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칼럼니스트

아빠가 성교육에 나서라

북코치 2006. 8. 28. 09:27

아빠가 성교육에 나서라


성교육이 없는 한국 가정

아이들의 성문제에 대한 책임은 결국 부모에게 있다. 비록 정부와 학교 차원에서 음란물의 폐해에 대해 교육도 하고 법으로 규제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이들의 바람직하고 안전한 성장을 책임지는 것은 부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가정에 성교육은 없다. 그나마 엄마들은 딸에게 드물지만 성교육을 한다. 문제는 아빠들이다. 아빠가 아들을 성교육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무관심한 아빠도 있고, 성이란 크면서 저절로 배우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아빠도 있고, 어색해서 말을 못하는 아빠도 있다. 이제 달라져야 한다. 어쭙잖은 남자다움이나 소위 사나이 기상만 읊조릴 게 아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월경과 성폭력과 몸가짐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아버지도 아들의 신체적 변화와 성적 욕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십대 남학생들의 성문화는 대단히 공격적이다. 미국의 남학생들 사이에는 누가 더 많은 소녀들과 성 관계를 맺는지 서로 경쟁하는 클럽이 한 때 있었다. 한국에서도 소위 노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여자 백 명을 한 접시라는 은어로 부를 정도로 건수 올리기를 놓고 경쟁하는 문화가 있다.

 

보통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누가 총각 딱지를 일찍 떼느냐 하는 것은 곧잘 관심거리가 된다. 만약 어떤 아이가 동정(童貞)이면 다른 아이들이 웃으며 놀린다. 그것이 소위 또래의 압력이다. 미국에서는 열여섯 살이면 운전면허를 따고, 그런 고등학생들이 차를 타고 다니며, 여자친구와 카섹스를 하곤 한다. 많은 아이들은 그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성 경험을 하지 못하면 어딘가 잘못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로틱 코미디 영화인 ‘아메리칸 파이’를 보면 소년들 사이의 이러한 문화를 잘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사나이는 총각 딱지를 일찍 떼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처럼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이다. 섹스 경험이 없다고 해서 얼간이도 아니다. 물론 여자가 먼저 성 관계를 요구할 때도 있다. 이 때 남자가 “안 돼!”라고 말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 때 “안 돼!”라고 말한다고 해서 남자답지 못한 것도 아니고, 계집애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여자만 헤픈 여자가 있는 게 아니라 남자 중에도 헤픈 남자가 많다. 그런 남자는 바람둥이는 될 수 있을지언정 멋진 신사는 될 수 없다. 여자가 안겨온다고 해서 덥석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존심 있는 남자가 아니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자존심 있는 남자로 키울 필요가 있다.


여자를 다루는 데 서툰 남자아이들

남자아이들은 여자친구도 섹스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가 원하는 것은 섹스가 아닐 때가 많다. 여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친밀감, 즉 자기가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도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서로가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혼외정사에서는 그런 것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여자는 분위기 있는 곳에서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다. 여자는 상호교감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남자아이들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여자아이들을 다루는 데 서투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까지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사람과 수많은 의사소통을 해야만 한다. 그 사람의 정서와 감정, 사고방식, 견해와 가치, 삶의 목적, 종교관 같은 것들을 알 때,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해 지적, 정서적, 정신적 친밀감을 가질 수 있다.

 

남자들은 여성이 ‘안 된다(No)’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된다(Yes)'라고 받아들이는 일이 많다. 여성은 당하면서도 즐긴다는 이른바 강간신화이다. 포르노의 범람은 그와 무관할 수 없다.


“지워버리는 게 어때?”

경제학에 수익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returns)이란 것이 있다. 어떤 것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은 줄어든다. 이 법칙은 성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첫 키스는 신나고 흥분되지만 그것도 곧 시들해진다. 그러면 프렌치 키스로, 애무로, 섹스로 나아가고, 종국에는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떠난다.

 

남학생이 여학생을 임신시키고 나서 보이는 반응은 어떠한가?

“그게 왜 내 책임이야?”

“그 아이가 내 아이인지 어떻게 알아?”

“나는 결혼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 장래를 위한 내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워버리는 게 어때?”

“비용은 내가 알아서 할 게.”

 

대개의 남학생들은 여성이 낙태한 후에 어떻게든 관계를 끝내고 만다. 흔히 남자아이야 잘못되어도 임신하는 일은 없으니까 하고 방치하는 부모들이 많다. 이는 너무나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생각이다. 결혼할 나이도 아닌데 임신을 하여 낙태에까지 이르는 일이 어떻게 딸만의 문제이고 아들의 문제는 아니란 말인가.


NO라고 말해주는 아빠

아버지 노릇은 아주 작은 일에서 출발한다. 아버지는 틈나는 대로 아이와 함께 텔레비전도 보고 비디오도 보고 영화도 보고 인터넷 여행도 해야 한다. 같이 앉아 비디오를 보다가 나쁜 장면이 나오면 단호하게 “아니다(NO)”라고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소주를 병째 나발을 불거나, 줄담배를 피거나, 여성을 구타하거나, 외도를 하는 장면이 나올 때는 “잘못됐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른들은 으레 그러는 줄 여긴다. 가치관이 한창 형성될 시기에 나쁜 관념이 자리 잡지 않도록 곁에서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부모와 자녀의 평소 유대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학교폭력조직 일진회의 입회와 탈퇴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일진회 아이들과 휩쓸려 다니다가도 부모와 끈끈한 유대가 있는 아이들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부모와의 유대가 약한 아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다.


성문제는 삶의 문제이다

성교육 운동가 구성애 씨는 청소년의 성문제를 삶의 문제로 풀 것을 제안한다. 청소년에게 있어서 고민의 본질은 삶의 문제이다. 무엇을 하며 재미있게 살 것인가의 문제라고 한다. 현실은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꿈이 없고 자기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당장 재미있는 건전한 문화도 없다. 그것이 문제다. 접근법을 다르게 하자. 어떤 성문제를 노출하였을 때 삶의 문제로 보고 질문을 던져보자. 성문제 자체로만 접근하면 아이들은 감춘다. 의사소통은 기술 그 이상이다. 부모는 아이의 인생에 대해,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진심이 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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