>도 초기엔 일시불로 원고료를 지급했다. 이 책을 출간한 북21 대표 김명곤(47)씨는 “책 판매량에 따라 원고료를 지불하는 인세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출판계의 경영환경이 워낙 열악하다 보니 매절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대중소비사회를 맞아 갈수록 높아지는 독자들의 기대 수준을 충족하기 위해 대필작가의 활용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대필사실을 분명히 밝혀 출판 과정을 투명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
[ 기사제공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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