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서문화교육

개혁신학의 교회관

북코치 2006. 9. 6. 14:35

개혁신학의 교회관

1. 성전과 교회

우리는 역사상에서 하나님의 교회외에 무수한 이방신의 신전들을 볼 수 있으며 그 신전들은 그 규모와 위엄도에 있어서 대단히 장엄하며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며 압도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크메르의 앙코르와트 사원은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그 규모와 조형이 엄청나다 또한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건설된 바벨론성은 신들의 소굴로 이름지어질 정도로 무수한 신전으로 이루어진 도성이었다. 이 수도의 신전들의 수를 보면 主神 마루덕의 신전이 55개 여러 대신들의 대신전이 53개 땅의 신들의 소신전이 300개 하늘의 신들의 소신전이 600개 신들의 여왕인 이라타르를 위한 제단이 180개 그리고 고대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 정원과 바벨탑을 재현한 성탑 직구라트등[(1)김봉유 "대세계역사 "삼성출판사 1973.1 제1권 P.385.] 바벨론은 성경에 가르치신대로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공중의 권세잡은 마귀와 그 사나들을 가르킴)의 모이는 곳"(계18:2) 이 된 것이다.

이방인들은 참신은 모르므로 귀신과 마귀와 미혹의 영들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아 인간의 조작된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과 거기 진열된 각종 우상신들에게 압도되어 절로 경외심과 경배가 이루어지게 하기위하여 조작된 것으로 곧 우상숭배를 하도록 시도된 것들이다. 이방신전은 그들의 고안자와 창안자들이 신적 생명과 진리가 없는고로 시각적 효과에 호소하는 화려한 건물과 장엄한 우상시설에 인간이 압도되어 경배심을 유발하도록 조작된 것이다.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성전은 주셨으나 본래는 성전이 아니요 성막이었다. 이는 참신은 보이는 어떤 화려한 건물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신 백성들에게 거하신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후 다윗의 충성과 솔로몬에 의해서 또 그후에도 화려한 성전을 건축했으나 하나님은 역사의 손을 이용하여 파괴해 버리셨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성전 곧 신령한 성전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이었으며 또한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의 성취였다.[(2)예수께서는 두번 성전 파괴를 예언하셨다(마24:1-2,요2:19)]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때 그들은 이방인과 같이 성전안에 여러가지 조각물과 우상과 신상들을 두기를 좋아했다.(렘 7:3032:34-34-35,겔5:117:20)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재물이 풍부해지면 이런 제단과 우상들을 더욱 늘려 나갔다 (호 10:1).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하는 동기가 된것이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이같이 우상과 제단 만들기를 좋아함같이 중세의 카토릭교회가 똑같이 이런을 답습하여 교회를 부패케 하는 원인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개신교회에서까지 신약교회에의 참 모습에 대한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신자들에 의하여 교회내에 많은 조각물과 화상과 제단을 만들어 놓고 분향을 하는 것이 성행되고 있다.

신약시대는 보이는 성전시대가 아니요 신령한 성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과 제단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하여 놓은뒤 신성시하여 성전화시키고 있는 행위는 신약교회의 신령성에서 퇴보하여 구약시대의 의식종교로 타락하는 현상이다. 상술한 바와같이 중세 카토릭교회가 타락하게 된 경로도 이와같이 교회건물을 성전화시켜 신령한 교회를 의전화 시킨데 있었다.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초대 사도시대 교회는 성전중심이 아니었고 혹은 다락방 혹은 개인집에서 모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떠나 그리스도인의 집회소를 보통 개인집에서 가졌다. 그들은 보이는 건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구원의 주를 모시고 결속된 형제들의 형재애와 사랑의 교제로 모이는 집회 뿐이었다. 이와 같은 사도시대의 신령한 교회는 카토릭시대에 들어오면서 점점 신령한 면은 사라지고 의식과 제도와 보이는 교회당을 성전과 같이 섬기며 예배하는 습관으로 화해갔으며 여러가지 제단 설치 화상제작 우상까지 만들어 섬기게 되었다.

성경에는 어떠한 형상도 금하였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자기의화상도 그리 못하도록 하였고 A.D. 70년 엘비라(Elvira) 회의 개혁교회에서는 십자가의 우상화도 반대했다.[(3) 죤 칼빈"기독교 강요"김문제 역,혜문사,1982,4.제1권 P 232 ] 로마교회나 개신교회는 십자가가 구속의 상징으로 믿는데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로마 카토릭교회는 이를 우상화해서 교회,학교,병원등에서 섬기고 있다. 니케아회의를 전후해서 신자들은 십자가를 눈,입,가슴,옷 등에 그리고 미신으로 사용했다. 터툴리안 때에는 십자가 숭배자의 별명까지 붙였다.[(4)ibid]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에서까지 십자가를 우상화 시키는 경향이 짙어져서 웅장하게 조각한 십자가를 교회내에 설치하므로 교인들이 그 앞에서 분양하며 기도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로마교회의 많은 미사 제단을 본받아 개인교회 안에서도 많은 제단을 설치하는 경향이 늘어가고 있다. 개신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사진까지도 교회에 부착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는 카토릭교회에서 많은 성상 화상을 걸어놓고 숭배한 것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독일의 종교개혁 당시 비덴베르크 대학의 칼시타르는 당시 교회에 장식되어 있는 여러가지 성상, 장식을 예수의 십자가상 성도의 화상, 초상화,성모상 등등의 조상()을 치워버리고 심지어 당시의 의전화 틀에 박힌 종교음악까지 치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것들은 우사숭배이며 육신의 감각에 호소하는 저열한 것이라고 퇴치하였다.[(5)김봉규, "대세계역사"삼성출판사,1973,1.제6권 PP.344-345]

