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 재평가
최덕성(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 서 론
일제 말기의 이른바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이 극에 달할 때 한국 장로교단 순천노회에 속한 교역자 대부분이 3∼4년간 옥살이를 했다. 노회원 목사 12명과 장로급 전도사 3명이 구속됨으로써 교역자 거의 전원이 수난을 당했다. 양용희 목사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광주형무소에서 옥사·순교했다. 교역자들이 수난을 받은 것은 당시의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신봉했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설교를 한 것이 국체 변혁을 기도한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들을 격리시켜 황민화 정책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무오(無誤)한 역사 기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에 대한 기존의 한국교회사 기술의 심각성은 지나치다. 신사참배사건과 관련된 광복 전후의 한국교회사의 역사 왜곡과 아전인수격 해석이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 사건의 초점을 엉뚱한 것에 두고, 사건 자체를 과대 평가하며, 그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자파의 자랑스런 신앙 투쟁사 혹은 항일 투쟁사의 일부로 엮으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경남· 서북·만주지역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을 폄하(貶下)한다.
순천노회 교역자 사건과 그것에 대한 기존연구가 제기하는 의문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이 사건은 과연 신사참배 거부 항쟁으로 인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순천노회는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 앞서서 그것을 거행하기로 결정했고, 소속 교역자들이 그것을 반대했거나 문제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도 기존 연구는 수난자들이 마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된 것으로 기술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 사건을 손양원 목사와 관련시킨다. 여수 애양원의 목회자 손양원이 마치 순천노회에 소속된 교역자였던 것으로 단정하고 손양원의 일제 항거를 순천노회의 신앙투쟁사 혹은 항일투쟁사의 일부로 엮는다. 이명동일신설(異名同一神說)이라는 것을 주장한 박용희 목사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선동한 주범"으로 내세운다. 이 모든 것은 사실과 다르다.
둘째, 신사참배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기독교계 전체가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들은 무려 3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위협하는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도록 가르친 바도 없다. 신사참배 문제는 "전 조선적 큰 문제"였고, 선교사들이 노회에서 탈퇴하고, 매산학교를 포함한 다수의 미션 스쿨들이 선교사들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자진 폐교 형식으로 문을 닫는 지경에, 또 자신들이 3∼4년간씩 고통스런 수난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는 개의치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신사참배 거부운동 전남지역 책임자 손양원은 애양원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을 당한 이기풍 목사는 우학리교회에서 각각 목회를 하고 있었다. 손양원은 부흥사로서 순천노회 관할 내의 교역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여러 지역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나덕환 목사와 김형모 목사는 손양원과 특별한 친분이 있었다. 나덕환은 순천읍 남문교회 재직시 손양원을 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한 바 있고, 김형모는 손양원의 평양신학교 동기생으로서 애양원교회로 하여금 손양원을 교역자로 청하게 한 자이다. 애양원에서 몇 차례 신사참배 반대에 대하여 역설한 것을 보면 그 지역 목회자들과 더불어 이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들은 한결같이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일제는 손양원·이기풍을 순천노회 교역자 사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셋째, 순천노회가 일찌감치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들이 모진 수난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은 것은 혹시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이라는 불경신관(不敬神觀)의 영향때문은 아닌가? 일명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이라고 불리는 박용희의 신학은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이 다르지만 실상은 같은 신이라는 이론이다. 기존의 연구는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이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을 "무의미화"시킨 것으로 본다. 그러나 오히려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무의미화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무의미화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치하의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순교의 의미를 무의미화하는 사상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교란시키고 방해한 것과 흡사하다. 교역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 저항을 하지 않은 것과 박용희의 신학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어 보인다.
2. 애양원교회, 손양원 그리고 순천노회
광복 이전까지 주한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일선에 서서 지도하던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장로교의 경우, 한국교회와 공식적인 관련을 가진 선교사들은 사역지 관할 노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순천지역에서 선교하던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순천노회원이었다. 1938년 4월 25일 밤 구례읍예배당에서 모인 순천노회 제22회 정기노회는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의했다. 평북노회 다음으로 일찌감치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가결했다. 일본식 국민의례로 시작된 노회는 오석주·김상두·김순배 3명이 제출한 신사참배 안건을 채택했다. 이어서 "① 국기게양, ② 황거요배, ③ 신사참배, ④ 조선총독부의 지원병 교육령 개정 제도에 대한 감사 전보할 일, ⑤ 해군최고지휘관에게 위문 전보할 일, ⑥ 신사참배에 대하여 총회에 상고할 일, ⑦ 본 노회 각 교회에 공문을 발송하여 신사참배를 지도할 것" 등을 결정했다.
한국 장로교 총회(제27회, 1938)는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의한 그 해 가을에 그것을 결의했다.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직후인 1938년 9월 28일에 임시회의를 열고 즉각 한국 장로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그리고 소속된 각 노회를 탈퇴하기로 했다. 이 결의 사실은 즉각 소속 노회에 통보되었다. "아등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교회에 신령상 유익을 좇아 이상과 같이 기도하는 중에 결정하였습니다." 우상숭배를 행하는 교회를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함께 사역할 의의가 없다는 것이었다. 순천 매산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1937년 9월에 폐교되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다수의 학교들이 폐교되었다.
순천노회에 속한 선교사 변요한·구례인·원가리 3인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남장로교회의 탈퇴 결의가 있기 전에 이미 순천노회를 탈퇴했다. 순천노회(제22회, 1938년 4월)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즉각 탈퇴를 선언했다. 우상숭배를 행하는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애양원교회는 신풍리에 소재했고 신풍교회라고도 불린다.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관할 하에 있는 한센씨병 환자 요양병원에 소속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특성상 선교사들의 지도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때로부터 선교사들과 함께 순천노회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몇 가지 신앙투쟁의 흔적들에 비추어 볼 때 이 교회는 선교사들의 지도를 단순히 따른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순천노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교회로 존재하면서 처음에는 원가리의 지도하에, 나중에는 손양원의 지도하에 우상숭배를 행하지 않는 교회로서 신사참배 거부운동 노선을 따랐다.
