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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챠드 포스터의 복음을 조심하자!

북코치 2007. 6. 17. 05:33

한국에 리챠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초청이 되어서 대환영이란다. 이런 일이야 흔한 일인데, 문제는 보수주의교회들이 이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로 그 인기도에 편승해서인지 속치마까지 올리면서 대환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올리는 경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예 없다.

 

아마도 이 사람이 쓴 책이 먼저 두란노서원이라는 곳에서 번역출간되어서 거의 비판없이 읽혀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리챠드 포스터라는 인물은 IVP에서 2003년도에 출간한 [복음주의자인물사전,Biographical Dictionary of Evangelicals]에도 등재되지 않은 사람이다. “복음주의자로도 분류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디에 그의 활동에 대해서 소개되는가 하면, 바로 은사주의자들, 오순절운동가들을 활동들과 그 신학을 자신들이 나름대로 정리해 둔 [오순절은사주의국제사전,The International Dictionary of Pentacostal and Charistmatic Movements]라는 책에서 그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의 신학을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은사주의운동가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주의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신의 박모목사나 침례교의 이모목사 같은 분들이 국내에서 전개되는 리챠드 포스터의 레노바레”(Renovare)운동의 주요후원자라고 한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 분들의 신학이나 사고가 포용적이고 관용적이 되었는가 궁금해 진다. 자신들의 신학의 기초를 허물고 있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그 포용성이여!

 

리챠드 포스터는 은사주의운동의 흐름 가운데서도 특별히 수렴운동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Convergence Movement의 중심축이다. 이 운동은 소위 복음주의, 은사주의, 예전운동 등 모두를 통합시켜보려는 운동이다. 현재 이런 운동의 주동자들은 안디옥정통교회계통의  Peter Gillquist, 휫튼대학의 Robert Webber와 바로 이 리챠드 포스터이다.

 

 [오순절은사주의운동국제사전]에 나오는 리챠드 포스터에 대한 부분만 번역해서 올린다. 기회있는 대로 그의 신학의 전반에 대해서 평가하는 글이 올려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가 순결한 복음, 참되고 진정한 복음으로만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챠드 포스터는 퀘이커교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훈련의 축제,Celebration of Discipline,1980]라는 책에서 기독교영성의 여러가지 흐름들을 병합시키고 있다. 1988년 그는 미국의 Wichita라는 곳에서 레노바레”(Renovare)라는 집회를 가지기 시작했는데, 기독교전통의 수렴적 병합에 대한 사고에 공헌을 한 모임이다. 대부분의 수렴운동주창자들이 복음주의자, 은사주의자들, 예전의식주장자들을 모두 함께 모으는데 그 활동의 초점을 모으는 반면, 포스터는 그것에다가 명상운동, 성결운동, 그리고 사회정의운동의 전통을 첨가하고 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쓴 책이 1998년에 출간된 [생수의 흐름들,Streams of Living Water]이다.”

 

번역을 하고 나니, 마침 비평들을 위해서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을 모아보니, 모두 네 권이나 된다. 그 중의 [생수의 흐름들]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에서 포스터는 기독교회사에 존재하는 다양한 전통들 모두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아야 할 통합적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 전통들이란, 1. 명상중심전통, 2.성결중심전통, 3.은사중심전통, 4,사회정의중심전통, 6.말씀중심전통,7.성례중심전통이다. 이 모든 전통들이 마치 각각의 stream들로 흘러오고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수렴(converge)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이다. 언뜻 보면 너무나도 매력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무나 심각한 문제점과 오류들을 이런 비유 속에는 숨겨져 있다. 이것을 간파해야 한다. stream이라는 비유 혹은 메타포 자체가 우리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것이다. 위의 7개의 전통들이 전혀 별개의 stream인 양 오해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사를 보면, 어떤 한 인물 속에 위의 다양한 요소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는 금방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포스터는, 예를 들자면, 명상중심전통에 사도요한을 예수님 다음의 첫머리로 삼고

성결중심전통에는 야고보사도를, 은사중심전통에는 바울사도를, 사회정의중심전통에는 일곱집사를, 말씀중심전통에는 베도르사도를, 성례중심전통에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나 사도들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지, Flavia Domtilla라는 AD1세기 인물을 끌어와서 그 첫머리에 둔다.

 

과연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바울이 각각 다른 전통의 한 ‘stream’들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오히려 이들 모두가 하나의 stream 속에서 같은 배를 타고 흘러내려오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더욱 심각한 오류는 따로 있다. 예를 들자면, 명상중심의 전통 속에 첫머리로 사도요한을 둔 그는 제일 마지막에 헨리 나우엔을 두고 있다. 헨리 나우엔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헨리 나우엔의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토마스 머튼이다. 토마스 머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인정하고 있는가?

 

이런 지적은 다른 stream으로 불려지고 있는 전통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성결중심전통의 첫머리가 되는 야고보사도와 본 훼퍼가 과연 같은 전통 같은 stream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 기독교없는 종교를 추구했던 본 훼퍼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함을 믿었던 어린아이같은 야고보사도가 같은 stream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사회정의중심전통, 은사중심전통, 말씀중심전통, 성례중심전통들에 대해서 각각 직접 검토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stream이라는 메타포가 가져오는 오류가 또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이 stream을 소개하는 순서이다. 바로 명상중심전통의 흐름(stream)을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은연중에 이러한 순서배열은 그의 관심의 우선순위가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순서배열이 암시하는 바는 명상중심의 stream이 말 그대로 모든 stream의 중심적 stream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stream, 그리고 그 stream 안에서의 어떤 요소들이 옳고 그른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애매모호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좋다. 다른 전통을 비평하고 시비를 거는 것은 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stream이 하나님의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 있다. 잔소리하지 말라!

 

잔소리를 하고 시비를 걸면 그것은 영성이 없는 것이다. 메마른 영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수렴하려는 자신이야말로, 생수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그가 기독교회의 모든 stream들을 수렴해서 그 수렴한 streams들을 이제 어디로 이끌어 갈꼬?

 

진정으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은,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