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핵심읽기

자전적 에세이 신정아 4001 책 읽고서 핵심 정리한것?

북코치 2011. 4. 27. 16:12

 

 

 

 

한국양서보급중앙회 회장 출연

2011년4월29일 오전 11시

 

 

● 신정아4001/사월의책 출판사/14,000원

 

 

* 전직 큐레이터, 전 동국대 교수, 1972년 경북 청송 출생, 청송 여중, 중경고, 미국 캔자스 대학에서 공부, 1997년 금호 미술관, 성곡 미술관 근무, 1997년 예일대 대학원 입학, 2005년 박사학위, 2007년 동국대 재임 당시의 학윈 진위 논란, 20월 구속, 2009년까지 1년 6개월 복역

 

* 내 사건이 터지자 예일대가 동국대로부터 받은 적도 없고 확인 회신을 한 적도 없다고 발뺌

* 하버드는 훌륭한 변호사를 만들고, 예일대는 미국의 대통령을 만든다.

* 린다 트레이시 : 그가 내 개인고수로서 정말로 학위를 받아 준 것인지, 아니면 나를 처음부터 속여 온 <학위 브로커>였는지 알 수가 없다.

* 상당수의 외국인들은 전문적인 글을 쓸 경우 <세컨드 리더>라는 현지인 고용, 글 교정 받음

* 실제로 일본이나 중국 여학생들의 경우 지도교수와 동거까지 하면서 학위를 받는 경우도 있음

 

* 뉴헤이븐 190번가, 요크스트리트에 있는 미술 사학과 건물 지하 강의실에서 두 시간 반에 걸친 발표와 토론을 끝냈고, 20여 분 정도 밖에서 기다리다 <합격> 소식을 들었다. 나의 예일 4년이 마무리 된 것이다. (세 명의 교수들 앞에서 디펜스를 했다) 어째서 이 논문은 1981년에 이미 출판되었고, 2005년 동국대 채용 당시만 해도 존재했던 학위가 왜 2년 만에 없어졌는지, 나로서는 그냥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 변양균 실장에게 배신감, 나를 격려해주고 정신적 힘이 되어주기를 원했는데, 막상 나를 만나서는 애인을 만들어버렸으니 얼마나 충격적이고 뒤통수를 맞은듯했을까, 나도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가까운 사람들의 배신, 문화일보 신세미 기자, 문화일보 특종이라는 <누드사진> 다른 기자들 보다도 더 악랄하게 기사를 썼다. 그토록 친했던 사람이 곤경에 빠지자 오히려 나에 대해 특종을 내려는 것을 보면 정말 세상이 무서워졌다. 아니면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인데 내가

몰랐던 것일까?

 

▶40세 전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40세를 넘고 보니 세상 사람들의 절반은 당신을 좋아하고 절반은 당신을 싫어하더란다. 그리고 예순이 넘고 보니 세상 사람들의 반은 당신을 싫어하고, 나머지 반은 당신을 씹는다.

* 남자가 잘하면 능력 덕분이고 여자가 잘하면 분명히 뒤에 배경이 있다고 여긴다.

* 남자들은 누구를 잘 봐주라고 하면 정말 잘 봐주지만, 여자들에게 잘 봐달라고 하면 더 미워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 미술동네에서 촌지 크기로 조선일보 미술면이 만들어진다는 소리까지 떠돌았다(?)

* 선머슴이 되기로 했다. 옷은 헐렁한 셔츠만 입었고,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남자들은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많이 배우거나 못 배웠거나 상관없이 <남자>라는 점에서는 다 똑같은 것 같다(!)

* 미술관의 젊은 여성 큐레이터, 여대생들의 입맛에 딱 맞는 강사였다.

* 젊은 전시 기획자들의 평생소원인 삼성문화재단의 <월간 미술 대상>을 받았다.

* 정운찬 총장이 나를 만나자는 때는 늘 밤 10시, 장소는 대개 <팔레스 호텔>의 바였다.

* 서울대 교수들, 한국은행 사람들, 신기남 국회의원까지 동석을 했다.

* 미술사 전공 교수 임용과 미술관 관장 제의를 거절했다.

* 변양균 실장 정운찬 총장을 아주 싫어함 (아마 나와 관련한 사감까지 포함?)

* 정운찬 : 아예 대놓고 내가 좋다, 앞으로 자주 만나고 싶다, 심지어 사랑하고 싶은 여자(?)