손양원이 부임하기 전의 이 교회 목회자인 김응규 목사는 1938년 6월 18일에 당회의 권유를 받아 교회를 사면하기로 하고 그 해 10월말에 제주도로 사역지를 옮겼다. "한 5, 6가지 사항에 의하여 본교회의 담임권을 사면하시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는 장로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장로들이 제기한 사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원가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또는 교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신사참배를 지지했고 그것이 이임하게된 주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일제 검사는 손양원에게 순천노회의 신사참배 결의 사실과 이 결의 결과로 인한 순천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탈퇴 및 분리로 인해 "애양원교회도 그래서 순천노회에서 분리되도록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손양원은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검사가 "김응규는 순천노회의 결의를 찬성하여서 원가리가 동 원 교회에서 김응규를 몰아낸 것이 아닌가?"라고 묻자 손양원은 김응규가 신사참배를 찬성한 반면에 자신과 원가리는 신사참배에 대해서 불찬성했다고 답했다. 김응규가 떠난 것은 그가 신사참배를 지지했기 때문이며, 손양원이 후임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의 적극적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친일파 인사들의 구설(口舌)의 대상이 될 정도였고, 그것은 애양원교회와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 원리와 일치했다. 애양원교회는 "신사참배 안 하는 목사가 참 목사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애양원교회는 원장 원가리(元佳里: James Unger)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는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즉각 순천노회로부터 탈퇴했다. 1925년부터 1937년 9월까지 순천 매산고등학교 교장으로 사역한 바 있었다. 순천 선교부가 한국교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끊기로 결정할 무렵, 애양원교회와 순천노회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그 시대는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교역자 다수가 배척을 받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하는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에 아부하는 교회 주도자들에 의해 목사직이 박탈되고 교회에서 축출 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때였다. 그같은 상황에서 애양원교회가 우상숭배를 지지하는 교역자를 배척한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며, 교회사적 중요성을 지닌 사건이다.
손양원은 1939년 8월에 애양원교회에 부임했다. 호남지방 교회사와《순천노회사》는 손양원을 순천노회에 소속된 교역자로 분류한다. 손양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순천노회 항쟁사로, 그의 사랑의 원자탄과 동인·동신 군의 죽음, 그리고 공산당에 항거한 손양원의 순교보도 순천노회사의 일부로 기술한다. 그의 체포, 구속에 대한 기록에서도 손양원을 박용희와 대등한 차원에서 다룬다.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에 대한 근년의 통합측 교단의 연구보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손양원을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로 기술하고 그의 신사참배 항쟁을 순천노회의 자랑스런 항일 항쟁의 일부로 기술한다.
그리고 순천노회 교역자들의 수난 사건을 신사참배 거부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실과 다르다. 순천노회와 애양원교회·손양원의 관계를 잘못 파악하거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손양원은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가 아니었다. 손양원은 애양원 교회가 신사참배문제로 순천노회와의 관계를 끊고 독립교회로 존재할 때 부임했다. 그는 본래 경남노회에 소속한 교역자였다. 경남노회 순회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그것 때문에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교역자들의 미움을 샀고, 이로 인한 일련의 어려움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애양원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신사참배 안 하는 목사가 참 목사이다"라는 애양원의 확신이 그의 청빙으로 이어졌다. 손양원은 광복 후인 1946년 3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경남노회 내의 진리운동, 교회재건운동, 참회운동에 협력했고, 고려신학교의 설립에 동참했다. 1948년부터 순교할 때까지 고려신학교의 총무로 봉사했다. 손양원이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들과의 만남과 집회 인도 등의 관련성을 갖고 있었지만 순천노회와의 치리회적 관계는 없었다. 기록에 나타난 유일한 흔적은 1949년의 제29회 순천노회시에 발언할 기회를 얻어 애양원 환자들이 장로교 총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린 것이 고작이었다.