이와같은 칼시타르의 개혁의 여파는 급격히 파급되어 당시 의식화된 종교와 우상숭배의 모순속에서 죽은 종교에 기만당하데 분노한 많은 학생들과 심니들은 성당에 몰려와 모든 우상과 성상, 제단들을 마구 부수는 소동이 일어났었다. 독일 각처에서는 우상 종교의 허위에 속은 사실에 분노한 군중들이 각처의 성당으로 몰려다니며 성상 조각물과 심지어 화려하게 조각된 교회당 건물까지 우상이라고 파괴하는 소동이 급격히 비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대혼란이 일어났을 때 루터는 급히 비덴베르크로 돌아가 이를 진정시킨 일도 있었다.[(6) ibid]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인간의 종교성이 저열하여 영적으로 교육하기에 미흡하므로 종교적 의식과 제도로써 종교 교육을 하였으며 성전이나 제단 제사의식등 원시적 형태를 통하여 종교 교육을 고취하였으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같은 의식, 제단,성전,제사제도는 신령한 예배로 개혁된 것이다(히 9:10).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어떤 의식도 배제하고 오직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부름받은 성도의 집단 그 자체가 교회이며 한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어떤 화려한 건물도 하나님 앞에는 무가치한 돌과 나무조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것은 결코 성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2. 만인 사제론

중세 사상에는 사람이 세속적 직업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신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의하여 그러한 사상이 깨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신자의 일상생활이나 직업생활이 교직과 일반으로 다 신성하다는 사상이 생겼다. 이것이 중세와 근세를 구별하는 사상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수도사가 만사를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금식하고 철야기도 하며 금욕생활을 하는 것을 큰일로 보고 소녀가 집에서 세탁하고 요리하는 것은 적은 일로 보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그러나 사람이 신의 명령대로 행하면 이런 적은 일로 봉사하는 것도 신을 봉사하는 의무가 되는 것이니 모든 수도하는 남녀의 성결관 금욕생활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직이든 일반 신자이든 간에 신께서 볼때에 고하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라 칭하는 것이고 당시 구라파인들의 마음에 승려를 두려워하든 생각을 제거함이 되었다. 즉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제가 됨을 규명한 것이다.[(7) 송락원 "교회사"기독교 문화사 4292.3.P.324.]

중세 카토릭 교회에서는 조직과 신도사이의 종교적 직업과 세속적 직업을 엄격히 구별하여 왔었다. 개혁자들은 이러한 처사에 대해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고 예수님과 그 소집단 가운데서도 교직과 신도의 구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태도를 굳혔다. 벧전 2:9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하신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그 처한 환경에서 일하였다 물론 어떤 사람은 지도자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일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된 의무의 방향에서 일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후 카토릭 시대가 되면서 교직계급이 나타나게 되었고 아무나 교직이 될 수 없다는 교권적 해석과 규칙이 부가되었다. 그리하여 교직계급과 신도를 크게 구분하는데 이르렀다. 그러나 조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곡해를 비난하고 직업적인 교직계급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유일한 중보자인 그리스도께 모든 신도가 다 각각 직결되어 있다고 선언하므로서 만인사제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제도의 정치적 주장에 도전하고 자기를 지지하는 제후에게 행정상 또는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도 교직이 평신도에게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는데 반대한 ??이다. 즉 신앙있는 자의 통치자는 곧 사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들은 근거없는 성직제도에 뿌리를 박을 수 없고 박을 권리도 없다고 대항했다. 그런데 회중이 한 지도자를 선정하여 세울 경우에는 그에게만 사제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과 같은 사제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같은 정도로 임해있다. 결코 교직자에게만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라 아울러 성경지식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리에 주어져 있다고 칼빈은 주장하였다. 그런고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서를 연구하고 말하고 가르칠 의무를 갖게된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제이다.[(8) 성갑식, "그리스도교 대사전"기독교서회, 1981.6.p304.]

정신적 지주로서 인간사회의 계급사상을 타파하였다. 본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직접통치 하에서 신정통치를 받도록 하여 이방 사회와 같은 계급제도를 불러 하였었다(삼상 8: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의 풍습을 모방하기를 원하여 완악한 경향으로 향하므로 자정적으로 허락하셨으나 본래의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호 13:11).계급제도는 이방인 죄인 세계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세계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자유인이며 평등하며 하나님의 직접 통치하에 있으므로 인간 계급이 개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인사제 사상은 기독교 민주주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