* 내가 전화를 계속 받지 않자, 동아일보 허문명 기자까지 동원

 

* 나에게 주어진 평온한 미래를 접고 칼 날 위에 서있는 불안한 <사랑>을 선택한 만큼 내게 전부였던 지난 시간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찢을 수 있는 휴지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전히 충격이었다.

* 인수인계를 위해 성곡 미술관 박문순 관장 면담, 쫓기는 상황에서 인사하러 온 나에게 말할 수 없이 매몰찼다. 이미 정지 시켜 놓은 법인 카드부터 빼앗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당일 부로 사직 처리하겠다(!) 내가 미술관에 다녀 간 것을 기자들에게 알리겠다(!) 내가 살인 을 하고 찾아가도 숨겨줄 분이 관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담하다 못해 쓰러질 지경.

 

* 똥 아저씨 (변실장)는 기획예산처에서 일하던 평범한 공무원 신분일 때, 처음 만났다. 나중에 승승장구할지는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때였다.

* 나를 만나면 늘 즐겁고, 행복하다고 고백해왔다. 나를 보고 예쁘다는 접대성 멘트까지(?)

 

 

* <앙앙> 이라는 술집에 둘이서만 가서 첫 키스를 나누었다. 유익종의 <사랑의 눈동자>라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무턱대고 내게 키스를 해왔는데, 저녁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장장 4시간 동안이나 키스를 나누었다. (그 후에는 완전히 진드기였다 ?)

 

* 용평 버찌힐 콘도 (변양균 법원에서의 진술), 장시간 실랑이 끝에 결국 성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관계 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정아는 그것이 첫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이도 서른이 넘었고 미국 생활도 오래 했기 때문에 당연히 남자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계속 출혈이 있어서 제가 생리대를 사다주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 신정아 <여자는 첫 빤스를 잘 벗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계속 생각났었다고 했습니다.

* 그 후 만남을 멀리하자, 매일 같이 메일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7시만 되면 우리 집 앞에 와서 나를 기다리다가 12시 자정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 어느 날 새벽 1시쯤, 쓰레기를 버리려고 집을 나섰다가 똥 아저씨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보는 순간 성벽처럼 높이 쌓아올렸던 경계심을 한꺼번에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 나는 더 이상 우리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끝이 보일 때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점점 똥 아저씨 앞에서 나는 여자가 되어갔다.

* 똥 아저씨는 생각한 것이 한 가지 있으면 절대 포기를 하지 않았다.

* 둘 다 책 읽기를 싫어했다. 똥 아저씨는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면 여자 같은 성격

* 내가 셔츠마다 넥타이를 배정해서 매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께서 넥타이를 어디서 샀느냐고 꼬치꼬치 묻더라는 것, 장차관 중 무색 넥타이를 가장 처음 맨 사람

* 제주도에 갔을 때도 부산에 갔을 때도 호텔 예약은 늘 나에게 시켰다. 그러면서도 호텔 비를 한 번도 낸 적이 없었다(?)

 

▶우리 관계가 만천하에 폭로된 후에 나는 똥 아저씨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실망도 컸지만 그간 나를 아껴주고 돌봐준 것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으로 감사한다.

 

* 외할머니의 소개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큰일을 하는데 는 진정한 인간적 매력과 유혹이 필요한데, 그런 유혹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노무현)

* 어떤 기자는 유학 가는 내 조카를 공항에서 붙잡고서 유학비를 변실장이 줬냐고 물었다고 한다. 정말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나의 외할아버지는 재야 운동을 하셨던 분이고, 외할머니는 당시 <신여성>으로 불리는 흔치 않은 여성 지식인 이었다.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이 충무공>이 아닌 <신 다르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 할아버지 대접에 물을 한 가득 떠오라고 이르시고는 장손부터 손자, 손녀까지 한 사람씩 할아버지 입에 물 한 숟가락씩 넣어드렸다. 다 받아 드시고 새벽에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뜨셨다.

* 우리 집은 택시 회사 몇 개와 주유소를 경영, 어릴 때부터 꽤 풍족한 편이었다.

 

* 신정아, 웅변을 좋아해, 어린 시절 경북 대표를 뽑혀 전국 대회에 나가 세종문화 회관에서 총리상,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였다.

* 나는 서울대 동양화과에 가고 싶었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다. 아빠는 내가 변호가가 되기를 바랐다.