애양원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원장 원가리의 지도하에서 순천노회가 신사참배 시행을 결정할 때부터 1950년에 손양원이 순교하기까지 순천노회의 관할 아래 있지 않았다. 신사불참배교회로 존재했다. 손양원이 광복 후에 경남노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을 때의 노회장은 친일파 인사 김길창 목사였다. 후일에 재건교회 지도자가 된 최종규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손양원의 안수식을 주례하려고 했을 때 벌어진 흥미로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46년 봄인 듯하다. 마산 문창교회 신관에서 손양원 목사 장립 안수식이었다. 이 목사를 장립시키고 안수를 주기 위해 모인 자가 바로 김길창을 중심한 사람들이다. 또 가관은 손양원 씨가 강단 위 의자에 앉아서 장립을 받으려고 기대하고 있는데 김길창 왈 장립을 받을 사람은 밑으로 내려가라고 하니 겸손을 표명한다고 손씨는 다시 밑으로 내려오니까 일반 신자는 승리의 종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또 올라가라 하니 이를 순종한다고 또 다시 올라간다. 이리하여 손씨 목사 장립은 그 자리 문제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꼴을 보았다. 의분도 났고 또한 마음으로 낙망도 했다. 마귀의 기관은 어디까지나 뻔뻔한데 의분이 안 날 수 없었다. 그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직을 마귀의 기관인 그들의 손에서 안수를 받으려는 손씨의 신앙과 옥중생활을 의심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울었다. 그 광경을 보고 더 참을 수 없었다. 그만 뛰쳐나왔다. 암흑의 세계는 옥안이나 옥 밖이 일반인 것처럼 부패한 정신과 사상은 출옥한 성도[라는] 미명하에 여전히 잠재함을 발견하고 이들이 운전한다는 교회에 가담할 수 없어 그 후부터 다시 교회의 출석을 그만 두었다. 그들의 재건과 신앙운동에 기대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손양원은 애양원교회의 목회 시초부터 "목사"였다. 부임한 1939년 8월에 "당회장권"이 주어졌다. 경남노회에 속한 강도사였던 그는 애양원 원장 원가리 선교사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손양원의 딸 손동희는 "아버지는 1939년 봄에 애양원에서 원가리 목사님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으셨다"고 한다. 당시 애양원교회의 교우 이이섭, 양재평 장로의 증언도 손동희의 증언과 일치한다. 원가리에 의한 손양원의 목사 안수는 교회론적, 치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가리는 순천노회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목사 안수를 행했다. 그는 신사참배문제로 순천노회를 탈퇴했고, 한국장로교단과 관계를 끊고 있었다. 기존의 장로교 총회, 노회와 관계없는 목사 안수례를 시행한 것이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본 것은 기존의 한국 장로교회를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직기구 밖에서 목사 안수를 집행한 것은 기존 장로교 총회와 노회의 치리회적 질서와 권위, 그리고 참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배도하는 기존의 교회기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직 안수나 지하교회 운동을 분리주의적 교회운동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들은 경남지방, 서북지방, 만주지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사참배 거부운동 교회와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애양원교회, 원가리 그리고 손양원은 당시의 조선예수교장로회라는 조직기구에 속하지 않았다. 손양원은 당시의 총회가 적(敵)으로 간주하여 박해한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전남 책임자였다. 애양원교회는 한상동·주기철·채정민 등이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 노회를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이 시도된 새 노회가 성사되었더라면 분명히 그 신생 노회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3. 순천노회와 신사참배 문제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에 대한 일제의 판결문은 교역자 15명의 개인별 혐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판결문은 일제에 의해 잘 훈련된 검사가 치밀하게 조사하여 작성한 것이다. 제22회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지만 피고인들 가운데는 신사참배를 우상으로 보는 자가 있고, 표면적으로는 신사참배를 긍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의연히 그것을 우상시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형무소에 끌려온 잡범도 "조선 사람이 일본 천황의 선조 귀신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던 분위기였으니, 교역자들이 신사참배를 의연히 우상시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피의자 어느 누구도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기소되거나 수난을 당한 바 없다. 검사 앞에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이기에 자신이 그것을 거부한다거나 교인들에게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말한 바도 없다.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 사건 관련 교회사는 일제히 그들이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을 당한 것으로 기술한다. 김승태는 순천 교역자들에 대한 일제의 판결문을《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책에 포함시키고 있다. 통합측 교단의 위 보고서는 그들이 신사참배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피의자 혐의 내용"을 도표화하여 일목요연하게 실으면서도 그것을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사건으로 분류한다.《순천노회사》는 양용근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순교한 것으로 기술한다. "끝까지 일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시다가 광주형무소에서 1943년 12월 5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의 길을 가셨으니 이 소식을 들은 일경은 구례읍교회 사택에 있는 유가족을 쫓아 내버리고 말았으니 결국 일본은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나덕환 목사를 "신사참배 거절로 투옥"된 "살아 있는 순교자"로, 김정복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광주형무소에서 3년 6개월의 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한 것으로 기술한다. "일제의 압박 아래 신사참배 반대로 많은 고난과 순교까지 당했던 순천노회"라고 자랑한다.
순천노회는 1954년 6월에 신사참배 거부사건으로 인해 생긴 순교자 유가족 구호책으로 특별헌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 교회와 우리 민족의 최대 희생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절개와 한국민족의 양심을 사수한 이들의 순결한 피를 감격의 눈물 없이 회고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피로써 최고 최[대]의 영광을 땅에서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교회와 민족의 생명을 유지케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유족들을 돌보기로 했다. 여기의 "그들"이라는 표현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이기풍 목사 유족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양용근 목사 유족을 포함시켰다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순천노회 교역자 사건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수난 사건이 아니다. 천년왕국론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말세학을 가르친 것이 이른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반대될 뿐만 아니라 국체변혁을 꾀한 것이라고 하여 기소되었다.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일제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 때문에 수난을 겪지 않은 것은 그들이 속으로는 신사참배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의연히 우상시했을지라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도,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남과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전개되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말살하려는 과정에서 우연히 순천 교역자들의 종말론 사상이 발견되었고 한 건의 실적을 올리려고 하는 일경의 저인망에 걸려들었다. 그것은 공개적 저항운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거부항쟁이었던 신사참배 거부운동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교역자들이 거의 다 체포되자 순천노회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그 결과로 제29회 총회(1940)를 끝으로 광복까지 노회가 모이지 못했다. 노회가 회집되지 않았으므로 총회에 보낼 총대가 선출될 수도 없었다. 교역자들은 1940년 9월 20일 경에 체포되었다가 잠시 풀려났으며, 11월 15일 경에 다시 구속되었다. 박용희는 3년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외에는 1년 6개월 및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1944년에 이르러 비로소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양용근 목사는 복역 중 광주형무소에서 1943년 12월 5일에 순교했다.
