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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VS 허난설헌

북코치 2006. 11. 2. 15:41
황진이 VS 허난설헌

시에 인생을 담은 두 여인 황진이 vs 허난설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 무엇을 해야 행복을 얻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가질 법한 의문이다. 여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반면 혼자 살면서 누구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시대를 초월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딪히는 문제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여성이었던 황진이와 허난설헌의 생애는 이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자연을 읊고 명사들과의 사랑에 빠진 황진이
황진이와 허난설헌. 이 둘은 출신부터가 달랐다. 황진이는 황진사(黃進士)라는 사람의 서녀(庶女), 곧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셈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서녀로 천대를 받으며 사느니 기생이 되어 자유롭게 살리라. 이리하여 그녀는 기생이 되어 뭇 사내들과 사랑을 나누고 때로는 울리기도 했다. 그녀의 애정 행각 대상은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학문연구기관이었던 홍문관(弘文館)의 책임자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던 소세양(蘇世讓)과는 30일 동안 사랑을 나누었다. 30일이 지나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를 읊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달빛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에 화하여 차거웁고
피리 부는 코 끝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
내일 아침 이별한 후에는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이후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더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진이가 그를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잘알 수 있다. 헤어진 뒤에도 그녀는 항상 소세양을 그리워했다. 혹 그가 다시 올까 가슴을 졸이며 그 마음을 시로 풀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도려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거든 구비 구비 펴리라

황진이의 애정 행각은 이제 사내들을 시험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그의 미모와 자태 앞에 내로라하던 사대부나 문사들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번은 송도 근처 깊은 산 속 암자에 생불이라 일컬어지는 지족선사(知足禪師)가 있었다. 30년 동안 수도했던 그도 황진이의 유혹 앞에서 맥을 못 췄다. 결국 그는 파계를 하고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황진이의 자신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대 제일의 학자인 화담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다시 자신의 미모를 시험했다. 그러나 화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다. 황진이는 이에 무릎을 꿇고 빌면서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松都 三絶)의 하나이십니다.”
옛 고려의 왕도였던 송악에서 빼어난 것 셋 중에 하나라는 뜻이었다. 화담이 또 다른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황진이는 자연도 사랑했다. 여기 저기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녀가 박연폭포를 보고 읊은 시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 가닥 긴 물 구비가 골짝이 틈에서 뿜어져 나와
흉흉한 물결은 백 길의 용늪을 이루고
거꾸로 쏟아져 내리는 샘이 구름인가 싶다
성난 폭포 비꼈으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우박과 천둥소리 마을까지 넘치고
구슬 방아에서 옥이 부셔져 허공에 치솟는다.
구경꾼들아 말하지 마오 여산(廬山)의 풍경이 좋다고
알거라 해동의 제일은 이 천마산임을

그러나 뭇 남자들을 사랑하고 자연을 만끽했던 황진이도 만년에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사랑의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감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 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더이다

사람도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어지고 나면 다시 올 수 없는 것. 그런 인생의 허무함이 짙게 배어 있는 시다. 너무 일찍 사랑과 인생을 알았는지 그녀는 마흔이 안 된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여인들의 고된 삶을 노래한 허난설헌
허난설헌(본명은 許楚姬)은 명종 18년(1563) 명문 거족인 사대부집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감사(慶尙監司 : 지금의 경상도지사)를 지낸 허엽(許曄)이었다. 허성(許筬)·허봉(許?)을 오빠로 두었고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許筠)이 그의 동생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니 유복한 집안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당시 보통 여자들처럼, 그녀는 김성립(金誠立)이란 사람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허난설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으로 자주 바람을 피웠다. 벼슬을 한 뒤 그의 바람기는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허난설헌과 시어머니와의 불화도 있었다. 이제 기댈 곳이 없어진 허난설헌은 뒷 초당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으로 우울하고 허무한 마음을 달랬다.

그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렵게 얻었던 자식들을 어린 나이에 잃고 말았다. 아들과 딸 하나씩을 강보에 있을 때 저승으로 보낸 것이다. 그녀는 이런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작년에는 딸을 잃고
올해에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디 슬프게 땅에 묻으니
두 무덤이 마주 서 있네
백양나무 숲에서는 쓸쓸한 바람이 일고
소나무 숲에서는 도깨비불이 번쩍이네
지전(紙錢)으로 너의 혼을 불러
무덤 위에 술을 붓는다
나는 안다, 너희 남매의 혼이
밤마다 서로 따라 노는 것을
내 비록 뱃속에 또 한 아이 있지만
어찌 가히 잘 자라기를 바라겠는가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를 부르고
피눈물 흘리며 슬픈 소리 삼킨다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이 이보다 더 애절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불행은 계속됐다. 친정 가족이 당쟁에 휘말린 것이다. 오빠인 하곡 허봉은 함경북도 갑산으로, 동생 허균은 남쪽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허봉은 5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왔으나 과음으로 폐병을 앓다가 죽었다.

황진이가 자연을 읊고 명사들과의 사랑에 빠진 것에 반해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자신의 불행이 남을 생각하는 동정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가난한 여인의 삶을 읊은 <빈녀음(貧女吟)>이 그것이다. 그 한 구절을 살펴보자.

손에 가위를 잡느라
추운밤 열 손가락이 어네
남들 위해 시집갈 옷 지으면서
해가 거듭 돌아와도 혼자만 지내네

그러나 혼자 사는 여인의 외로움을 허난설헌도 어쩔 수 없었다. 자다 깨어 이불 한켠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동경을 지울 수 없었다.

붉은 비단 너머로 등잔불 붉은데
꿈 깨 보니 비단 이불의 한 편이 비었네
찬서리 옥초롱엔 앵무만 속삭이고
뜰 앞에 우수수 서풍(西風)에 오동잎 지네

이 같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까. 허난설헌은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황진이와 허난설헌. 이 둘은 조선시대 여류 시인 중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전혀 다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시 세계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느낌과 교훈을 주고 있다.
글_김갑동(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황진이·허난설헌 관련 책
_ 살아있는 신화 황진이 / 김재용 / 대훈 
_ 황진이 / 홍석중 / 대훈서적 
_ 황진이 / 최정주 / 비앤엠 
_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 / 문화영 / 아루이프로덕션
_ 황진이 / 구상 / 홍성사
_ 황진이 / 전경린 / 이룸
_ 황진이 / 홍석중 / 문학예술출판사
_ 나 황진이 / 김탁환 / 푸른역사 
_ 황진이 / 이태준 / 깊은샘


_ 허난설헌 시 연구 / 김성남 / 소명
_ 허난설헌 시선 / 허경진 / 평민사
_ 허난설헌 / 김성남 / 동문선 
_ 허난설헌 / 박혜숙 / 건국대학교출판부 
_ 허난설헌 한시의 세계 / 나까이 겐지 / 국학자료원
_ 난설헌 시집 / 장정룡 / 동녘출판사 

 

 

출처:사람과 책 10월호 기사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