* 청송 여중에 입학, 엄마 친구가 이사장으로 있었다. 아빠는 당시 8학군에 나를 입학시키기위해 알아본 끝에 방배동 동덕 여중에 나를 전학 시켰다. 전학 와서 치른 두 번째 중간고사 에서 전교 10등을 해서 식구들을 자빠지게 했다. 다음에는 전교 1등을 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곧바로 반에서 28등을 하는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 당시 뉴욕에는 큰 오빠 부부가 유학 중, 아빠는 대도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캔자스 대학으로 우리 집안과 잘 알고 지내던 문태준 전 보사부 장관님께서 추천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내비행기 표를 대한항공 1등석으로 끊어 오셨다 (!)

* 엄마 "야 변호사고 뭐고 여자는 무조건 첫 빤스를 잘 벗어야 한다. 첫 빤스 잘못 벗으면 엄마처럼 된다. 누가 뭐라카든 빤스 끈만 꽉 잡고 있어라잉!"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엄마말은 명언이었다. 결국 나는 엄마 말을 지키지 못해 이렇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도록 욕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 로렌스에 있는 캔자스 대학, 옥수수 밭과 허허벌판에 간간히 낮은 건물 몇 개씩 보이는 게전부였다. 버스도 전철도 없었다. 그냥 승용차들과 버스가 전부였다. University of Kansas

 

* 여학생들만 들어가는 <루이스 홀>이라는 기숙사의 1인용 방에서 생활을 했다.

* 서울에 도착해 아빠를 만나니 이미 아빠는 항암 치료로 인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 아빠는 침대 아래 둔 가방 두 개를 꺼내라고 하셨다. 엄마도 오빠들도 모르는 돈이니 혼자만 알고 따로 저축해 두라고 했다. 더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아빠 마음은 그 가방의 백배, 천배라고 하셨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열어본 가방 두 개에는 아빠가 평생 아껴모은 현금 5억 원이 들어있었다.

 

* 다시 서울에 도착하자 공항에는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고 차만 도착해 있었다. 기사에게 왜 아무도 안 나왔느냐고 묻자 모두 청송 집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청송 집에 도착해서야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집 앞에는 온통 조화가 가득했다.

 

▶아빠가 편찮으시다는 것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1994년)

* 삼풍백화점에서 24시간 매몰되어 있다가 구조되었다.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 그 와중에도 병원에는 도둑이 기승을 부려 구조대원이 챙겨준 내 핸드백과 소지품을 몽땅도난당했고 신분이 확인 안 돼 다음날 새벽에야 가족들이 나를 찾을 수 있었다.

* 생사는 한 순간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기도 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인생을 놓고 그렇게 악착같이 살 일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예전의 신정아가 아닌 <룰랄라 신정아>로 살아갔다. 원하는 대로 놀고 여행하고 세상을 마음껏 즐겼다. 그 안일함이 결국 오늘의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지는 상상도 못했다.

 

▶나중에 학위 문제가 터졌을 때도 다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는 않았다. 그것이 두 번째삼풍 사고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 당시로는 나쁜 일이 자꾸 거듭되다 보니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 큐레이터가 되기로 결정한 3학년 무렵부터 나는 학부와 대학원 MBA 과정 수업을 병행, 1992년 봄과 여름학기에 어학 코스를 마친 후, 그해 가을 학기부터 96년 가을 학기까지 만 4년 간 학부 졸업 학점과 MBA 학점을 함께 이수했다. 그리고 마지막 96년 가을에는 대학 내 유니온 갤러리에서 졸업 전시회를 하고 지도교수인 <로저 시모무라>교수에게서 칭찬까지 들었다. 심지어 시모무라 교수가 내가 금호 미술관에 취직할 때 추천서까지 써주었는데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 나는 제임스가 가져온 졸업장이 학교에서 나온 졸업장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마지막 두어 학기 동안 제임스가 대리출석에다 공부를 대신해 준 보답으로 상당한 돈을 지불했다.

 

* MBA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봄 졸업식을 할 때, 나는 예술사 학위와 MBA 학위의 모자 매듭이 달라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고르기도 했었다. 그렇게 받은 졸업장이 결국 가짜였음을 알게 되었으니, 여전히 멍한 심정이다.