《순천노회사》는 순천노회가 1940년 가을부터 회집하지 않은 까닭을 "노회가 모이면 신사참배를 해야 함으로 모이지 아니"한 것으로 본다. 또 순천노회 총대들이 제30회, 제31회 총회까지 참석하지 아니한 것은 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으로 기술한다. 김수진·주명준이 작성한 통합측 교단의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매번 개회 시마다 국민의식이라 하여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기 때문에 "순천노회는 이러한 총회에 총대를 보낸다는 것은 신앙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1941년부터 총대를 파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순천노회가 총대를 파송하지 않은 까닭을 밝히면서 뜻밖에도 총회 30주년 기념사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이 기념사의 내용은 한국교회의 배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순천노회 수난사건을 신사참배 거부와 관련시키려는 교회사가들의 의도성이 역력하다. 이 사건을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역사를 기술한 것은 몰지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순천노회가 총대들을 총회에 보내지 않은 까닭은 간단하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천년왕국 등을 골자로 하는 말세학 때문에 교역자 대부분이 옥중에 수감되어 노회가 성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회는 장로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노회가 구성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총대를 선출할 수 있었겠는가. 신사참배를 의식해서 총대를 선출하지 않았거나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순천노회 교역자들은 광복 전인 1944년에 출옥했다. 일제는 중병이 아닌 이상 전국 어디에서나 신사참배정책에 항복하지 않는 비 전향자를 출옥시키지 않았다. 전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기풍의 경우처럼, 죽음이 임박한 자는 풀어주었다. 물론 예외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순천노회 교역자들의 출옥이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사참배는 전 민족적인 사건이었고 그것을 시행하지 않고는 생존이 어려웠다. 그들은 신사참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순천노회 교역자들은 1944년에 출옥한 후에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소속으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목회자로 목회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서는 목회사역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출옥 후에도 이전처럼 신사참배를 행했거나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로서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한 유일한 인물은 우학리교회에서 시무하던 고령의 이기풍 목사였다.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된 바 있는 그는 1938년 1월에 남면 우학리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였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로 여수 경찰서에 구속된 시기는 순천노회 교역자들이 종말론 신앙 때문에 구속을 당한 시기와 동일하다. 여수형무소, 광주형무소 등을 거쳐 옥살이를 하던 중에 심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풀려났고, 1942년 6월 20일 주일 아침에 77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본향으로 돌아갔다.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했다.
손양원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까닭으로 역시 순천노회 교역자들과 같은 시기에 체포되어 수난을 당했다. 1940년 9월 25일에 구속되었다가 5년간의 감옥생활을 한 후에 광복과 더불어 풀려났다. 1941년 11월에 광주 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쳤으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전향을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광복될 때까지 옥고를 겪었다. 손양원과 이기풍은 순천 교직자들과 동일한 시기에 체포·심문·고문·구금당했으나 일제는 같은 사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수난 동기가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들과의 그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순천노회 교역자들은 광복 후에도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과거사 청산, 양심회복, 교회의 성결성 회복, 교회의 민족적 정체성 회복 등에 대한 통찰이 없었거나 무관심했다. 신사참배문제에서 초록이 동색인 처지에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공적 참회와 과거사 청산 문제를 거론할 정도는 아니었다.
4. 이명동일신설(異名同一神說)
교회사가들은 박용희 목사(1884∼1959, 당시 59세)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의 핵심 인물인 그는 순천 출신으로 잡화상을 경영하다가 일본의 가시와기(柏木) 성서학원과 평양신학교에서 각각 수학하고 졸업했다. 목포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7년에 순천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교정위원을 지낸 경력이 있으며, 교리에 대한 조예가 깊어 순천노회에서 그에 비견할 만한 자가 없으며, 교회(총회) 간부를 거듭 지낸 자"이다. 3·1운동에 참여했으며, 한성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했다. 신간회 안성지부장(1927)을 지냈고, 경기노회장(1927), 순천노회장(1939)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신민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했고, 조선신학교 이사장, 기독교장로회 총회장(1954∼1956)을 역임했다.
상당수의 친일파 인사들이 그러했듯이 박용희는 한때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지만 나중에는 진보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3·1운동 당시의 반역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는 출세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그는 신흥우가 주도하는 적극신앙단에 가입하여 "교회를 혼란케" 했다. 전필순·함태영·권영식·최석주 등과 더불어 반(反) 선교사, 반 보수정통주의자로 활약했다. 재경 기독교 유지대회 대표 김정식 외 11명은 그의 자유·진보주의적 활동에 대해 경성노회를 경유하여 총회에 고소장을 냈다. 박용희는 총회가 제재를 가하려고 하자 함태영 등과 함께 총회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제24회 총회(1935)는 친일단체인 평양기도단을 정죄하는 것과 함께 박용희를 비롯한 장로교 목사들이 적극신앙단에서 탈퇴할 것을 명령했다. 만약 총회와 절연을 선언한 그들이 그 절연한 태도를 반성하지 않고, 성명서 발표와 더불어 탈퇴하지 않으면 해당 노회가 각각 권징조례(6장 42조)에 근거하여 치리하도록 명했다. 총회가 이것을 결의하여 명한 것이 1935년 가을이었으니 박용희는 일찌감치 친일파와 궤를 같이 하는 자유·진보주의자로 활약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박용희가 체포된 것은 일본을 악마의 지배하에 있는 반기독교 세력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공왕정치국가(共王政治國家)를 건설하지 않으면 인류의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논지로 천년왕국건설을 설교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홀리네스교회 창설자인 나카다(中田重治) 목사의 성서 강의를 청강한 바 있다.
순천중앙교회 목회자 박용희를 비롯한 순천노회 교역자들의 수난 사건은 순천노회 내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황두연 장로를 잡아 가둔 일경은 그가 중앙교회 장로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원탁회가 박용희 목사와 연관을 갖고 있는 정치적 비밀조직체는 아닌가 하여 조사범위를 박목사에게 확대"했다. 박용희의 전력을 알고 있는 왜경은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순천중앙교회 장로 황두연은 순천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 평신도 그룹의 핵심인물이다. 신사참배 거부로 4년간 구속당했다. 순천노회 면려청년회장을 다년간 역임했고, 그 조직을 이용해 기독청년들에게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원탁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었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 청년면려회 회장직을 다년간 감당해 오던 터라 이 조직을 타고 각 교회에 신사참배 반대의식을 부각시킬 심산이었다. 그 첫 단계로 모교회인 순천중앙교회 청소년 중 강창원·장금석 군 등 10여 명을 규합하여 성경연구를 한다고 앞에 내어 걸고 실제로는 신사참배 반대를 위한 원탁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황두연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가 아닌, 바알우상 곧 천조대신을 섬기는 큰 죄악이니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니 참배해도 좋다는 것은 단지 환란을 피하려는 괴변이라고 보았다. 황두연은 원탁회의 목적이 단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말세론을 부각시킨 일이 없다"고 밝힌다. 순천 교역자 수난사건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다.
