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야의 달인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볼 때마다 그들의 재빠른 손놀림에 놀라고 그들의 직업 정신에 감탄한다. 소위 말하는 3D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이 나오지만,고뇌와 번민에 전 화이트칼라들의 표정과 달리 자신감에 찬 그들의 모습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한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하다보면 그처럼 달인이 되기도 하는 모양인데,번역이란 우물만 10여년 파온 내게는 아직도 이 우물물을 퍼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매번 활자 앞에서는 손이 떨린다. 그토록 조심스레 퍼올려도 좋은 문장,멋진 단어들이 내 손으로 옮기는 과정에 흠집이 날 때도 있고 훼손될 때도 있어 더러 비난을 사기도 한다. 번역이란 재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긴 하지만 절대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어느 여성 아나운서가 처음으로 번역한 책이 장기간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어 화제다. 아나운서가 번역을 했다는 사실도 화제이고 그 책이 출판 불황 시대에 100만부를 돌파하여서도 화제다. 아무리 베스트셀러여도 언론에서 역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쳐주는 일은 좀처럼 드문데,이 책은 나오면서부터 온갖 언론이 ‘역자’에 주목하여 주었다. 이런 효과를 노려 출판사에서도 그녀에게 역자의 이름을 맡겼을 테지.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 번역한 것이다. 두렵고 떨렸다. 하룻밤에 100쪽 한 적도 있다. 그 인터뷰를 보며 생각했다. 오,얼굴만 예쁘고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번역 실력도 뛰어나네. 두렵고 떨리는 첫 번역인데 하룻밤에 100쪽이나 하다니. 10여년 번역일을 했지만 난 아직 하룻밤에 100쪽은 무리인데 말이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번역계에 몸담아도 훌륭한 번역가가 될 수 있을 텐데,번역료란 게 아나운서 수입에 비하면 껌 반쪽 값이라 아마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지(이 책으론 좀 벌었겠지만).
어쨌거나 유례 없는 역자 팬 사인회도 네차례나 하면서 출판사의 마케팅은 초대박을 터뜨렸다. 그 여파인지 얼마 전에는 또 다른 아나운서가 번역서를 냈다는 기사가 보인다. 출판사들이여,얼굴마담 내세우는 이런 마케팅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은가? 싶지만 그것이 아나운서였다는 게 다를 뿐 이름 없는 실제 역자 대신 대학 교수나 유명인을 내세우는 관행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닐 것이다. 나 또한 내 이름이 있는 첫 책이 나오기 전에는 대역을 했었고,지금도 주위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대역하는 후배들이 많으니. 그녀는 인터뷰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 좋지 않냐고. 좋지 않다.
권남희(일본문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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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렇게 해서라도 많이들 보면 좋은 건가?
그래도 여전히 씁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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