 

* 금호 미술관에 들어간 나는 통역 겸 도슨트(전시 안내자) 일도 했지만, 정작 맡게 된 역할은 박성용 금호 아시아나 그룹 명예 회장님이 초대하는 주빈 메타, 피아니스트 백건우, 백혜선같은 음악인들에게 작품 설명을 해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분들과 식사 자리에

동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 박영택 선생(현 경기대 교수, 금호미술관 전임자) 언론에 후임자인 나와 금호 미술관에 대해 별 허접한 이야기를 다 늘어놓았다(!) 신문에 로비를 잘해서 기사만 많이 나간다. 작가들로부터 작품을 기증 받는 것에 대해 작가들의 피를 빤다는 둥, 신정아가 <아줌마>에게 비위를 잘 맞춰 미술관이 내 손에서 놀아난다는 등 별 이야기를 다했다. 나에 대한 욕은 둘째로 치고 자신이 오래도록 몸담았던 직장에 대해 그렇게 험담을 해저 좋을 게 무엇인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 작가들은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선호, 어느 작가 옆에 놓이면 자기 작품이 죽는다고 그자리를 꺼리기도, 전시장의 자리다툼은 늘 만만치 않는 일이었다.

* 전시 오프닝 날 작가 몇 명으로부터 욕먹을 각고를 단단히 해야 한다. 성공리에 마무리하면 그 말 많고 탈 많은 사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 진다. 성공적인 전시를 위해서 큐레이터인 나는 <신 다르크>라는 별명처럼 치열하게 밀고 나가야 했다.

▶전시회를 오픈한 날 저녁이면 나는 늘 빨래를 하면서 텅 빈 가슴을 달랬다.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다음 전시회를 위해 새로운 준비를 해야 했다. 작품들과 만나고 이별이 거듭되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 <뉴욕의 다국적 디자이너들>이라는 전시는 몇 년간 뉴욕을 오가면서 기획한 전시로서부끄럽게도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월간 미술 대상>을 수상한 전시였다.

* 내가 가진 매력을 세상을 움직이는 데에 활용하라고 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나보았겠느냐며, 내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똑똑하고 당찬 매력이 숨어있는아가씨라고 칭찬해주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 금호미술관을 나오게 된 속사정, 박강자(박성용 회장 동생) 관장과 정혜자 상무(박강자 관장이 무능하다고 험담) 사이에서 점점 힘든 위치에 놓이게 됨

* 당시 1년 동안 거의 집에도 못가고 미술관에서 먹고 자곤 했다. 명예 회장님이 사무실에 있던 간이침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을 많이 해서 집에도 못가고 늘 사무실에서 침대 놓고 자는 녀석이 언제 공부까지 다 하느냐고 칭찬, 정상무는 예일대는 신정아 같은 주제가 다닐 대학이 아니라고 재학 사실을 확인하라고 해서, 예일대 한국 동문회장인 명예 회장이 내 재학 사실을 조회, 확인하고 오히려 회장님은 나에게 생사람을 잡을 뻔 했다며 사과를 했었다. 폐암 투병 중에도 <정아 문제는 미안하게 되었다> 며 관장을 통해 거듭 사과를 하셨다.

 

* 미술관을 대관으로 변경, 주는 예산만큼 벌지 못하니 차라리 대관이라도 해서 미술관을 운영하라고 했다. 나는 전시 기획자로서 더 이상 미술관에 있을 의미가 없어졌다.

 

* 언젠가 할머니(명예회장 어머니)와 명예회장님이 계단을 내려가시다가 할머니가 <성용아 조심 혀라잉> 하시자 <엄니나 조심하쇼잉>해서 옆에 있던 내가 허리를 못 펴고 웃은 적도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보실 때마다 <우리 아기>라고 부르는 참으로 곰살궂은 전라도 할머니였다.

 

* 명예회장 아들 박재영은 다니던 하버드 대학을 그만두고 단편영화 만드는데 빠져있었다

* 딸인 미영 언니는 원래 사귀던 미국 사람이 있었는데 회장님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어 당시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회장님 자신이 미국인 부인과 살면서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는 터)

* 박성용 명예 회장님은 워낙 완고한 스타일로 성격이 불같아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분이었다.

 

* <정아 너는 월급이 왜 그렇게 적냐?>나는 그때까지 내 월급이 적은지 많은지 조차 몰랐다.나중에 회장님은 관장을 호되게 질책했다. 미술관 총무가 내 월급을 금호타이어 공장 여직원 초봉에 맞춰놓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관리부가 전문직인 학예 연구실을 길들이려고 벌인 짓,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월급 775,000원을 받고 다니고 있었다.(?)