어느 날 원탁회 회원인 강창원의 집에 일경이 들이닥쳐 소지품과 일기장을 압수했다. 일기장에 "신사참배는 우상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자 일제의 수사가 확대되고, 황두연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용희를 비롯한 교역자 대부분이 일경의 의심을 받았다.
교역자들이 체포된 직접적인 까닭은 선교부 재산을 지키던 변요한(J. F. Preston) 선교사가, 미국과 일본의 적대관계가 심화되면서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난 후 마지막으로 순천지역에서 떠나는 것을 배웅한 것과 관련이 있다. 박용희는 선교사와 노회원들을 초청하여 환송 점심을 나누었고, 이튿날 순천역에서 나덕환·김형재 목사와 김종하 장로 등과 함께 그를 전송했다. 이 사실이 전라남도 경찰부에 제보되었다. 일경은 그들이 미제국주의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트집잡았다. 조사 심문 결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밝혀졌지만 예수재림과 말세론을 설교하여 민중을 선동한 것이 치안유지법에 저촉된다는 까닭으로 구속되었다. 같은 시기에 경남과 서북지방, 만주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그것과 유사한 움직임조차도 억제하려고 하던 일경의 저인망에 걸려든 것이다.
황두연이 박용희가 시무하는 순천중앙교회 장로였다는 까닭으로 박용희도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또 반대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박용희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선동한 주범"으로, 원탁회 고문으로, 원탁회 사건이 순천중앙교회에서 시발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주로 그러한 까닭 때문인 것 같다. 박용희가 3·1운동에 참가했고, 신간회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사 청산을 위해 일찌감치 적극신앙단을 통해 진보적인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불과 4∼5년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박용희와 신사참배 거부 활동의 관련성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황두연이 주도한 원탁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천노회를 탈퇴한 선교사들과 신사참배 거부운동 전남 책임자 손양원과의 관련성이 크다. 황두연은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순천[알렉산더]병원 서무과장으로 있으면서 원탁회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천노회를 일찌감치 탈퇴하고 배도하는 한국교회와 관계를 끊은 선교사들을 통해 신사참배에 대한 각성을 가진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을 통해 손양원과 잦은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두연은 "손양원 목사가 시무하던 여수 나병원(애양원)에 자주 찾아갔다." 그가 일하던 알렉산더 병원과 손양원이 일하는 애양원은 자매병원이었다. 왜경은 박용희의 이명동일신설을 가지고 황두연을 포함한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을 회유하려고 했다. 담임목사가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 문제될 바 없다고 하는데 왜 그것을 반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황두연은 강한 어조로 원탁회 사건과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 사건의 성격을 구분하다. 원탁회는 신사참배거부가 그 핵심이지만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순천노회는 총회가 신사참배 시행을 결정하기도 전에 그것을 결정했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배후에는 지도급 인사 박용희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용희는 순천노회의 지도급 인사였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그 이듬해에 순천노회는 박용희를 노회장으로 선출했다. 부노회장이 노회장으로 선출되는 관례를 깨고 선출되었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하고 총회장 홍택기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몇 개월 후(1939년 5월 8일)에 모인 노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노회는 선재련 목사를 부노회장으로 선출했다. 선재련은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이라는 불경신론에 대한 신봉자였다. 이듬해인 1940년 5월 5일에는 선재련이 회장으로, 김순배 목사가 부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에 파송된 목사 총대는 선재련·오석주·김순배(부), 황보익(부) 제 씨였다. 오석주·김순배는 신사참배 시행 결의를 제안한 특별위원이었다. 이처럼 1938년에서 교역자들의 수난이 시작된 1940년 말까지, 순천노회는 동근동조론, 이명동일신설을 주장한 자들과 신사참배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자들의 독무대였다. 적극신앙단 멤버였던 박용희의 지도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박용희는 교리에 대한 조예가 깊어 순천노회에서 그와 비견할 만한 자가 없었다. 그는 신사참배가 전혀 기독교 신앙에 위반되지 않거나 문제시되지 않는다고 믿었고, 또 그것을 이론화하여 동역자들이 신사참배를 문제시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박용희의 이명동일신설은 동근동조론(同根同祖論)이라고도 불린다. 일제가 불경신관(不敬神觀)으로 단정한 이 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각국에 있는 최고신은 일본에서는 천조대신, 유태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중국에서는 上帝, 조선에서는 하느님(天神)인데 기독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 절대 최고 지상의 신이기 때문에 결국 각국의 최고신은 호칭은 각각 다르지만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명칭은 다르지만 동일신이므로 신사참배는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왜경은 원탁회 사건을 조사할 때 박용희의 위 신학이 담긴 설교문을 발견했다. 그는 불경신관을 내세워 신사참배를 행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전혀 꺼림이 없다고 가르쳤고, 그것을 설교했고, 동역자들을 권면했다.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하여 이러한 지도이념을 기초로 오랜 동안에 걸쳐 교도들에게 설교를 하고 이를 지도해"왔다. 교역자들의 수난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이 동일한 신이므로 신사참배를 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쳤다.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들에 대한 일제의 판결문은 박용희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과 그가 동역자들에게 신사참배를 하도록 설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재련이 말하기를 "박용희 목사는 대 선배로서 자기는 그 목사로부터 교리문제와 더불어 교회의 정치문제 등에 대하여 지도를 받고 이명동일신설을 들어 이 설에 따르면 신사참배 문제도 교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므로 자기도 이 설에 찬성하고 앞으로는 이 방침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를 일단 정하였다"고 말하고 "이러한 뜻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여 이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박용희는 이명동일신설을 주장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유포했다. 신사참배 거부항쟁이 무의미하므로 공연(空然)히 수난을 자초하게 될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말고 그것을 행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한 것이다.
