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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북코치 2007. 7. 1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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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문식 외 지음 | 김영사

 

 

[북멘토 리뷰]

  3정승을 비롯하여 당대의 학자로 이름난 20명의 고위관리들의 개인교습을 받고 학습에 필요한 시중을 드는 데에만 39명의 하급관리들을 거느렸던 조선의 왕세자. 그 밖에 왕세자 교육에 필요한 서책들을 관리하는 장서각에도 13명의 관리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임시직 관리들이 투입되었다.

 <조선의 왕세자 교육>은 단 한 명의 교육을 위해 유례없이 많은 인력과 재정을 투입했던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국왕의 비빈이 임신을 하는 순간부터 원자(왕의 장남)가 제왕이 되기까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바른 심성을 배양하기 위한 왕실의 태교부터 까다로운 유모 선발, 갓난아기 때부터 시작하는 보양청 교육, 유아기에 시작하는 강학청 교육, 입학례·가례·관례 등 각종 통과의례, 세자 책봉 후 시작하는 세자시강원 교육까지, 단지 교육과정만이 아니라 왕세자의 여가생활과 스승과의 관계까지 입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각각 왕실문화 전문 연구자와 아동문학가로 만난 이 책의 저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보양청일기>, <강학청일기>, <육전조례> 등 20여 종의 방대한 고서들과 최근의 연구 논문들까지 아우르는 공동작업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의 모든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복원해냈다. 수많은 고서들에서 발굴해 낸 생생한 자료 외에도 왕세자가 공부하던 서책들과 각종 의례에 대한 왕실 기록화, 왕세자가 태어나고 자란 유적들에 대한 사진 등 총 87점의 도판들을 수록하여 조선의 왕세자 교육을 시각적으로도 충실히 재현했다.

[책 핵심 읽기]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사상은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여겼는데, 왕도정치란 어질고 착한 왕이 선정을 베풀어 위로는 하늘의 복을 받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화답하여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유교 사상이 조선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하고 체계적인 왕세자 교육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왕세자를 학문으로 교화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할 현철한 군주로 키우는 것이 조선의 왕세자 교육의 목적이었다.

  왕세자의 하루는 오늘날의 수험생처럼 공부 위주로 짜여져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조강, 낮과 저녁의 주강과 석강 외에도 수시로 이어지는 소대와 한방중에 진행되는 야대까지. 이에 더해 수시로 경서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구술 시험이 실시되었고, 5일에 한 번은 배운 내용을 모두 포함하는 문제은행식 시험이 실시되어 성적이 매겨졌다. 게다가 왕세자에게는 방학도 없었다. 특별히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견디기 힘들었던 과중한 학습부담을 견디다 못해 술과 여색에 빠져든 왕세자들이 적지 않았다. 양녕대군, 사도세자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장남이라고 해서, 혹은 세자라고 해서 왕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등 7명에 불과했다. 왕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생활이 문란하면 왕세자 주변의 내시들과 교육 관리들을 문책하라는 대신들의 상소가 이어졌고, 정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기도 했다.

  왕권을 이어받을 원자나 세자의 스승을 임명할 때는 향후의 정국 구도와 관련해 정치세력 간에 암투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인조는 원자 보양관을 임명하면서 남인과 서인의 구분 없이 골고루 등용했다. 그러나 왕의 스승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세종의 스승인 이수처럼 성군을 배출한 학자는 죽어서까지 명예를 누렸지만, 연산군에게 공부를 강요한 조지서는 국왕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제자의 손에 참수를 당하기도 했다. 인종을 통해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꾼 조광조와 이황은 정변과 왕의 단명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왕세자 교육은 어려서부터 방대한 독서와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대학자로 성장한 정조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정조는 왕손일 때부터 영조의 특별한 관심 속에 남유용, 조영국, 김원행 등 당대 학자들의 지도를 받아 25세로 국왕에 즈음할 당시에는 신하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학문적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즉 유교사회의 이상적 군주상인 군사君師(왕이 곧 스승)를 실현한 것이다. 그는 184권 분량의 개인 문집 <홍재전서>를 저술했고, 평생 2,500권의 책을 편찬했다. 1797년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 萬川明月主人翁自序>를 짓고 중앙의 신료와 지방관들에게 각자의 필체로 이를 써 올리게 했다.