▶월리엄 김이라는 변호사 <예전에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학위 본문을 다른 사람에게맡겨서 졸업을 했는데 이제는 아예 학교 다닌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그것 때문에 연락을 드렸다> 나는 예일대에 다니던 당시 서울과 뉴헤이븐을 오가며 코스 수업을 하느라 대리인 겸 개인교사 한 사람들 두었다. <린다 트레이시>라는 여자인데, 그가 논문을 다 맡아주기로 했기 때문에 남의 논문을 표절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2005년 학위 검증 당시 동국대의 요청에 예일대가 팩스를 보내 학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확인해 준 것을 보면 트레이시와 학교 교수들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나 의심이 된다고 이야기했다. 문제가 그것이라면 싸움의 승패는 빤하다고 상대는 미국 최고의 명문대이고 나는 그저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온 별 볼일 없는 여학생일 뿐인데다, 학위를 직접 쓰지 않은 약점까지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예일대에선 법무 팀이 사건을 관할하고 있을 텐데 그들은 나 같은 개인이 맞설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변호사)

 

* 트레이시는 지금까지 6명을 예일대에서 졸업시켰다고 했다. 5명은 석사였고 나머지 1명인나는 박사였는데 모두 논문을 대필해 주었다고 했다. 석사 5명 중 영국 학생 2명, 중국 학생 1명, 일본 학생이 2명, 지금까지 석사 5명은 모두 문제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박사를 밟게 한 내게서 문제가 터졌다고 했다(!)

(1) 논문이 왜 1981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나온 논문과 똑 같은가?

(2) 지도 교수인 <크리스틴 메흐링>은 나를 전혀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는가, 박사 논문

디펜스를 앞두고 <크리스틴 메흐링>이 내게 보낸 이메일은 무엇이었냐?

(3) 트레이시와 예일대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 학위가 없어졌나?

(4) 부원장 <파멜라 셔마이스터>는 왜 학위증명서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가? 당시 내 디펜스에 참석했던 사실은 어떻게 된 것인가?

(5) 예일대는 왜 나를 아예 모른다고 부인하는가? 지금까지 내가 낸 학비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6) 입학허가서와 코스워크, 그리고 디펜스와 졸업식 등은 모두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받은 졸업 가운은? 처음부터 다 가짜였나? 그동안 트레이시와 함께 공부했던 학과목들은 왜 필요 했나? 모든 것이 가짜였다면 차라리 코스 수업이라도 밟지 않게 하고 학위를 만들어 줄

것이지, 왜 굳이 그래야 했나? 혹시 다른 배후가 있었던 것인 아닌가?

(7) 트레이시가 앞으로 나를 위해 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 트레이시는 내 학위가 취소된 것을 몇 달 전 봄에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봄에 통보를 받은 줄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 트레이시는 본인 걱정만 할 뿐 나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

* 서울대 마술사학과의 김영나, 장진성 교수와 서양학과 윤동천 교수가 동국대 장윤 스님과 전등사에 모여 작전 회의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진성, 윤동천 교수는 예일대에집요하게 이메일을 보내고 있었고, 김영나 교수와 장윤 스님은 언론계 안팎에 내 논문을 뿌리고 다니면서 기자들에게 의혹을 부풀리고 있었다.

 

* 성곡 미술관은 쌍용 그룹 김석원 회장의 부인인 박문순씨가 관장, <미술 시대> 류석우 주간의 추천과 당시 학예실장이던 전준엽 실장이 문화일보 미술 담당 기자 출신이어서 여러 언론사 기자들의 추천과 작가들의 추천을 받아 입사했다. 전준엽 실장 밑에서 수석 큐레이터를 하다가 전 실장이 퇴직하면서 학예실장이 되었다.

* 특히 미술 쪽은 교수 채용이 가장 어려운 학과라고 했다.

* 검찰은 똥 아저씨가 동국대에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내 교수직을 받아주었다고 억지 기소를 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동국대 박물관장 정우택 교수, 약속시간보다 한참 늦게 나타나 앉자마자 언짢은 표정으로 다짜고짜 <누구 빽>으로 학교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교수는 오원배교수 와 한편이 되어 학교재단과 완전히 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 오교수 역시 만나자 마자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냐고 학교에 불만, 그러면서 정교수와 똑 같이 학교나 불교계에 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계속 물었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나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학교란 곳이 이렇게 학맥과 인맥이 뒤얽혀서 선배와 후배끼리 서로 챙겨주고, 나처럼 연줄이 없는 사람은 <왕따>가 되는 곳인지를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 오원배교수와 나는 작가와 큐레이터 사이로 매번 내가 부탁을 받는 입장이었다.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늘 전화하던 오교수와 이렇게 밥그릇도 아닌 밥풀떼기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이미 학교를 사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총장 비서실에 사표를 제출하고 돌아오자, 오원배 교수가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해와 사표 낼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고 강의를 못하겠으면 나대신 누구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 홍기삼 총장은 나를 교양교육원에 소속시켜 교양과목을 맡겼다.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만나는 것이 좋았다. 학생들도 내 강의를 참 좋아했다. 에로틱한 그림을 보여 줄 때는 모두가