선재련이 박용희의 이명동일신설을 수용한 것은 박용희의 적극적인 설득때문이다. 선재련은 박용희가 목포 중앙교회에서 순천 중앙교회로 부임해 왔을 때부터 그와 친교를 맺고 교리상 지도를 받아오면서 그것을 신봉했다. 신사참배가 전 조선적 문제인 상황에서 박용희가 자신의 독창적인 신학을 단지 선재련에게만 소개했을 것 같지 않다.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지도 이념을 기초로 오랜 동안에 걸쳐 교도들에게 설교를 하고 이를 지도해 왔다고 하는 위 판결문과 선재련이 그것의 추종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박용희가 다른 노회원들에게도 그것을 수용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상의 증거들은 순천노회 산하 교역자들이 3∼4년간의 수난을 당하면서도 아무도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를 표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거부하도록 교인들에게도 설교하지 않았으며, 순천노회가 일찌감치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 등은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박용희의 적극적인 설득과 지도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교역자들이 그의 이론을 수용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1938년 어쩌다가 강압에 눌려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하기는 했지만 순천노회에 있는 대부분의 지도자 마음속에는 신사참배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무래도 환난을 회피하려는 얕은 궤변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3년여 동안 모진 옥살이를 하면서도 신사참배에는 반대하지 않았고, 신사참배에 대한 비 전향자는 일체 출옥시키지 않는 상황에서 1944년에 생존 교역자 전원이 출옥했다. 신사참배를 시행하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는 상황에서 목회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신사참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시하지 않았고, 노회의 결정에 따라 묵묵히 그것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박용희의 신학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고, 일면 신사참배를 우상시하는 자도 있었던 것 같다.
순천 교역자 사건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김승태는 박용희가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유일신이신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마음만 있으면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본다. 일제가 신사참배 강요를 통해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여 황민화하려고 했지만 박용희의 신론이 그 근본적인 의도를 무의미화 한 것으로 해석한다. "본 뜻은 유일신인 기독교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신사참배의 의미를 무의미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문은 어떻게 이 같은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김승태는 일찌감치 적극신앙단원으로서 교회를 혼란케 했으면서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목회를 하고 종말론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인사의 "본 뜻"을 어떻게 파악한 것일까?
박용희의 신론은 도리어 제1계명과 제2계명, 그리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생명을 건 투쟁을 무의미화하는 이론이다. 그의 신학에 따르면 우상숭배 거부 항쟁은 무의미하다. 천조대신이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만 다를 뿐 뿌리가 같은 신이기 때문이다. 박용희의 이론이 교회에 가져다 줄 수 있는 해악은 고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이 로마 치하의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해악과 유사하다. 로마 치하의 기독교인들은 자칭 예수의 정통 제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영지주의자들은 박해를 받지 않았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은 예수는 육신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고난을 당하지 않았으며, 고로 죽음으로써 그의 증인(martus)이 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에 따르면 신사참배를 거부할 까닭이 없고, 그것에 대한 거부는 공연히 일제의 핍박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김승태는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행한 설교를 예로 들어 박용희의 신론이 신사참배의 의미를 무의미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용희의 가르침은 바울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우상성이 강한 아테네 사람들이 신이라고 하여 만들고 이름을 새긴 것들이 많지만 사실은 그 모든 우상이 헛된 것이며 참되시고 유일한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유일신이 천조대신, 여호와 등 여러 형태의 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상을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박용희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파악한다.
김수진·한인수는 이것을 종교다원주의 개념으로 풀이한다. "일본의 천조대신을 포함한 모든 세계의 신들은 지역·민족·풍습·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나온 것으로 모든 종교의 근원은 한 하나님이고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뿐임을 주장"한 것으로 본다. 박용희의 신학을 두둔하면서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이 명칭만 다를 뿐 동일한 하나님이므로 그것을 행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고 본다. 김수진·주명준이 작성한 이 사건에 대한 통합측 교단 보고서도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을 같은 시각으로 평가한다. "각국에 있는 최고신은 일본에서는 천조대신, 유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중국에서는 상제(上帝), 조선에서는 하느님인데 기독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 절대 최고 지상신이기 때문에 결국 각국의 최고신은 호칭이 각각 다르지만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으시기 때문에……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명칭은 다르지만 동일신이므로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 장로교회 신경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 등 전통적인 교리표준 그 어디에서도 각종 신들이 지역·민족·풍습·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백하는 곳은 없다. 박용희의 신관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경이 제시하는 신관과 다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니 오직 이만 경배할 것이라. 하나님은 신이시니 자연히 계시고 무소부재하며 다른 신과 모든 형용물과 부동(不同)하시며 그 계신 것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시는 일에 대하여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변치 아니하시니라"고 고백해 왔다.
경남과 서북지방 그리고 만주지역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것은 "홀로 하나이시며, 다른 신과 모든 형용물과 부동(不同)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일신 여호와에 대한 증인이었지 각종 신들을 지역·민족·풍습·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종교다원주의 신론의 증인이 아니었다.
박용희의 신관은 진보주의적, 종교혼합주의적 뉘앙스와 왜색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도 일제가 그것을 불경죄로 단정한 까닭은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라는 질문에서 "천조대신이 더 높다"라고 단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전국의 모든 교회에 공문을 보내어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천조대신이 더 높다"는 문항에 교회 책임자가 공적으로 서명을 하지 않으면 교회당을 폐쇄했다. 박용희가 천조대신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보는 것은 감히 "지존자 천조대신"에 대한 신성모독이며, 불경죄에 해당했던 것이다.