  즉, 자신을 하늘에 뜬 밝은 달에 비유하고 만백성을 만 개의 개천에 비유하여, 달빛이 만 개의 개천에 고루 비추듯 모든 백성에게 고루 미치는 지고지순한 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생각하며 책읽기]
  조선의 왕세자 교육은 어떻게 하였을까?,지식 위주의 입시교육에 치우친 오늘날의 교육과는 달리 조선의 왕세자에게는 지덕체를 고루 발달시키는 종합적인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스승은 물론 유모와 궁인도 엄격하게 선발하는 등 환경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왕실 어른과 스승에 대한 예절을 익히고 각종 왕실 의례의 절차를 익히는 것이 학문을 습득하는 것 이상으로 중시되기도 했다. 손수 밭을 갈며 백성들의 삶을 체험하는가 하면, 시를 짓고 그림과 음악을 익히며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늘 생활 속에서 행해졌던 조선의 왕세자 교육은 오늘날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귀감이 될 것이다.

1. 국왕의 아기를 임신한 비빈은 빛깔이 아름다운 옥과 자수정을 가까이했고, 가야금과 거문고 음악을 들었다.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태아에게 들려주었고 정서 안정과 집중력 향상을 위해 바느질을 했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순두부 등 콩으로 만든 음식을 많이 먹었고, 옆으로 걷는 게와 뼈없는 생물인 문어는 먹지 않았다.

2. 원자의 유모는 대왕대비가 직접 심사하여 말이 적고 젖이 풍부하며 심성이 고운 사람으로 뽑았다. 원자가 왕이 되면, 유모는 영의정 바로 아래 품계인 종1품의 ‘봉보부인’에 봉해지고 왕의 탄일이나 자신의 생일, 또는 나라의 경사 때마다 특별한 하례물을 받았다. 성종의 유모인 백씨나 연산군의 유모인 최씨는 국왕과의 특별한 관계를 믿고 권력을 남용하거나 국정에 간여하기도 했다. 원자의 시중을 드는 궁인과 내시도 품행이 방정한 사람들로 선발했으며 체계적인 유학 교육을 시켰다.

3. 어린 원자의 양육을 담당한 보양청과 강학청에서는 <천자문>, <동몽선습>, <대학>, <격몽요결> 등의 경서 학습 외에도 원자가 먹을 음식과 옷, 서책의 공급 등 모든 것을 관장했다. 머리가 맑아지는 조청, 피로를 풀어주는 소금 목욕 등 학습 능률을 올리기 위한 보양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러한 왕실의 비법은 민간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어린 나이에 혼자서 학습에 전념해야 하는 원자의 외로움을 덜어 주고자 종실과 대신의 자제 중에서 총명한 아이를 뽑아 ‘배동’이라 하여 원자와 함께 생활하며 공부하게 하기도 했다.

4. 원자의 교육은 아침에 일어나서 왕실의 어른께 문안하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핀다든지 평소 식사를 살피고 병환 중에는 약을 먼저 맛보고 올리는 것과 같은 기본예절부터 시작되었다. 스승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지켰고, 항상 격식에 맞는 옷차림에 정숙한 태도로 생활해야 했다. 관례·가례·입학례 등의 통과의례는 물론 각종 국가적 행사에 참여하여 장차 국왕이 되어 의식을 주관할 때 필요한 몸가짐을 익히기도 했다.

5.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세자시강원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제왕 수업을 시작했다. 시강원의 교재에는 <효경>이나 <소학>을 쉽게 풀어쓴 <효경소학초해>나 역대 국왕의 행적 가운데 모범이 되는 사례를 모은 <조감>, <자성편>처럼 특별히 왕세자의 교육을 위해 편찬된 책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실에서는 무예 훈련과 농경 실습 등 지덕체를 고루 함양하는 전인교육이 실시되었다. 매년 정기적으로 국왕과 세자가 신료와 군사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가는 강무는 군사 훈련도 겸했던 행사였다. 평소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로 체력을 다졌다.

  한편 국왕과 세자가 친히 밭을 가는 친경례와 누에를 치는 친잠례는 궁궐에서만 생활하는 왕세자에게 백성들의 생활을 일깨워 주는 뜻깊은 행사였다. 왕세자 교육의 완성은 왕세자 신분으로 왕의 업무를 대신하는 대리청정이었다. 대리청정은 왕이 노쇠하거나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을 때 실시되었다.

                     [한국양서보급중앙회 북멘토&북코치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