까무러쳤다. 두 학기가 지나자 수강생이 넘쳐서 내가 사인을 해야만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중에는 그도 모자라서 더 이상 학생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강의를 하고 나오면 꼭 학생들 앞에서 재롱을 피우다 나온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이화여대 대학원 수업은 홍대와 또 정반대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대학원생들이 수업에 들어와 매사 똑 부러지게 행동했다. 홍대 대학원생 1,500원짜리 칼국수와 명다방이라는 곳에서프림과 커피를 잔뜩 넣은 진짜 다방 커피를 마시곤 했다.

 

▶장윤 스님은 동국대 이사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재단과는 마치 원수지간, 당시 재단 이사장이었던 영배 스님과 대립관계였다. 교수 생활 1년째인 2007년 홍기삼 총장의 퇴임을 앞두고 장윤 스님이 오원배 교수의 제보를 받고 학교 이사회에서 내

문제를 거론했다. (나를 영배 이사장 쪽 사람이라고 오해)

 

* 학교에서 똑같은 서류를 요구하는 것이 이번으로 4번째라고 교무처 김병현 과장에게 항의

 

* KBS의 송영석 기자 장윤 스님으로 부터 제보가 있었다고 찾아왔다

* KBS 임병걸 사회부장과 면담, 송영석 기자가 예일대로부터 받은 서류(나에 대해 부인하는)를 꺼냈고, 반대로 나는 동국대가 예일대로부터 받은 서류를 보여주며 치열하게 다투었다. 임부장은 방송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약속 할 테니 사표를 쓰라고 했다(?)

* 연합뉴스 조채희 미술 기자의 전화, 장윤 스님이 연합뉴스로 찾아와 나에 대한 서류를 사회부 기자에게 제보하여 지금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정말 집요한 사람이었다.

▶정말 적은 가까운데 있었다. 동국대에서 직전까지 이사였던 장윤 스님(전등사 주지)이 나서고 있었고, 광주일보에 제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용우 이사였던 것이다.

* 서울대 장진성 교수가 전화를 해서 내 성적 증명서를 보여 달라고 했다면서,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 선정을 하는데 무슨 성적 증명서가 필요한지, 장진성 교수가 누구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 언론마다 난리가 났다. 청와대 변양균 정책실장이 해외 출장 중에 장윤 스님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내 문제를 덮어달라고 했다는 기사였다.

 

* 장윤 스님은 똥 아저씨와 절친한 동창이 다니는 전등사의 주지였다. 기획예산처 장관 시절 똥 아저씨를 만나고 싶다는 부탁을 여러 차례 동창에게 전했던 모양이다. 똥 아저씨는 장윤 스님 이 동국대 이사이므로 혹시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만나겠다고 했지만, 나는 극구 말렸다.

 

* 똥 아저씨는 장윤 스님의 거듭되는 요청에 결국 스님을 만났고 전등사에 대한 특별교부세 부탁을 받아 검토했었다고 한다. 당시 교부세는 여러 사찰에서 신청했는데, 동국대 이사장 영배 스님의 흥덕사도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 똥 아저씨는 자신도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조계종 청불회 회장까지 맡고 있었기에 내 문제를 떠나서라도 종단의 화합을 위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 장윤 스님은 재단 이사회에서 해임, 나와 똥 아저씨가 난처하게 되었다. 내 문제가 장윤 스님의 해임 사유 중의 하나, 장윤 스님은 학교 재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함으로서 해임

 

* 재단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나에 대해 괜한 오해를 하는 바람에 재단을 공격하는 대신 내가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장윤 스님의 무서우리만큼 지독한 공격으로 산산 조각이 나 버렸다.

 

* 이제는 내 누드 사진이라고 하면서 정체불명의 사진이 문화일보 1면에 실렸다(?)