신도(神道)의 신은 유일신 하나님이 아니다. "자연히 계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다른 신과 모든 물질과 구별되시며……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도교는 다신교요, 기독교는 유일신교이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은 바로 이 신관때문에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수난을 당했다. 기독교계 학교들이 문을 닫고, 주기철·최상림·최봉석·박의흠·박관준이 순교한 것은 이 같은 정통 신론을 진리로 믿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박용희는 민족주의 단체인 신간회 안성지부장을 지냈다.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 시대에 걸맞는 적극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는 일제 치하에서 출세할 수 없었던 같은 처지에 있던 다수의 친일 교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적극신앙단원이 되어 한국교회를 혼란케 했다. 이 점에서 볼 때 그의 불경신관은 자신의 일제에 대한 반역적 과거사를 청산하는 표로 삼으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진보적, 종교혼합주의적 신론을 가지고 순천지역 교역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권했던 것이다.
이명동일신론은 이단적 궤변이다. 기독교 유일신론을 가장한 잡신교적 혹은 다신교적 유일 신론이다. 우상숭배 거부 항쟁과 순교 신앙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겼던 고대의 영지주의자들처럼 박용희 신학은 일제 치하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의 의미를 무의미화시켰다. 순천노회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신사참배를 일찌감치 결의한 것과 3∼4년간 수난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않은 것과 아무도 신사참배를 행하지 않도록 가르친 바 없는 배후에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진다.
5. 천년왕국론과 국체변혁 선동죄
순천노회 교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가르친 시기는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인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였다. 그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파의 공통 지도 이념인 이른바 말세학의 그릇된 세계관"을 지도 원리로 하여 포교에 종사했다.
현재 사회는 악마가 조직한 사회라고 저주 부인함과 동시에 수년 후에는 예수의 재림에 의하여 지상천국의 신사회를 초래할 것이라고 몽상하여 기대하고, 이 신사회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예수의 계명을 범하지 않고 충실히 믿는 신도들뿐이라는 사상에 기초하여, 우리 국체의 변혁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이를 모체로 하여 전 조선에서 동지를 획득하고 지상천국 건설을 기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황 및 황대신궁에 대하여 불경스런 언동 또는 군사에 관한 유언비어, 총후 국민에 대한 反官 내지는 국가적 기운 조성 등 악질적 범죄를 감행[했다].
순천 교역자들은 악마는 하나님을 거역한 천사로서 낙원에서 추방당한 후에 지상에서 인류를 정복했고, 그 후 인류 사회는 악마가 지배하는 곳이 되었으며, 인류는 고통과 환난의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확신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할 목적으로 재림할 것이다. 하나님은 악마의 지배하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와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고 3일만에 부활했다. 40일간 그의 제자인 사도에게 전도하고 승천했다. 근자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은 말세의 증상들이다. 그리스도는 먼저 공중 재림하고, 7년간 공중에서 혼인 자리를 배설할 것이다. 이 기간 지상에서는 대 환난이 일어나 기독군(基督軍)과 불신자 사이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결과 악마의 지배하에 있던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 국가는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그 조직 제도가 파괴당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수반으로 하는 이상왕국은 1천년에 걸쳐 지상에 존재 할 것이다. 독실한 신자만이 왕국의 백성이 되고, 불신자 및 악마는 무저갱에서 자유를 속박당할 것이다. 천년왕국의 말기에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을 하기 전에 무저갱의 상태에 두었던 불신자 및 악마를 해방하면 그들은 세계의 반(反) 그리스도 세력을 규합하고 반역하고 '곡, 마곡'의 전쟁을 일으켜 도전하지만 기독군에게 격멸된다. 최후의 심판 결과 불신자 및 악마는 지옥에 빠져서 영원한 죽음을 당하고 지상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 하늘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교도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기독교인이 성경에 허용하지 않는 일을 국가로부터 강요당할 때 이를 거부하면 당장은 박해를 받지만 천년왕국에서는 행복하고 평화스런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순천노회 교역자들의 천년왕국 사상은 각 국가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눈에는 그것이 국체 관념을 교란시키며, 현존 세계 질서를 붕괴하는 국체변혁 사상으로 비쳤던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확신과 동일한 것이었다. 천년왕국론은 한국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핍박을 이겨내고 종말론적인 희망을 갖도록 했지만 일제는 그것을 국체변혁을 꾀하는 망신(妄信)으로 간주했다.
일경은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교역자들에게 각각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믿는가라고 물었다. 오석주 목사(고흥군 관리중앙교회)는 무천년설 신봉자였다. 신사참배 문제와 일제 통치 및 박해 사건을 "정의와 부정의"의 관점에서 파악했다. 무천년설에 입각한 임박한 종말을 외치면서 친일파 인사들을 다음과 같이 질타했다.
현재 부를 얻기 위하여 사람은 정의가 아닌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있고 정부도 그런 자를 보호하며 그 세력을 조장하기 때문에 不正義가 멸할 때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의는 부정의에 압도되어 넘어지는 바에 있어서 박해를 받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가르침은 땅에 떨어지고 사람은 고통과 노고가 끊일 사이가 없어 현세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새로 건설된 하늘나라에서는 현세의 부정한 재력으로는 아무런 세력을 가질 수 없고, 만인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오석주가 무천년설을 배운 것은 평양신학교에서였다. 그는 배운 대로 "말세학의 정신에 기초하여 교도들에게 대하여 일상 설교를 하고……종래 지상에 있는 각 국가를 멸망시켜 그리스도를 통치자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설교"했다.
