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문화연구소

루이스의 영성

북코치 2006. 3. 13. 19:59
루이스의 영성
C. S. 루이스를 만나는 즐거운 여행

 

 

 

   
▲ 라일 도싯 지음/오현미 옮김
휘튼대학의 메리온 E. 웨이드 센터에서는 C. S. 루이스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전하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 기록으로 남기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책은 7년이 넘도록 루이스를 아는 사람 42명을 인터뷰했고 그가 남긴 저술과 편지, 그의 낙서가 남아 있는 도서까지 모든 자료를 모았다. 이 모든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한 저자 라일 도싯은 이 책을 통해 루이스의 삶과 영성, 소명 등을 폭넓고 실감나게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왜 필요한가?
1958년 미국 장로교선교사 41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당신이 선교사가 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항목에서 50%가 ‘C. S. 루이스’라고 답변했다. 비록 오래 전의 통계지만 지금도 루이스의 영향력을 꾸준히 커가고 있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책이 나오고 있고, 점점 더 많은 독자가 생기고 있으며, 그의 책은 영화로도 제작 되고 있다. 그의 삶과 깊은 영성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반항적 회심자 C. S. 루이스
1898년 비교적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루이스는 어머님의 죽음 이후 기독교를 잊고 살았다. 최상의 교육으로 갈고 닦아진 대단히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1931년 회심하였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 후 자기 자신을 “영국 전체에서 가장 마지못해 회심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분명 잘 때도 입고 잔 듯)와 군데군데 담뱃불에 눌은 자국이 있는 트위드 재킷(담배와 파이프를 입에 달고 살았던 듯)에 한번도 광나게 닦아본 적이 없어 보이는 뒷굽 닳은 구두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영어권 세계에서 뭇 영혼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회심 후 32년 동안 거의 4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썼고 수많은 평론, 기고문, 시 등을 썼다.

루이스의 사명
그는 죽을 때까지 목회자는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목회의 사명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려움을 당한 자들에 대한 도움자로서의 사명을 굳게 믿었다.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위해서는 자신의 재산도 털었다. 그는 많은 강연을 다녔으며 먼 곳에서 도움을 구하는 편지에는 일일이 자필로 답장을 썼다.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와 그들이 보내오는 편지에 답장을 쓰는 것을 큰 사명으로 여겼으며 그것을 일생동안 놓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와 답장은 그가 죽는 바로 전날까지도 이어졌다.

루이스의 영적인 깊이
그의 성실한 자질은 회심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하게 했다. 철저하고 거르지 않은 성실한 기도 생활과 성찬 그리고 말씀 공부하는 것을 중요한 하루의 일과로 여겼다. 나중에는 성실하고 하나님께 탁월하게 헌신하는 영적인 안내자들과 교제하며 그의 영적인 깊이는 더욱 깊어갔다. 그가 받은 최상의 교육은 그의 신앙과 영적인 깊이를 더욱 심화시켜주는 도구가 되었다. 죽는 날까지 타인을 배려하고 하나님께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를 더욱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적인 깊음을 가지게 하였다.

루이스의 기도 생활
“기도하는 법을 배울 것” 이 한마디를 루이스는 갓 회심한 한 영혼을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 그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요약한다. 그는 “기도는 우리의 감정 상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시는 의지의 행위(하기 싫은 일로 치자면 기도는 아마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가장 강력한 상대일 것입니다)입니다.”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첫째, 대단히 많은 사람을 위해 충실히 중보기도했다. 둘째, 그는 남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겸손하게 기도했다. 셋째, 국제적인 기도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지속적이고 규칙적인 습관’에서 비롯되었으며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을 지식을 주었다.

영적인 친구들과 안내자들
루이스는 영적인 성숙함과 그리스도를 닮은 정도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깊은 지식 면에서나 자신보다 더 뛰어난 경험 많은 영적 의원을 찾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으로 루이스는 월터 프레데릭 애덤스 신부를 택했다. 1940년부터 1952년까지 루이스의 영적 발전에 애덤스 신부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
이외에도 SCMV 수도원 소속의 페넬로페 수녀가 있으며 1939년부터 1963년 11월 루이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반세기 동안 이어진 그들의 우정은 루이스의 영성 형성과 관련된 중요 요소가 되고 있다.

루이스의 위대한 편지 서신
1930년 후반 어간에 루이스는 자신이 받은 모든 편지들에 답장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게 되었다. 루이스는 죽기 전까지도 힘을 들여 답장을 썼으며 그의 답장들은 이제 많은 책이 되어 발간되고 있다. <고통의 문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말콤에게 보내는 편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 등등이 있다. 수많은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그는 한 통의 편지에도 소중하게 답장을 했다. 루이스는 답장을 통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그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뿐이라고 항상 이야기했다. 루이스는 이런 답장뿐 아니라 편지를 보내는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도 쉬지 않았다.

그의 수많은 책들에는 최고의 교육과 지성으로 다져진 뛰어난 문체와 단순한 문장을 구사했고 그래서 그의 산문 문체는 눈에 띄게 담백하다. 그는 유추법을 솜씨 있게 사용했고, 매혹적인 픽션(fiction)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기호화하여 표현했으며, 풍유와 은유를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의 저작들이 그토록 매력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의 깊은 영성(spirituality)이었다.

 


<진흥출판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