 

* 신문과 인터넷에서는 그 사진을 두고 내가 미술계와 정계에 몸 로비를 한 유력한 증거라고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

 

* 박종록 변호사 도쿄 나리타공항에서 나를 보자마자, <완전히 애네!> 하도 꽃뱀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서 <린다 김>같은 화려한 이미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 똥 아저씨는 이제 끝장난 마당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은 내가 더 많다고 했다. 만난 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벌써 편을 가르는 변호사들의 태도가 정말 아리송했다.(?) 이간질을 조심하라더니 변호사들이 먼저 이간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 김석원 회장의 전처 자식들과 현재 부인인 박문순 관장 사이에 재산 다툼이 생겨서 대여금고에 일부 재산을 챙겨두어야 할 상황 김 회장의 비서인 신희문 부장은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에 내 이름으로 은행 대여금고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 박문순 관장은 그날로 열쇠를 넘겨받고 나와 함께 은행에 갔다. 은행 직원은 대여금고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귀신처럼 눈치 챘다. 명의자인 나는 제쳐두고 관장에게만 안내를 했다.

 

* 김영진 변호사(변양균 실장의 친구)는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석원 회장의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바로 그 편에 서고 말았다. 우정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 세상이었다.

 

* 검찰 수사관들 TV에 나온 모습과 실제 모습이 너무 다르다면서 나더러 기운 내라고 했다. 기자들을 <쓰레기 같은 놈들, 사람을 이지경으로 괴롭히느냐고 욕을 했다>

 

* 윤 검사의 호통, 계속 이런 식이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앉은 채로 오줌을 싸고 말았다. 평생 나는 누구에게도 그처럼 혼이 나본 적이 없었다. 직장생활조차 10년 내내 재벌 사모님들만 모셨으니 목소리를 높일 일도 없었다.

 

* 영등포 구치소, 장영자 이래가장 대형사건 피의자가 왔다고 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정치범이 나 경제사범이 많지만 여자들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얘기였다.

 

* 먼저 치료실이라는 곳에 가서 옷을 훌랑 벗고 檢身을 받았다.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검사 앞에서 오줌 싼 일은 양반이었다. 수의와 검정 고무신을 받았다.

 

* 그때 구속이 되었더라면 검사들이 나와 똥 아저씨를 구속시키기 위해 횡령건과 김석원 회장 3 억 원 뇌물 건 등을 억지로 추가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첫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 나와 똥아저씨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그 유명한 신정아가 병원에 와서 새우깡부터 먹는 것을 보고 완전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 성곡 미술관은 비용을 부풀리거나 가짜 세금 계산서를 받는 방식으로 도트 디자인(주)을 비자 금 창구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돈은 내가 중간에서 박문순 관장에게 전달했다.

 

* 김영진 변호사(변 실장 친구)는 내가 비자금을 만드는데 종범 역할을 했고 박 관장은 내게서 돈을 받아 직원 격려금으로 사용했다는 대안을 만들어 냈다.(?)

 

* 박문순 관장은 검찰로부터 궁지에 몰리자, 똥 아저씨가 2004년 김석원 회장의 구속과 집행유예 석방을 도와준 대가로 3억 원의 뇌물을 주었다고 자백을 했다. 정말 기가 찰 이야기다.

 

* 박문순 관장의 새로운 변호사 강 변호사(윤 검사의 친구), "박 관장이 마음이 너무 약해 횡령은 절대 할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하도 돈을 갖다 주며 받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받았고, 지금 마음을 너무 많이 다쳐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이야기했다(?)

 

* 검찰은 나와 똥 아저씨를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이었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추궁을 받다보면, 밤늦은 시간에는 녹초가 되어 정말 이파사판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검사들은 내가 끝까지 버티면 결론만 가지고 나를 비난내가 아무리 지껄여도 결과는 위조고 횡령이라는 이야기였다.

 

* 검찰 조사는 진실과 거짓을 밝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짜여진 각본에 내가 얼마나 빨리 들어 가느냐 아니냐만 관건이었다.

 

* 김영진 변호사의 배신은 축복이었다. 1심 재판을 하기도 전에 변호를 포기한 대신 김재호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 후 재판 과정에서 보니 김재호 변호사는 정말 최고의 변호사였다.

 

* 김영진 변호사 (변실장의 친구)가 소개한 박종록 변호사는 만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선임료 이야기를 꺼냈다. 김 부장 검사와 윤 검사조차 박 변호사를 바꾸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 그 때 박 변호사를 떼어내지 못한 것이 그토록 발등을 찍으며 후회할 일인 줄은 몰랐다.