김정복 목사(고흥읍교회)는 후천년설 신봉자였다.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그는 그리스도는 언제 재림할지 모르나 재림이 임박하다고 가르쳤다. 현대의 전쟁·홍수·한재 등은 말세현상이 분명하며, 그리스도는 먼저 공중에 재림하고 다음으로는 현실로 지상에 재림하여 기독교 교리로서 통치 방침을 삼고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며 만왕의 왕이 되어 지배할 것이다. 구한국 징모병이었으며, 미국 하와이에 노동자로 이주했다가 기독교를 신봉하고 귀국 후 전도사가 되었다.
순교자 양용근 목사(구례교회)는 성도가 마지막 날에 심판의 배심원으로 참가할 것이며, 현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유대의 넓은 땅에 강림하고 12보좌에서 심판하는데 우리 성도들도 그 심판에는 배심판사로서 참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혼인 자리에서 상급을 주는 심판이 행해 질 것이다. 그 동안 지상에서는 불신자만 남아 7년간의 대환난과 12종류의 재앙을 받을 것이다. 교역자 피고들은 한결같이 검사 앞에서 "국체변혁"을 꾀했다는 것은 부인하면서도 말세학을 가르친 것은 시인했다.
김승태는 수난자들의 "신앙이 내세 지향적 신앙이 아니라 현세 변혁적 신앙이며, 신비주의적 미래관이 아니라 현세 목적 지향적 미래관임을 입증해준다"고 해석한다. 또 "세상의 불의와 불법을 경고하면서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이상세계를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설교하였던 것이다"라고 한다. 과연 그들의 신앙이 "내세 지향적 신앙이 아니라 현세 변혁적 신앙"이며, "기독교적 이상세계를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인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종말론 신앙으로 "현세의 난국을 이겨 나가며 성도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이를 극복하도록 격려"했다는 것은 옳은 지적이다. 종말론의 희망적, 위로적 기능은 애양원의 손양원, 경남, 서북지방, 만주지역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 그리고 경북 청송지역의 시온산제국 성도들에게서도 동일했다.
6. 결 론
순천지역의 신사참배거부 단체인 원탁회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4년간 옥살이를 한 바 있는 순천중앙교회 장로 황두연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요사이엔 별별 괴상한 사건이 많이 나타난다. 잡범으로 옥고를 치룬 자도 [신사] 불참배로 인한 옥고라고 자랑하고 옥 문턱에도 못 간 사람들이 신사문제로 옥고를 치뤘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은 신사참배와 관계없이……은둔생활을 하다가 6·25때 순교하신 분을 두고 그 교인들이 신사참배문제로 곤욕을 당해 그 때문에 앓다가 순교했다고 말해서 빈축을 사고 있다.
황두연의 지적은 손양원과 애양원교회의 진리투쟁을 순천노회의 영웅적인 항쟁사로 엮고,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을 신사참배 거부 항쟁의 일부로, 자파의 자랑스런 항재사로 파악하는 한국교회사가들에 대한 적절한 질책이다.
순천 교역자 수난사건은 한국교회 수난사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신앙과 소망으로 인한 것이다. 귀한 신앙 흔적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신사참배 거부 항쟁과는 관련이 없다. 신사참배와 동등한 차원에서 상호 견주어 평가할 수 있는 사건도 아니다. 적극적인 저항을 한 것이 아니며, 공개적인 혹은 비밀결사 투쟁을 하다가 발각된 것도 아니다. 한 건의 실적을 올리려는 일경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뜻하지 않은 수난을 받게 된 사건이다.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한 순천 교역자들의 대응 태도가 그 시대가 낳은 하나의 뚜렷한 '저항' 유형이라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일제 말기의 애양원교회·손양원은 순천노회에 속하지 않았다. 손양원은 광복 전과 마찬가지로 광복 후에도 순천노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가진 바 없다. 그는 고려신학교의 설립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비록 명예직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지만 고려신학교의 총무였고, 고신파 신앙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애양원교회는 순천노회의 신사참배 거부 결정(1938)에서 손양원이 순교(1950)까지 독립교회로 남아 있었다.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 교회에서 분리, 탈퇴한 신사참배 거부운동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 손양원은 장로교 총회가 적(敵)으로 간주한 교역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손양원에 대한 안수는 기존 교회의 치리회적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한상동 중심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기존 교회 조직을 파괴하고 한국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우상숭배를 행하지 않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려고 시도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문제로 존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순천노회 교역자들은 3∼4년간 옥살이를 하면서도 기독교의 근본을 위협하는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증인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미흡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박용희의 불경신론은 일제의 신사참배의 의미를 무의미화한 것이 아니라 순천노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의 신사참배 항거 의지를 무의미화한 것이다. 제1, 제2계명에 입각한 신사참배 항거를 무의미화하기에 충분했다. 순천노회가 일찌감치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의하고 그것에 솔선수범했으며, 교역자들이 3∼4년간 수난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았던 배후에는 일제에게 과거사 청산의 표를 보여주려는 박용희의 불경신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관원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외치도록 부름 받은 자이다. 순천노회 교역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해치는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침묵했고, 박해 앞에서 외적인 순응과 내적인 저항의 형태를 취하고, 속으로는 신사참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우상숭배를 행한, 표리가 부동한 그 이중성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죽음의 험곡(險谷)을 지나온 신앙 선배들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은 아니다. 민족 식민시대에 그들이 겪은 수난은 인간적인 동정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교회사는 규범성을 가진 신앙공동체의 역사를 다룬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좌표는 순천노회 교역자들의 태도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견강부회식으로 기술된 역사는 대부분 밝혀지게 마련이다.*
[이글은 최덕성교수님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김승태 목사의 한부분에 글만이 인터넷에서 표류하기에 이글을 허락받고서 연구에 도움이 되기 원하는 마음에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