 

▶똥 아저씨는 처음에 나를 꼬시려고 예술에 관심이 있는 첫 했지만 나를 자빠트리고 난 후에는 예술의 <예>자도 꺼내지 않았다. * 대우건설의 정재영 전무, 여러 번 검찰에 불려나와 수모를 겪었는데도 재판 때 다시 증인으로 나와 내가 대우 건설에서 후원금을 받기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담담하게 증언해 주었다. 누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나에게 돌을 던지는 상황에서 나를 두둔하는 용기를 보여 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 엄마는 나를 보자 계속 울면서 내 머리만 쓰다듬었다.

* 대여 금고에서 나온 2억 원 때문에 나는 처절한 몸부림을 쳐야 했다. 박관장이 대여 금고의 돈에 대해 똥 아저씨가 김석원 회장의 사면복권을 도와준 사례로 준 돈인데 나에게 맡겨 놓은 것이라고 진술,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박관장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여실히 체험했다.

 

* 나는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어려운 미술관 사정 때문에 후원금 유치를 위해 죽어라 애를 썼고, 김석원 회장이 구속되었을 때, 석방을 위해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내게 떨어진 형벌이 되고 말았다.

 

* 똥 아저씨와 호송 차에서 만남, 쳐다볼 수 없었던 것은 금세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똥 아저씨에게 눈물을 보일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그리움, 안타까움, 사랑을 주고받았다. 나는 아직도 똥 아저씨를 보면 가슴이 뛴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와중에도 똥 아저씨는 입을 작게 오므리면서 <사랑해>라고 했다 !

 

* 나오는 길에 똥 아저씨에게 한 눈을 깜빡했더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

* 재판은 금방 끝났다. 똥 아저씨는 나가고 나만 남게 되었다. 1년 6개월의 실형이었다.

* 박종록 변호사는 재판 이야기보다는 자신이 내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로 했다는 둥, 영화를

만들면 계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헛소리만 하다가 갔다.

 

* 판사 가운데 한 사람이 여자라 걱정 된다는 것, 여자의 적은 여자다. 면회를 거부해 놓은 대신 가끔 고마운 분들에게 편지로 내 마음을 대신하기도 했다.

 

* 변호사 접견과 편지를 쓰는 이외에는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 징역살이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가장 힘든 일이기도 했다.

*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오로지 먹는 것만 밝히는 동물이 되어 있었다. 취침 시간에 누우면 계란 후라이가 떠올랐다. 비가 와서 축축한 날이면 그렇게도 소주와 라면 국물 생각이 났다.

 

* 박종록 변호사 누드사진 보도 소송, 배상금이 나오면 70% 자기 몫으로 하자고 했다가 선심쓰는 척 50%로 했다,

 

* 출소 전날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욕실을 청소하고 남기고 가는 물건들을 잘 정리해두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만남과 이별이 중요하듯이 나는 이 방에 들어올 새로운 사람을 위해 수건, 욕실용품, 차, 먹을 거리등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구치소 사람들은 아무리 유명한 정치인이라도 구속될 때에나 기자들이 몰려오지 출소하는날까지 이렇게 몰려드는 일은 없다고 했다 소장과 보안과장은 신정아의 인기를 다시 실감하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 피부과의 양미경 원장님 가려움증의 70%는 정신적인(울화병) 것에서 기인하니 마음을 다스려 보라고 했다.

 

▶내가 무슨 염치로 고마웠던 분들을 찾아 뵐 수 있겠는가, 언젠가 좀 더 반듯한 모습으로 갖춰지면 오랜 시간을 두고두고 내 마음을 전해 드릴 것이다.

* 감옥에 있는 동안 일부러 찾아와 격려하셨던 월정사 정념 스님과 원행 스님께도 인사를다녀왔다. 든든한 영치금과 마음을 다스리는 책들을 보내주셔서 내 마음의 평정심을 찾는데 큰 힘이 되었다.

 

* 그 사이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결국 사람이 죽어야 끝나는 곳이 우리나라였다. 얼마나 억울 하셨을까, 또 주변에 대해서는 얼마나 미안하셨을까?

 

* 사실 여부를 떠나서 사람을 한 없이 수치스럽게 만들고 명예를 땅바닥까지 떨어뜨리고 보는 것이 언론이요, 검찰이었다. *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는 온 나라가 대통령을 추모한다고 난리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나라는 극과 극인가?

 

* 친구와 음식점에 앉아 있는데 부부가 막은 편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부인이 먼저 나를 가리키며 <신정아>라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나를 자꾸 보려고 하자 부인은 남편에게 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그런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남자는 호기심, 여자는 경계심이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제 나도 사람들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였다. 돌이켜 보면 모질고 힘겨웠던 4년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